여담 하나. 루이 나이웨이(芮乃偉) 9단이 세계최강 이창호 9단을 꺾고 제43기 국수전 도전자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한국바둑의 태두(泰斗)인 조남철 9단은 허허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루이가 국수(國手)에 오르면 우리 남자 기사들한테 가위를 하나씩 선물해야 쓰것구먼.”
‘가위론’에 이어 요즘 바둑계에 회자되고 있는 또 하나의 여담. 한국의 최강 라인인 이창호-조훈현 9단을 연파한 ‘원더우먼’ 루이 9단이 제1회 흥창배 세계여자바둑선수권 결승1국에서 15세 소녀 조혜연 2단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하자 이창호 9단이 겸연쩍은 얼굴로 되뇌었다는 말.
“아! 이제 앞으로 혜연이의 얼굴을 어떻게 본담.”
시쳇말로 쪽(?) 다 팔렸다는 얘기였다. 불과 얼마 전 국수전 도전자결정전에서 자신은 대마까지 다 때려잡히며 루이 9단에게 졌는데 나이 어린 여자 후배기사가 당당히 이기고 있으니…. 이창호 9단이 92년 도쿄에서 열린 응씨배(應氏盃)에서 처음으로 루이 9단에게 졌을 때 그는 아버지에게 “은퇴해야겠다” 는 넋두리를 늘어놓은 적이 있는데, 이번 국수전 도전자결정전에서 진 다음날엔 동생 영호와 낚시를 갔다가 새벽 2시쯤 귀가했다고 한다.
조훈현 9단에게 국수를 딴 직후 루이 9단은 이희호여사로부터 축전을 받았다. 여성의 몸으로 남성들이 판치는 반상(盤上)을 제패한 노고를 치하하고 축하하는 전보였다. 청와대로부터 축전을 받을 정도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루이 9단. 세계바둑 넘버원 이창호 9단의 ‘쪽’을 팔리게 한 조혜연 2단. 새 천년 벽두부터 ‘21세기는 여류바둑시대의 도래’를 예고라도 하는 양 한껏 위세를 떨치고 있는 우리 여류바둑의 수준은 과연 소문만큼 대단한가. 발전 가능성은 어느 정도인가. 반상의 성(性) 대결에서 남성과 대등한 대국을 벌일 수 있게 되기까지의 원동력은 어떤 것이었을까.
솔직히 3, 4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여류바둑은 온실에서 자란 ‘화초바둑’으로 불렸다. 남성기사들은 토너먼트 대진에서 여성기사를 만나면 ‘꽃조’를 만났다고 즐거워했다. 어린애 손목 비틀기식으로 쉽게 1승을 보태주는 ‘기쁨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가시돋친 들장미다. 꽃조가 아니라 ‘으악조’ 다. 조훈현-유창혁 9단급 전력의 소유자라 하더라도 손도 안대고 코풀려 하다가는 그야말로 큰코 다치는 수준에 이르렀다. 게다가 막내딸뻘 되는 10대 이성(異性) 기사와의 대국은 이기면 본전이요 지면 망신인 부담도 안고 있다.
이창호 9단(51승10패, 승률 83.61 %)을 제치고 승률 1위를 기록한 루이 9단(33승6패, 84.62%)은 이미 10여년 전부터 세계가 인정한 ‘철녀’(鐵女)였으므로 논외로 치더라도 우리 여류 유망주들의 지난해 성적표를 훑어보면 적지 않은 남성기사들이 직격탄을 맞고 있음을 보게 된다.
가장 괄목할 성적을 보인 아마조네스의 여전사는 일찍이 ‘여자 유창혁’으로 불리며 기대를 잔뜩 받고 있는 박지은(17) 2단. 이달 11일 이영신(23) 2단을 2대 1로 물리치고 초대 여류명인에 오른 박2단은 지난해 37승25패의 성적을 거두어 승점면으로는 33승을 거둔 루이 9단보다 오히려 앞서 여류기사 가운데 다승 톱을 차지하고 있다. 이중 대 남성기사와의 전적은 20승18패. 승점을 안겨준 남성기사군에는 서봉수 9단의 이름도 보인다. 오리지널 유창혁도 이 ‘여자 유창혁’에게 초반 대마가 잡혀 용궁 문턱까지 갔다 생환한 경험이 있다.
여류바둑이 이처럼 괄목하게 된 원동력은 무엇일까. 첫째는 한국기원의 여류바둑 장기 육성책을 들고 싶다. 한국기원은 90년 균형적인 바둑발전을 위해 여자들만의 프로입문 대회인 여류입단대회를 부활했다. 지난 10년간 매년 2명씩 꾸준히 선발(99년부터는 매년 1명으로 축소)한 덕으로 현재 한국 여류기사의 수는 모두 22명으로 늘었다. 참고로 일본은 70여명, 중국은 중국기원에서 인정하는 전업기사만 20여명이다. 기사 수가 늘어나면서 경쟁력이 치열해졌다. 충암연구회로 대표되는 세계최강의 남자 신예기사들과 섞여 가진 연구모임과 실전리그도 일취월장할 수 있었던 또 한 가지 이유다.
무엇보다 주력기사들의 연령층이 30대 이상인 일본, 중국에 비해 우리 여류기사들의 나이가 대부분 10∼20대 초반이라는 점은 대단한 잠재력이자 무기이다. 박세리, 김미현처럼 ‘이창호 신드롬’에 젖은 부모들이 어린 딸아이의 손을 잡고 바둑교실을 찾은 덕이 적지 않긴 하지만, 남성들의 전유물로나 여겨졌던 바둑을 스스럼없이 시키게 된 내면에는 그만큼 여권이 신장된 사회구조적인 환경도 작용했다고 본다.
이런 차에 세계여류최강 루이 9단의 한국정착은 지표면 아래에 매장된 가스에 불을 붙인 계기가 되었다. 일본바둑계는 루이 9단의 독식을 염려해 일본활동을 거부했으나 한국의 여류기사들은 ‘타도 루이!’라는 확실한 목표타를 설정했고, 그 어느 때보다 의욕을 불살랐다. 루이 9단의 정복은 곧 세계여류바둑의 정복이므로.
이와 같은 여러가지 요인에 힘입어 한국여류바둑은 불과 10년만에 일본여류바둑을 추월했다. 여류최강국인 중국과는 아직 한두 걸음 뒤져 있는 실정이기는 하나 최근 흥창배 세계여자바둑선수권전에서 조혜연 2단이 중국의 펑 윈(豊雲) 8단, 화 쉐밍(華學明) 7단을 연파하고 결승에 진출한 것에서 보듯 2, 3년이면 충분히 따라잡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루이 9단을 극복하는 게 쉽지 않은 과제이기는 하나 작년 골드뱅크배 특별3번기에서 권효진(18) 2단이 한국여류기사로선 처음으로 루이 9단에게 패점 하나를 안긴 것을 비롯, 조혜연 2단이 그새 혼자서 두 번이나 패점을 더 안기는 기염을 토하고 있어 차츰 극복의 실마리를 잡아가는 느낌이다.
머지 않은 장래에 바둑이 올림픽 종목으로 채택된다면, 그때는 이미 전력이 백일하에 드러난 남자바둑보다는 여류바둑이 더 효녀노릇을 할 것이다.
“루이가 국수(國手)에 오르면 우리 남자 기사들한테 가위를 하나씩 선물해야 쓰것구먼.”
‘가위론’에 이어 요즘 바둑계에 회자되고 있는 또 하나의 여담. 한국의 최강 라인인 이창호-조훈현 9단을 연파한 ‘원더우먼’ 루이 9단이 제1회 흥창배 세계여자바둑선수권 결승1국에서 15세 소녀 조혜연 2단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하자 이창호 9단이 겸연쩍은 얼굴로 되뇌었다는 말.
“아! 이제 앞으로 혜연이의 얼굴을 어떻게 본담.”
시쳇말로 쪽(?) 다 팔렸다는 얘기였다. 불과 얼마 전 국수전 도전자결정전에서 자신은 대마까지 다 때려잡히며 루이 9단에게 졌는데 나이 어린 여자 후배기사가 당당히 이기고 있으니…. 이창호 9단이 92년 도쿄에서 열린 응씨배(應氏盃)에서 처음으로 루이 9단에게 졌을 때 그는 아버지에게 “은퇴해야겠다” 는 넋두리를 늘어놓은 적이 있는데, 이번 국수전 도전자결정전에서 진 다음날엔 동생 영호와 낚시를 갔다가 새벽 2시쯤 귀가했다고 한다.
조훈현 9단에게 국수를 딴 직후 루이 9단은 이희호여사로부터 축전을 받았다. 여성의 몸으로 남성들이 판치는 반상(盤上)을 제패한 노고를 치하하고 축하하는 전보였다. 청와대로부터 축전을 받을 정도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루이 9단. 세계바둑 넘버원 이창호 9단의 ‘쪽’을 팔리게 한 조혜연 2단. 새 천년 벽두부터 ‘21세기는 여류바둑시대의 도래’를 예고라도 하는 양 한껏 위세를 떨치고 있는 우리 여류바둑의 수준은 과연 소문만큼 대단한가. 발전 가능성은 어느 정도인가. 반상의 성(性) 대결에서 남성과 대등한 대국을 벌일 수 있게 되기까지의 원동력은 어떤 것이었을까.
솔직히 3, 4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여류바둑은 온실에서 자란 ‘화초바둑’으로 불렸다. 남성기사들은 토너먼트 대진에서 여성기사를 만나면 ‘꽃조’를 만났다고 즐거워했다. 어린애 손목 비틀기식으로 쉽게 1승을 보태주는 ‘기쁨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가시돋친 들장미다. 꽃조가 아니라 ‘으악조’ 다. 조훈현-유창혁 9단급 전력의 소유자라 하더라도 손도 안대고 코풀려 하다가는 그야말로 큰코 다치는 수준에 이르렀다. 게다가 막내딸뻘 되는 10대 이성(異性) 기사와의 대국은 이기면 본전이요 지면 망신인 부담도 안고 있다.
이창호 9단(51승10패, 승률 83.61 %)을 제치고 승률 1위를 기록한 루이 9단(33승6패, 84.62%)은 이미 10여년 전부터 세계가 인정한 ‘철녀’(鐵女)였으므로 논외로 치더라도 우리 여류 유망주들의 지난해 성적표를 훑어보면 적지 않은 남성기사들이 직격탄을 맞고 있음을 보게 된다.
가장 괄목할 성적을 보인 아마조네스의 여전사는 일찍이 ‘여자 유창혁’으로 불리며 기대를 잔뜩 받고 있는 박지은(17) 2단. 이달 11일 이영신(23) 2단을 2대 1로 물리치고 초대 여류명인에 오른 박2단은 지난해 37승25패의 성적을 거두어 승점면으로는 33승을 거둔 루이 9단보다 오히려 앞서 여류기사 가운데 다승 톱을 차지하고 있다. 이중 대 남성기사와의 전적은 20승18패. 승점을 안겨준 남성기사군에는 서봉수 9단의 이름도 보인다. 오리지널 유창혁도 이 ‘여자 유창혁’에게 초반 대마가 잡혀 용궁 문턱까지 갔다 생환한 경험이 있다.
여류바둑이 이처럼 괄목하게 된 원동력은 무엇일까. 첫째는 한국기원의 여류바둑 장기 육성책을 들고 싶다. 한국기원은 90년 균형적인 바둑발전을 위해 여자들만의 프로입문 대회인 여류입단대회를 부활했다. 지난 10년간 매년 2명씩 꾸준히 선발(99년부터는 매년 1명으로 축소)한 덕으로 현재 한국 여류기사의 수는 모두 22명으로 늘었다. 참고로 일본은 70여명, 중국은 중국기원에서 인정하는 전업기사만 20여명이다. 기사 수가 늘어나면서 경쟁력이 치열해졌다. 충암연구회로 대표되는 세계최강의 남자 신예기사들과 섞여 가진 연구모임과 실전리그도 일취월장할 수 있었던 또 한 가지 이유다.
무엇보다 주력기사들의 연령층이 30대 이상인 일본, 중국에 비해 우리 여류기사들의 나이가 대부분 10∼20대 초반이라는 점은 대단한 잠재력이자 무기이다. 박세리, 김미현처럼 ‘이창호 신드롬’에 젖은 부모들이 어린 딸아이의 손을 잡고 바둑교실을 찾은 덕이 적지 않긴 하지만, 남성들의 전유물로나 여겨졌던 바둑을 스스럼없이 시키게 된 내면에는 그만큼 여권이 신장된 사회구조적인 환경도 작용했다고 본다.
이런 차에 세계여류최강 루이 9단의 한국정착은 지표면 아래에 매장된 가스에 불을 붙인 계기가 되었다. 일본바둑계는 루이 9단의 독식을 염려해 일본활동을 거부했으나 한국의 여류기사들은 ‘타도 루이!’라는 확실한 목표타를 설정했고, 그 어느 때보다 의욕을 불살랐다. 루이 9단의 정복은 곧 세계여류바둑의 정복이므로.
이와 같은 여러가지 요인에 힘입어 한국여류바둑은 불과 10년만에 일본여류바둑을 추월했다. 여류최강국인 중국과는 아직 한두 걸음 뒤져 있는 실정이기는 하나 최근 흥창배 세계여자바둑선수권전에서 조혜연 2단이 중국의 펑 윈(豊雲) 8단, 화 쉐밍(華學明) 7단을 연파하고 결승에 진출한 것에서 보듯 2, 3년이면 충분히 따라잡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루이 9단을 극복하는 게 쉽지 않은 과제이기는 하나 작년 골드뱅크배 특별3번기에서 권효진(18) 2단이 한국여류기사로선 처음으로 루이 9단에게 패점 하나를 안긴 것을 비롯, 조혜연 2단이 그새 혼자서 두 번이나 패점을 더 안기는 기염을 토하고 있어 차츰 극복의 실마리를 잡아가는 느낌이다.
머지 않은 장래에 바둑이 올림픽 종목으로 채택된다면, 그때는 이미 전력이 백일하에 드러난 남자바둑보다는 여류바둑이 더 효녀노릇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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