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우리나라에서는 누군가에 의해서 ‘신지식인’이라는 낯선 개념이 창안되고 그러한 범주에 속하는 인간이 국가적 차원에서 영웅시되고 그러한 영웅의 출현이 호소되고 있다. 도대체 신지식인이란 어떤 부류에 속하는 인간이며, 신지식인을 영웅시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신지식인’은 기존의 ‘지식인’과 대치됨으로써만 그 의미를 가질 수 있으며, 전자의 개념과 가치는 후자의 개념과 그 가치에 비추어서만 그 뜻이 분명해질 수 있다.
지식이 진리의 소유를 뜻하고, 진리가 인간의 욕망과 독립되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물리적-정신적 현상과 그것의 작동원리를 지칭한다면 지식인은 진리, 즉 물리적-정신적인 객관적 현상과 그것의 작동원리를 이미 파악했거나 그러한 것을 파악하고자 노력하는 인간이다. 이런 점에서 불교-기독교의 종교적 교리, 노장사상,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같은 철학적 체계, 지동설-상대성이론-불확정성이론과 같은 과학적 학설, 진화론-정신분석학과 같은 인간학, 정치사회학-문학-예술 등 수많은 역사는 진리일 수 있고 기독교나 불교 신자, 노자나 장자, 아인슈타인이나 하이젠베르크, 다윈, 프로이트, 모든 역사가, 문학-예술 평론가들, 저널리스트들은 다같이 지식인이며, 이러한 진리나 학자들의 이론에 어느 정도 관심을 갖고 있거나 친숙한 이른바 교양인들은 다같이 지식인이다. ‘신지식인’이 위와 같은 ‘지식인’과 구별됨으로써만 그 의미를 가질 수 있다면, 그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물리적-정신적 현상과 그것의 작동 원리로서의 진리의 소유나 탐구와는 상관없는 인간이며, 그가 말하는 지식은 ‘진리의 소유’ 를 뜻할 수 없다. ‘신지식인’이라는 말이 사용되는 문맥에서 유추해 보면 사실 그렇다. ‘신지식인’ 이라고 할 때의 ‘지식’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대상의 본질과 작동원리로서의 진리의 파악이나 추구와는 무관한 무엇인가를 만들거나 성취해내는 능력을 뜻하며, ‘신지식인’은 진리의 소유나 추구가 아니라 어떤 목적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거나 무엇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 더 정확히 말해서 어떤 방법으로든지 상품적 가치를 창출해 낼 수 있는 자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신지식인’을 대표하는 자는 플라톤이나 노자, 아인슈타인이나 푸코, 교수나 언론인이 아니라 빌 게이츠나 손정의, 주식투자가 솔로스나 수많은 벤처기업가, 마이클 잭슨이나 만화가, 박찬호나 박세리 등이다.
신지식인 필요하지만 지식인 가치 더 중요
그렇다면 ‘진리’와 ‘물질적 부’, ‘지식’과 ‘기술’의 개념적 구별을 고의적으로 왜곡하거나 무지하게 혼동하지 않고서는 ‘신지식인’이라는 개념은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 진리가 객관적 어떤 대상을 지칭하는데 물질적 부는 객관적 대상의 도구적 가치이고, 지식이 진리의 인식인데 반해서 기술은 어떤 목적 달성을 위한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진리와 지식의 가치가 바로 그 자체에 있는데 반해서 물질적 부와 기술의 가치는 어디까지나 수단으로만 존재한다. 지적, 윤리적, 미학적 가치와 같은 내재적 가치와도 아무 상관없는 ‘상품적 가치 창출에 능난한 사람’을 뜻한다면 ‘신지식인’은 언뜻 듣기와는 달리 지식인이 아니다. 이런 뜻의 ‘신지식인’을 주장하는 이들의 마음 속에는 지식인, 지식, 진리에 대한 강한 경멸심이 들어 있고 그러한 경멸심은 정당하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기본적인 것이 경제적 가치의 생산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적지 않은 지식과 지식인이 현학적인 것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식인’이 진리라는 지적 가치를 추구하는 이론적 인간이라면 ‘신지식인’이 물질적 부라는 실용적 가치를 창출하는 실용적 인간이라는 데는 변함이 없고, 후자의 인간적 사회적 가치가 이미 주어진 체제 안에서의 승리와 성공에 있다면, 전자의 인간적 사회적 가치는 이미 주어진 체제를 반성하고 비판하는 데 있다. 이런 점에서 지식인은 필연적으로 개혁적이며 혁명적이고, 신지식인은 폐쇄적이며 보수적이다. 반선적 및 비판적 능력이 없이 개인이나 사회는 결코 발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위험한 사상누각이 되기 쉽다. 극변의 혼동 속에 빠져 있는 오늘의 세계적 현실에서 ‘신지식인’은 필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지식인’의 가치가 어느 때보다도 더 중시되어야 한다.
지식이 진리의 소유를 뜻하고, 진리가 인간의 욕망과 독립되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물리적-정신적 현상과 그것의 작동원리를 지칭한다면 지식인은 진리, 즉 물리적-정신적인 객관적 현상과 그것의 작동원리를 이미 파악했거나 그러한 것을 파악하고자 노력하는 인간이다. 이런 점에서 불교-기독교의 종교적 교리, 노장사상,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같은 철학적 체계, 지동설-상대성이론-불확정성이론과 같은 과학적 학설, 진화론-정신분석학과 같은 인간학, 정치사회학-문학-예술 등 수많은 역사는 진리일 수 있고 기독교나 불교 신자, 노자나 장자, 아인슈타인이나 하이젠베르크, 다윈, 프로이트, 모든 역사가, 문학-예술 평론가들, 저널리스트들은 다같이 지식인이며, 이러한 진리나 학자들의 이론에 어느 정도 관심을 갖고 있거나 친숙한 이른바 교양인들은 다같이 지식인이다. ‘신지식인’이 위와 같은 ‘지식인’과 구별됨으로써만 그 의미를 가질 수 있다면, 그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물리적-정신적 현상과 그것의 작동 원리로서의 진리의 소유나 탐구와는 상관없는 인간이며, 그가 말하는 지식은 ‘진리의 소유’ 를 뜻할 수 없다. ‘신지식인’이라는 말이 사용되는 문맥에서 유추해 보면 사실 그렇다. ‘신지식인’ 이라고 할 때의 ‘지식’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대상의 본질과 작동원리로서의 진리의 파악이나 추구와는 무관한 무엇인가를 만들거나 성취해내는 능력을 뜻하며, ‘신지식인’은 진리의 소유나 추구가 아니라 어떤 목적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거나 무엇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 더 정확히 말해서 어떤 방법으로든지 상품적 가치를 창출해 낼 수 있는 자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신지식인’을 대표하는 자는 플라톤이나 노자, 아인슈타인이나 푸코, 교수나 언론인이 아니라 빌 게이츠나 손정의, 주식투자가 솔로스나 수많은 벤처기업가, 마이클 잭슨이나 만화가, 박찬호나 박세리 등이다.
신지식인 필요하지만 지식인 가치 더 중요
그렇다면 ‘진리’와 ‘물질적 부’, ‘지식’과 ‘기술’의 개념적 구별을 고의적으로 왜곡하거나 무지하게 혼동하지 않고서는 ‘신지식인’이라는 개념은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 진리가 객관적 어떤 대상을 지칭하는데 물질적 부는 객관적 대상의 도구적 가치이고, 지식이 진리의 인식인데 반해서 기술은 어떤 목적 달성을 위한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진리와 지식의 가치가 바로 그 자체에 있는데 반해서 물질적 부와 기술의 가치는 어디까지나 수단으로만 존재한다. 지적, 윤리적, 미학적 가치와 같은 내재적 가치와도 아무 상관없는 ‘상품적 가치 창출에 능난한 사람’을 뜻한다면 ‘신지식인’은 언뜻 듣기와는 달리 지식인이 아니다. 이런 뜻의 ‘신지식인’을 주장하는 이들의 마음 속에는 지식인, 지식, 진리에 대한 강한 경멸심이 들어 있고 그러한 경멸심은 정당하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기본적인 것이 경제적 가치의 생산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적지 않은 지식과 지식인이 현학적인 것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식인’이 진리라는 지적 가치를 추구하는 이론적 인간이라면 ‘신지식인’이 물질적 부라는 실용적 가치를 창출하는 실용적 인간이라는 데는 변함이 없고, 후자의 인간적 사회적 가치가 이미 주어진 체제 안에서의 승리와 성공에 있다면, 전자의 인간적 사회적 가치는 이미 주어진 체제를 반성하고 비판하는 데 있다. 이런 점에서 지식인은 필연적으로 개혁적이며 혁명적이고, 신지식인은 폐쇄적이며 보수적이다. 반선적 및 비판적 능력이 없이 개인이나 사회는 결코 발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위험한 사상누각이 되기 쉽다. 극변의 혼동 속에 빠져 있는 오늘의 세계적 현실에서 ‘신지식인’은 필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지식인’의 가치가 어느 때보다도 더 중시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