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연극하기가 얼마나 어려워요. 정치하는 사람들이 문화예술 귀한 걸 모르지. 내가 그것 때문에 속상했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에요. 그런데도 연극하겠다고 고생하는 젊은 사람들을 보면 참….”
이병복 ‘극단자유’(자유) 초대(初代) 대표는 최치림 현 대표 쪽을 바라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1927년 태어난 구순의 이 초대 대표에게 44년생 최 대표는 아직 ‘젊은이’다. 차마 맺지 못한 말끝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후배에 대한 안타까움과 신뢰가 동시에 묻어났다.
이날 마주 앉은 두 전·현직 대표는, 해외 일정 때문에 함께 하지 못한 1932년생 김정옥 전 대표와 더불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 극단을 이끌어온 주인공들이다. 세 사람은 그사이 번갈아가며 연극계의 각종 상을 휩쓸었고 무대미술가협회장과 대한민국예술원회원(이병복),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과 대한민국예술원장(김정옥), 국립극단 예술감독과 한국공연예술센터 이사장(최치림) 등을 역임했다. ‘자유’가 창단 50주년을 기념해 1월 서울 동숭아트센터 동숭홀 무대에 올리는 연극 ‘그 여자 사람 잡네’에서 각각 번역(이병복), 예술감독(김정옥), 연출(최치림)을 맡은 ‘현역’ 연극인이기도 하다.
“원래 이 작품은 1971년 ‘자유’가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프로랑스는 어디에’라는 제목으로 공연했던 거예요. 당시에도 이병복 선생님이 번역을 하셨고, 제가 연출을 맡았죠. 한겨울에 막을 올렸는데도 연일 객석이 꽉 찰 정도로 인기가 많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으로 ‘한국일보 연극영화상 신인연출상’을 받아 더욱 뜻깊기도 하고요.”
“‘자유’가 창립할 무렵 한국에서 연극은 진지하고 심각한 걸로 여겨졌거든요. 희극은 가볍게 여기고 천시하는 분위기가 있었고요. 우리(이병복, 김정옥)는 그런 흐름을 바꿔보자는 데 의기투합했어요. 원래 공연은 흥겹고 신나는 거잖아요. 그래서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의 고전 희극을 각색해 한국에 소개하자, 사람들이 연극을 즐기게 하자’고 마음먹었죠.”
이 초대 대표가 미스터리 코미디극 ‘그 여자 사람 잡네’를 번역하며 빠른 템포의 대사를 통해 작품의 리듬감을 살리려고 노력한 이유다. ‘자유’는 1966년 창단 첫 작품으로도 이탈리아 극작가 에두아르도 스칼페타의 희극 ‘따라지의 향연’을 선택해 관객 몰이에 성공했다. 김 전 대표가 연출한 이 작품은 이듬해 동아연극상 대상을 차지하며 평단의 인정도 받았다.
이 초대 대표가 현재의 ‘연극판’에서 고군분투하는 최 대표를 가리켜 ‘딱하다’고 말하긴 했지만, 사실 50년 전 ‘자유’가 창립했을 때부터, 아니 어쩌면 이 초대 대표가 대학 졸업기념 연극 무대에 서며 처음 ‘프로페셔널’ 연극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 194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이 땅에서 연극이 쉬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유복한 집안에서 나고 자란 이 초대 대표는 연극을 시작할 무렵부터 ‘양반 가문에 광대가 났다’며 반대하는 가족에게 시달렸다. 당시 대학 스승이던 정지용 시인이 그의 어려움을 알고 예명을 지어주기까지 했을 정도라고 한다. 이 초대 대표는 “당시 선생님이 ‘네가 문과(이화여대 영문학과)를 다녔으니 성은 ‘문’으로 하고 각설이처럼 설치고 다니니 이름은 ‘설이’로 하자’며 나를 ‘문설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문학도와 광대의 의미가 함께 담긴’ 이 이름이 마음에 들었던 듯, 이 초대 대표는 그 시절을 떠올리며 소녀처럼 웃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발발한 6·25전쟁은 이 초대 대표가 그 스승을 영영 다시 만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연극인을 꿈꾸던 그의 앞길도 가로막았다. 함께 극단을 하던 동료 중 일부가 폭격에 목숨을 잃고 나머지도 뿔뿔이 흩어진 것이다. 이 초대 대표는 이후 전쟁 중 만난 화가 고 권옥연 씨와 결혼해 함께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고, 그곳에서 조각과 의상 등을 배웠다. 이것이 그가 귀국 후 무대예술가로 연극계에 복귀하는 계기가 됐다.
‘자유’가 1991년 발간한 ‘창단 25주년 기념 자료집’에 따르면 이 초대 대표는 65년 봄 무렵부터 50년대 활동했던 극단의 재건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당시 프랑스 유학파 연출가로 주목받던 김 전 대표에게 자문을 구했다. 이 과정에서 뜻이 통한 두 사람이 ‘새로운 연극’을 목표로 결성한 것이 바로 ‘자유’다. 이 초대 대표는 의상, 무대 등 미술작업 전반을, 김 전 대표는 연출을 주로 맡았다. 이 초대 대표는 이에 대해 “우리는 처음부터 극단 내에서 하는 일이 달랐고, 성격도 정반대였다. 나는 호랑이인데 김 선생(김 전 대표)은 원숭이라, 내가 불같이 굴어도 늘 잘 받아줬다”고 했다. 두 사람 다 연극에 대해 끝없는 열정을 가진 점, 그리고 한국적 환경에 발을 딛고 ‘지금, 여기의 연극’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점 등도 ‘자유’가 쉽지 않은 환경에서 오랜 세월 작품을 이어올 수 있는 배경이 됐다. 두 전 대표를 ‘스승’으로 모시는 최 대표 역시 이 점에서 뜻을 같이한다. 그는 “1970년대 이후 우리나라의 영화, 방송 산업이 성장하면서 많은 연극인이 다른 장르로 눈을 돌리기도 했지만, 나는 그런 적이 없다. 연극 안에서도 다양한 시도와 실험을 할 수 있다고 여겼다”고 밝혔다. 그런 ‘자유로움’이 ‘자유’의 강점이기도 했다.
이들의 바람은 앞으로도 ‘자유’가 ‘지금, 여기의 연극’, 달리 말하면 ‘오늘의 우리 연극’을 계속하는 것, 끝없는 도전과 실험을 통해 더 많은 관객과 호흡하는 것이다. 최 대표는 “경기 남양주에 이 선생님이 오랜 세월에 걸쳐 조성해온 공간이 있다. 조선 영조의 딸 화길옹주가 살던 ‘궁집’ 등 아름다운 고택들을 옮겨 짓고 정원과 연못, 석물 등으로 공간을 가꿔 그 자체가 아름다운 무대가 되는 곳이다. ‘무의자 박물관’이라고 이름 붙인 그곳을 배경 삼아 조만간 새로운 방식의 연극을 공연하려 한다”고 밝혔다. 이외에도 연극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다양한 시도를 할 계획이라고 한다. ‘더 실험적으로, 더 글로벌하게’가 최 대표가 밝힌 ‘자유’의 미래 계획이다. 그렇게 새로운 50년이 시작되고 있다.
이병복 ‘극단자유’(자유) 초대(初代) 대표는 최치림 현 대표 쪽을 바라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1927년 태어난 구순의 이 초대 대표에게 44년생 최 대표는 아직 ‘젊은이’다. 차마 맺지 못한 말끝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후배에 대한 안타까움과 신뢰가 동시에 묻어났다.
영원한 현역
두 사람을 만난 건 올해로 창립 50주년을 맞은 ‘자유’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1966년 서울 장충동 한 식당에서 처음 막을 올린 ‘자유’는 이후 ‘무엇이 될꼬 하니’ ‘피의 결혼’ ‘왕자호동’ 등 숱한 화제작을 무대에 올리며 한국 현대 연극의 ‘살아 있는 역사’가 됐다. 김혜자, 최불암, 박정자, 김용림, 김무생 등 많은 연기자가 ‘자유’를 통해 명성을 얻었고 고(故) 추송웅, 손숙, 윤소정 등의 배우도 ‘자유’를 거쳐 갔다.이날 마주 앉은 두 전·현직 대표는, 해외 일정 때문에 함께 하지 못한 1932년생 김정옥 전 대표와 더불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 극단을 이끌어온 주인공들이다. 세 사람은 그사이 번갈아가며 연극계의 각종 상을 휩쓸었고 무대미술가협회장과 대한민국예술원회원(이병복),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과 대한민국예술원장(김정옥), 국립극단 예술감독과 한국공연예술센터 이사장(최치림) 등을 역임했다. ‘자유’가 창단 50주년을 기념해 1월 서울 동숭아트센터 동숭홀 무대에 올리는 연극 ‘그 여자 사람 잡네’에서 각각 번역(이병복), 예술감독(김정옥), 연출(최치림)을 맡은 ‘현역’ 연극인이기도 하다.
“원래 이 작품은 1971년 ‘자유’가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프로랑스는 어디에’라는 제목으로 공연했던 거예요. 당시에도 이병복 선생님이 번역을 하셨고, 제가 연출을 맡았죠. 한겨울에 막을 올렸는데도 연일 객석이 꽉 찰 정도로 인기가 많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으로 ‘한국일보 연극영화상 신인연출상’을 받아 더욱 뜻깊기도 하고요.”
최 대표의 얘기다. 두 사람에 따르면 ‘자유’는 1978년과 79년에도 이 작품을 무대에 올렸고, 이때부터 ‘그 여자 사람 잡네’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초대 대표는 이 공연에도 번역자로 참여했다. 최 대표는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한 이 초대 대표가 프랑스 출신 원작자 로베르 토마의 희곡을 세련된 한국어로 잘 풀어내 초연 때부터 좋은 평을 들었다. 특히 리듬감 있는 대사를 관객들이 참 좋아했다”고 회고했다.
“‘자유’가 창립할 무렵 한국에서 연극은 진지하고 심각한 걸로 여겨졌거든요. 희극은 가볍게 여기고 천시하는 분위기가 있었고요. 우리(이병복, 김정옥)는 그런 흐름을 바꿔보자는 데 의기투합했어요. 원래 공연은 흥겹고 신나는 거잖아요. 그래서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의 고전 희극을 각색해 한국에 소개하자, 사람들이 연극을 즐기게 하자’고 마음먹었죠.”
이 초대 대표가 미스터리 코미디극 ‘그 여자 사람 잡네’를 번역하며 빠른 템포의 대사를 통해 작품의 리듬감을 살리려고 노력한 이유다. ‘자유’는 1966년 창단 첫 작품으로도 이탈리아 극작가 에두아르도 스칼페타의 희극 ‘따라지의 향연’을 선택해 관객 몰이에 성공했다. 김 전 대표가 연출한 이 작품은 이듬해 동아연극상 대상을 차지하며 평단의 인정도 받았다.
한 번 더 새롭게
당시 ‘자유’를 이끌며 중앙대 연극영화과 교단에도 섰던 김 전 대표의 제자로, 졸업과 동시에 ‘자유’에 몸담은 최 대표는 “그 무렵 연극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유’는 뛰어난 작품성뿐 아니라 멤버들 간 끈끈한 유대감으로도 유명한 극단이었다. ‘동인제’라는 시스템을 통해 모든 구성원이 극단 운영 책임을 나눠지고 수익도 나눠 가졌다. 그 안에서 쟁쟁한 연극인들과 함께 작품을 한다는 게 늘 행복하고 자랑스러웠다”고 밝혔다. 그 기쁨이 그가 40년 넘게 ‘자유’를 지키게 만드는 힘이 됐다.이 초대 대표가 현재의 ‘연극판’에서 고군분투하는 최 대표를 가리켜 ‘딱하다’고 말하긴 했지만, 사실 50년 전 ‘자유’가 창립했을 때부터, 아니 어쩌면 이 초대 대표가 대학 졸업기념 연극 무대에 서며 처음 ‘프로페셔널’ 연극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 194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이 땅에서 연극이 쉬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유복한 집안에서 나고 자란 이 초대 대표는 연극을 시작할 무렵부터 ‘양반 가문에 광대가 났다’며 반대하는 가족에게 시달렸다. 당시 대학 스승이던 정지용 시인이 그의 어려움을 알고 예명을 지어주기까지 했을 정도라고 한다. 이 초대 대표는 “당시 선생님이 ‘네가 문과(이화여대 영문학과)를 다녔으니 성은 ‘문’으로 하고 각설이처럼 설치고 다니니 이름은 ‘설이’로 하자’며 나를 ‘문설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문학도와 광대의 의미가 함께 담긴’ 이 이름이 마음에 들었던 듯, 이 초대 대표는 그 시절을 떠올리며 소녀처럼 웃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발발한 6·25전쟁은 이 초대 대표가 그 스승을 영영 다시 만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연극인을 꿈꾸던 그의 앞길도 가로막았다. 함께 극단을 하던 동료 중 일부가 폭격에 목숨을 잃고 나머지도 뿔뿔이 흩어진 것이다. 이 초대 대표는 이후 전쟁 중 만난 화가 고 권옥연 씨와 결혼해 함께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고, 그곳에서 조각과 의상 등을 배웠다. 이것이 그가 귀국 후 무대예술가로 연극계에 복귀하는 계기가 됐다.
‘자유’가 1991년 발간한 ‘창단 25주년 기념 자료집’에 따르면 이 초대 대표는 65년 봄 무렵부터 50년대 활동했던 극단의 재건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당시 프랑스 유학파 연출가로 주목받던 김 전 대표에게 자문을 구했다. 이 과정에서 뜻이 통한 두 사람이 ‘새로운 연극’을 목표로 결성한 것이 바로 ‘자유’다. 이 초대 대표는 의상, 무대 등 미술작업 전반을, 김 전 대표는 연출을 주로 맡았다. 이 초대 대표는 이에 대해 “우리는 처음부터 극단 내에서 하는 일이 달랐고, 성격도 정반대였다. 나는 호랑이인데 김 선생(김 전 대표)은 원숭이라, 내가 불같이 굴어도 늘 잘 받아줬다”고 했다. 두 사람 다 연극에 대해 끝없는 열정을 가진 점, 그리고 한국적 환경에 발을 딛고 ‘지금, 여기의 연극’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점 등도 ‘자유’가 쉽지 않은 환경에서 오랜 세월 작품을 이어올 수 있는 배경이 됐다. 두 전 대표를 ‘스승’으로 모시는 최 대표 역시 이 점에서 뜻을 같이한다. 그는 “1970년대 이후 우리나라의 영화, 방송 산업이 성장하면서 많은 연극인이 다른 장르로 눈을 돌리기도 했지만, 나는 그런 적이 없다. 연극 안에서도 다양한 시도와 실험을 할 수 있다고 여겼다”고 밝혔다. 그런 ‘자유로움’이 ‘자유’의 강점이기도 했다.
오늘의 우리 연극
소설가 최일남은 1984년 2월 ‘자유’의 연극 ‘바람 부는 날에도 꽃은 피네’(김정옥 연출, 이병복 무대)를 감상한 뒤 ‘경향신문’에 실은 연극평에 ‘극장 문을 들어서자마자 무대복 차림의 배우들 전원이 나와서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냥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과 같이 놀자고 덤빈다. 장기판이 있는가 하면 윷판과 엿판이 있고, 사주쟁이가 있고, 뺑뺑이 돌리기가 있다. 나도 뺑뺑이를 돌리고 있는 배우의 ‘꾐’에 홀려 두 번 다 꽝을 치고 아까운 돈 100원만 날리고 말았다’고 썼다. 기존 연극의 틀을 과감하게 깨뜨린 이런 실험은 ‘자유’의 트레이드 마크였고, ‘자유’의 작품이 해외에서도 큰 인기를 얻는 이유였다. ‘자유’의 연극은 1981년 ‘무엇이 될꼬 하니’가 해외 무대에 선 것을 시작으로 스페인, 프랑스, 네덜란드, 튀니지, 일본 등 세계 각국에서 6000회 이상 공연됐다. 그 중심에는 늘 새로운 작품을 쓰고, 연출하고, 남다른 의상과 무대 연출을 선보이는 세 사람이 있었다.이들의 바람은 앞으로도 ‘자유’가 ‘지금, 여기의 연극’, 달리 말하면 ‘오늘의 우리 연극’을 계속하는 것, 끝없는 도전과 실험을 통해 더 많은 관객과 호흡하는 것이다. 최 대표는 “경기 남양주에 이 선생님이 오랜 세월에 걸쳐 조성해온 공간이 있다. 조선 영조의 딸 화길옹주가 살던 ‘궁집’ 등 아름다운 고택들을 옮겨 짓고 정원과 연못, 석물 등으로 공간을 가꿔 그 자체가 아름다운 무대가 되는 곳이다. ‘무의자 박물관’이라고 이름 붙인 그곳을 배경 삼아 조만간 새로운 방식의 연극을 공연하려 한다”고 밝혔다. 이외에도 연극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다양한 시도를 할 계획이라고 한다. ‘더 실험적으로, 더 글로벌하게’가 최 대표가 밝힌 ‘자유’의 미래 계획이다. 그렇게 새로운 50년이 시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