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출을 받기 위해 서울 종로구의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서울중부센터 계단에 길게 줄 선 소상공인들. [뉴스1]
4월 8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소진공) 서울중부센터 앞. 한창훈 센터장이 ‘경영안정자금’ 사전예약 순번이 밀려 화를 내는 정모(54) 씨를 붙잡고 설명했다. 소진공 서울중부센터는 하루 평균 100여 건의 ‘소상공인진흥공단기금 경영안정자금’(코로나19 대출) 접수를 처리하고 있다. 방문자의 대기시간을 줄이고자 온라인에서 40여 건, 현장에서 50여 건의 사전예약을 받는다. 하지만 대출 받으려고 이곳을 찾는 소상공인은 하루 평균 200여 명. 매일 100명 이상이 정씨처럼 헛걸음을 하는 셈이다.
서울 종로4가에서 18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정씨의 옷 가게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사실상 개점 휴업 상태다. 정씨는 월세 낼 돈이라도 마련하고자 가게 문을 걸어 잠그고 소진공을 찾았으나, “새벽 5시부터 줄 선 사람들로 당일 예약이 마감됐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면 나도 새벽 5시에 오면 되느냐”고 물은 정씨는 급기야 “복도에 텐트 치고 앉아 밤새우라는 소리냐”며 소리를 질렀다. 30여 분간에 걸친 소란은 결국 경찰이 출동하고서야 끝났다.
하루 방문자 200명 중 100명이 ‘헛탕’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인해 손님이 줄어 한산한 한 지하상가. [뉴시스]
3월 25일 첫 시행되고 일주일 후인 4월 1일까지 3300명 넘는 소상공인에게 대출이 이뤄졌을 정도로 수요가 폭발적이다. 하지만 코로나19 확산과 그에 따른 사회적 거리두기가 좀처럼 완화되지 않으면서 지금도 여전히 각 센터는 대출 받으려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새벽부터 줄 선 소상공인에게 예약 번호표를 배부하기 위해 소진공 서울중부센터 직원들은 매일 2명씩 교대로 아침 6시 30분에 출근하고 있다.
이곳을 찾은 소상공인들은 “1000만 원으로 죽어가는 가게를 되살릴 순 없어도 당장 생활은 이어갈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정씨도 그러한 마음이다. 그의 약 19.8㎡(6평)짜리 가게의 연매출은 9000만 원. 월세와 도매대금을 빼고 매년 3000만 원의 수익이 났다. 올해부터 새로운 마음으로 장사에 임하고자 지난 연말 200만 원을 들여 새 나무판자를 덧대고 벽을 트는 등 수리도 했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가 터지자 올해 2월과 3월 매출이 월 50만 원으로 뚝 떨어졌다. 월 임차료와 관리비로만 110만 원이 나가기 때문에 적자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일주일간 손님이 한 명도 없는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즘 같은 때 가게 문을 닫으면 ‘확진자가 다녀갔다’는 소문이 돌아요. 그러니 휴업도 못 합니다. 그렇다고 아예 가게를 정리할 수도 없어요. 오십 넘은 나이에 어디 가서 돈을 벌겠습니까.”
혼자 사는 정씨의 유일한 걱정은 4년째 요양병원에서 지내는 80대 노모. 그는 “일주일에 세 번 어머니를 뵈러 간다. 병원비는 계속 드는데 장사는 안 되고…”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매달 나가는 200만 원 남짓한 요양병원비는 정씨 형제에게 큰 부담이다. 따로 장사하다가 올해부터 법인택시 기사로 일하는 그의 형도 요즘 승객이 부쩍 줄어 하루에 12~14시간을 일해도 월수입이 200만 원에 그친다고 한다.
“1000만 원을 대출 받으면 석 달은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경찰까지 부르고…. 다시는 안 가렵니다. 주변 상인들과 3000만 원짜리 계를 하고 있어요. 내 순서를 당겨달라고 해서 당장 쓸 돈을 마련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곗돈 미리 타고, 신용카드 돌려막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의 여파로 한산한 한 재래시장. [뉴스1]
“저, 사실 금리가 23.8%나 되는 신용카드 현금서비스를 쓰고 있어요.”
같은 날 소진공 서울중부센터를 방문한 공모(60) 씨의 말이다. 그는 서울 중랑구 면목시장에서 속옷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그동안 공씨는 신용카드 현금서비스를 받아 도매대금을 치르고, 장사해 번 돈으로 이를 갚곤 했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가 터진 후 장사가 안 돼 현금서비스를 다른 신용카드 현금서비스로 돌려막고 있다. 공씨는 “신용카드 4개를 돌려써왔지만, 이제 내 카드만으로는 감당이 안 돼 아내 카드를 사용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는 “대출 받으려면 새벽 5시까지 와야 할 것 같은데, 이게 말이 되느냐. 이 동네 상인만 받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서울 인사동에서 전통공방을 운영하는 김모(57) 씨 역시 대출을 받지 못해 기분이 안 좋기는 마찬가지. 그는 “1000만 원을 대출 받아 한 달치 월세를 내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다”며 “그런데도 새벽 4시에 와야 겨우 접수할 수 있다고 하니 짜증이 난다”고 했다. 약 50㎡(15평) 규모인 그의 가게는 월세가 1000만 원이지만, 코로나19 사태로 건물주가 650만 원으로 깎아줬다고 한다. 주요 고객층인 외국인 관광객이 뚝 끊겨 3000만 원이던 월 매출이 600만 원 수준으로 대폭 줄어든 사정을 감안해준 것이다. 김씨는 “인건비도 건지지 못해 직원 3명의 근무시간을 절반으로 줄였다. 대출 받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을 더 찾아봐야겠다”며 발걸음을 돌렸다.
“모두가 어렵다. 폭언 삼갔으면”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서울중부센터 사무실 벽면에 붙은 폭언금지 알림(왼쪽)과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노동조합에서 방문객을 대상으로 게시한 호소문 [최진렬 기자]
소진공 센터를 ‘풀가동’해도 대출을 받지 못하고 되돌아가는 소상공인이 하루 100명이 넘다 보니 이들이 표출한 분노는 센터 사무실 곳곳에 흔적으로 남아 있다.
‘제발 부탁드리는데 처음 도입되는 지원 정책 과정에서 불편한 점이 생기더라도 폭언과 욕설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일이 힘든 건 버텨나갈 수 있지만 폭언과 욕설, 성희롱은 저희를 더욱 힘들고 지치게 하고 있습니다.’
서울중부센터 벽에 소진공노동조합 명의로 부착된 호소문의 일부다. 이 밖에도 센터 곳곳에는 ‘폭언·욕설 금지 폐쇄회로(CC)TV 녹화 중’ ‘관할 지구대 협조 중’이라고 적은 종이가 붙어 있었다. 김종하 소진공노조위원장은 “직원이 소상공인의 욕설과 폭언에 시달려 울면서 사무실을 뛰쳐나간 경우도 있었다. 여성 직원을 상대로 성적 비하 발언을 하는 방문객도 있다. 모두가 어려운 시절을 보내는 만큼 서로 위로해줬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한 센터장은 “소상공인의 사정이 안타까워 직원들이 밤낮으로 애쓰고 있지만, 한계에 다다랐다. 한시적이라도 인력을 충원하는 방안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최진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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