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체스터 시티의 홈 경기장인 에티하드 스타디움이 텅 비어 있다. [맨체스터 시티 홈페이지]
리버풀의 우승은 사실 떼놓은 당상이다. 리버풀은 올 시즌 29경기에서 승점 82점을 쌓았다. 딱 한 번씩 비기고 진 것 말고는 27경기에서 승리했다. 2위 맨체스터 시티(맨시티)와 승점 차가 25점이니 ‘추격 불가’라는 말도 무리는 아니다. 맨시티가 남은 상대를 모두 꺾는다 해도 리버풀이 잔여 9경기에서 2경기만 이기면 뒤집기가 불가능하다. 하물며 승률 93%에 달하는 리버풀이 이 밥상을 뒤엎을까도 싶다. 2014년 스티븐 제라드(현 레인저스 FC)가 미끄러져 허탈하게 실점, 눈앞에서 우승컵을 걷어찼을 때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다.
중도 우승이라는 말도 안 되는 상황
UEFA 챔피언스리그 중단을 발표하는 테오도르 테오도리디스 UEFA 사무총장(왼쪽)과 알렉산데르 체페린 회장. [뉴시스]
다만 마침표를 못 찍은 리그에서 우승을 인정해주자? 이것도 말이 안 된다. 만에 하나 ‘사실상 우승’이라고 메달을 수여한들, 그 찜찜함은 우리 모두의 몫 아닌가. 희박한 확률 속 극한 도전을 가치로 삼는 스포츠의 본질을 스스로 저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리버풀이 30년 만에 정규리그 정상 탈환, 그리고 1992년 EPL 출범 이래 처음으로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드라마틱한 행보를 완성하려면 어떻게든 잔여 일정을 마무리해야 한다. 위르겐 클로프 감독이나 선수단 역시 반박 여지를 남겨둔 우승은 달갑지 않을 테다.
물론 재개 가능성을 논하기는 쉽지 않다. 리버풀로서도 지켜보는 것 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다는 얘기다. 코로나19는 유럽을 집어삼켰다.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등을 사지로 내몰았고 영국까지 위협하고 있다. 4월 13일 기준 코로나19로 인한 영국의 하루 신규 사망자는 700명을 넘어섰다. 유럽 최다 수치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물론, EPL 현역 감독과 선수들까지 병마로 고생한 형국. 리버풀 에이스 사디오 마네는 최근 인터뷰에서 “나도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고 싶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우승하지 못해도 인생의 일부로 받아들일 것”이라며 사태의 심각성을 환기했다.
사실 리버풀만 할 말이 많은 건 아니다. 마음 졸이며 상황을 주시하는 팀은 더 있다. 당초 예정된 5월 마무리가 아닌, 사상 첫 ‘여름 EPL’ 당위를 거론하는 건 최종 순위에 달린 결과물이 막대하기 때문. 이렇게 덮어두기엔 억울함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을 듯하다. 떨어지는 페이스를 걱정하며 한숨 돌린 이가 있는 반면, 반대로 맹렬한 기세에 역전을 자신한 이도 꽤 된다. 특히 올해처럼 오밀조밀한 구도가 형성되면 장밋빛 미래부터 그리는 게 인지상정이다. 제대로 훈련하지 못한 선수들의 상태를 우려하는 시선도 존재하나, 주어진 조건은 동일하니까.
늘 그랬듯 EPL에서 빼놓을 수 없는 화두가 톱 4다. 다음 시즌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을 따낼 상위 4개 팀이 그 대상이다. 더욱이 FFP(Financial Fair Play·재정적 페어플레이의 줄임말로, 무분별한 지출을 막고자 수입 대비 선수 영입에 쓸 수 있는 상한액을 설정한 제도)를 어긴 2위 맨시티가 UEFA로부터 챔피언스리그 참가 자격을 박탈당한 상태다. 이 경우 기회가 돌아갈 차순위 팀도 눈에 불을 켜고 덤빌 것은 당연하다.
애매해진 챔피언스리그 진출권
손흥민 소속팀 토트넘 홋스퍼는 챔피언스리그 진출 가능권이었으나 코로나19로 일정이 미뤄져 진출이 불확실한 상태다. [뉴시스]
현 시점 EPL은 2위 맨시티, 3위 레스터 시티 양상이다. 더더욱 숨 막히는 경쟁은 바로 아래쪽이다. 4위 첼시 FC부터 9위 아스널 FC까지 총 6개 팀이 승점 8점 안에 몰려 있다. 진출권이 누구에게 돌아가도 이상할 게 하나 없다. 손흥민이 속한 토트넘 홋스퍼는 8위다. 순위가 썩 좋진 않지만, 주전들이 부상에 허덕이며 최근 6경기 연속 무승 수렁에 빠졌던 때와는 다르다. 현지 매체도 “해리 케인, 손흥민 등이 복귀한 토트넘이라면 챔피언스리그권 진입이 충분하다”고 평가했다. 6위 울버햄프턴 원더러스, 7위 셰필드 유나이티드 또한 ‘우리가 언제 또 챔피언스리그를 놓고 경쟁해보겠나. 그게 안 되면 그 아래 유로파리그라도 가보자’는 속내다. “이대로 리그를 끝내자”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이는 거의 없어 보인다.
위쪽 공기를 마시는 팀들만 그런 것도 아니다. 생존 싸움을 벌이는 하위권은 또 어떨까. 15위 브라이턴 앤드 호브 앨비언과 20위 노리치 시티의 승점 차이가 8점이다. 현 제도하에서는 총 3개 팀이 다음 시즌 2부 리그 잉글리시챔피언십으로 강등된다. 이는 중계권료 포함, 수입 폭락으로 판을 처음부터 새롭게 짜야 한다는 의미다. 누구든 떨어질 수 있는 마당에 현 순위로 강등권 멍에를 쓰자니 환장할 노릇이다. 반대로 이 자리로 치고 올라올 2부 리그 팀들의 입장도 들어봐야 한다. 그 밖에 규모가 열악해 회복 불능에 접어들 팀들 역시 간과할 수 없다. 마이크 갈릭 번리 FC 회장은 이번 시즌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할 경우를 전제해 “8월 무렵 우리 팀 재정은 바닥을 드러낼 것”이라고 밝혔다.
리그 중단하면 대부분 팀 재정 위기
EPL 사무국은 정부와 리그 재개 시기를 조율하고 있다. 독일 쪽은 최근 팀 훈련을 시작했는데, 이런 움직임을 보면서 서서히 따라갈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개인 훈련, 소그룹 훈련을 거쳐 팀 전체가 모이는 식으로 점차 확대해갈 전망이다. 물론 구단별 시즌권 환불의 낌새도 있다고 한다. 코로나19가 진정세를 보인다는 가정 아래 6월 초쯤 다시 리그를 시작한다 해도 일단은 무관중 쪽으로 가닥을 잡는 모양새다. 현재 하루에도 수백 명씩 목숨을 잃는 상황인데, 당장 몇 주 뒤 수만 관중이 운집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다.참 어려운 문제다. 생명을 최우선 가치로 삼아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조금씩 사그라질 때를 기대하며 조심스레 재개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이가 적잖다. 단순히 돈 문제를 넘어 9개월에 달한 스토리의 남은 페이지를 마저 채우고 싶은 열망이다. 정규리그 최다 우승에 빛났으나 30년간 무관에 그친 리버풀뿐 아니라 쉬이 오지 않을 챔피언스리그행 기회, 구단 명운을 놓고 벌이는 1부 리그 잔류 혈투 등 이번 EPL은 걸린 것이 정말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