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런스 데이비스 감독은 영국의 숨어 있는 보석이다. 영국 영화의 두 거장, 곧 정치적 리얼리즘의 켄 로치, 가족 멜로드라마의 마이크 리와 비교하면 우리에겐 무명에 가깝다. 올해 72세인 이 노장은 43세 때 첫 장편 ‘먼 목소리, 조용한 삶’(1988)을 발표하며 단숨에 영화계의 주목을 받았다. 영국 리버풀에 사는 노동자 가족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영국의 일상을 되살렸는데, 그건 사진에 기초한 현실의 기록이기보다 회화로 표현한 꿈의 기억에 가까웠다. 깨어나고 싶지 않은 나른한 꿈, 이는 데이비스의 미학을 설명할 때 종종 동원되는 수사다.
데이비스의 신작 ‘조용한 열정’은 19세기 미국 시인 에밀리 디킨슨의 전기 영화다. 디킨슨은 생전에 무명이었지만 20세기 중반 이후 페미니즘의 확산과 더불어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그는 영국 빅토리아 시대 가부장 중심의 억압적인 문화에 맞서던 여성 작가, 특히 조지 엘리엇(작가생활을 위해 이름을 남성으로 바꿨다), ‘폭풍의 언덕’ 에밀리 브론테 등과 강한 연대의식을 갖고 있었다. 말하자면 디킨슨은 당대의 급진적 지식인인 셈이지만, 실제 그의 삶은 병든 모친을 대신해 대가족의 일상을 꾸리는 평범한 가사노동자의 그것이었다.
‘조용한 열정’의 강점은 연애나 액션이 없는 주인공의 ‘평범한’ 서사를 영화적으로 표현해냈다는 것이다. 이런 지적인 영화를 만드는 데는 데이비스가 단연 독보적이다.
디킨슨이 삶의 전환점을 맞는 것은 미국 남북전쟁 이후다. 노예제 폐지를 위한 전쟁이 수십만 명의 희생자를 낸 채 끝났을 때 디킨슨은 ‘여성은 여전히 노예’에 머물러 있는 현실의 엄정함을 더 크게 느낀다. 그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오빠(변호사)마저 여성의 처지를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디킨슨은 겉으로 보기에는 지극히 ‘조용’하지만, 가슴속엔 불같은 ‘열정’이 들끓는 인물로 변해간다.
그 표현을 데이비스는 잔잔한 물결이 이는 맑은 호수를 그리듯 하고 있다. 언뜻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 같지만 사실 수많은 물결이 계속 일고 있는 넓은 호수의 표면 같다. 이를테면 신학교를 자퇴하고 가족에게 돌아온 디킨슨이 온 가족이 응접실의 촛불 아래서 각자 책을 읽는 모습을 보며 조용히 눈물짓는 장면 같은 것이다. 이는 데이비스 특유의 느린 카메라 이동(panning)으로 표현되는데 ‘되찾은 일상’의 기쁨을 이렇게 무심한 듯, 사실은 뜨거운 감정으로 표현하는 재능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전율을 느끼게 할 정도다.
영화 제목 ‘조용한 열정’은 디킨슨의 삶에 대한 정의인 동시에 데이비스 특유의 표현법에 대한 미학적 정의 같다. 어느덧 데이비스는 사유를 표현하는 능력에선 영화사에 남은 칼 드레위에르(드레이어), 로베르 브레송 등의 거장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