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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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우울증 환자, 정치 떠납니다”

제프 갤럽 전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주 총리 은퇴 선언 … ‘용감한 선택’ 격려와 찬사 쏟아져

  • 시드니=윤필립 통신원 phillipsyd@naver.com

    입력2006-02-15 16: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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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우울증 환자, 정치 떠납니다”

    제프 갤럽 전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주 총리.

    감기처럼 쉽게 걸릴 수 있다고 해서 ‘마음의 감기’라고 불리는 우울증. 자칫 정신질환으로 오해받기 쉬운 우울증 때문에 고뇌하던 호주의 한 정치인이 과감한 ‘커밍아웃’을 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해 화제다. 1월17일 자신의 병을 밝히고 전격 사임한 제프 갤럽(51) 전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주 총리가 그 주인공. 학자 출신으로 성공가도를 달리던 그는 전문적인 우울증 치료를 받기 위해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갤럽의 ‘용감한 선택’에 대해 호주 사람들의 격려와 찬사가 뜨겁다. 특히 정신과 전문의들의 격찬이 이어지고 있다. 시드니의대 이안 학기스 교수는 “호주인 여섯 명 중 한 명이 우울증 증세에 시달리고 있지만 대개 쉬쉬하는 형편”이라며 “갤럽의 결단은 우울증 환자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평가했다.

    갤럽 전 총리는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와 절친한 친구 사이이기도 하다. 학창시절 호주에서 최고의 영예로 인정받는 로드스 장학생(The Rhodes scholar)으로 선발돼 옥스퍼드대학에서 유학하며 블레어 총리와 함께 공부한 인연이 있다. 지난 연말 그는 런던으로 휴가를 떠나 블레어 총리의 사저에 머물며 블레어 총리와 자신의 장래 문제를 상의했다고 한다.

    英 블레어 총리와 절친한 사이

    호주 유력지 ‘시드니모닝헤럴드’는 사설을 통해 “우울증을 부정하고 숨길 것이 아니라 전문적인 치료를 통해서 극복해야 할 병이라는 것을 국민에게 인식시켜 주었다”고 평가하면서 갤럽 전 총리의 솔직함과 용기에 박수를 보냈다. 사설은 이어서 “많은 정치인들은 정신과 치료를 받는 것이 유권자나 동료 정치인에게 자신의 약점을 내보이는 것으로 생각해 과도한 음주나 약물과다 복용 등에 의존하며 현실을 회피하고 있는데, 이는 국민과 자신을 속이는 잘못된 행위다. 갤럽은 그들에게 정치인의 정직함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고 격찬했다.



    ‘시드니모닝헤럴드’의 지적대로 호주 정치인 중에는 우울증을 앓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그 사례를 열거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다. 1997년 닉 쉐리 상원의원은 자살을 기도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고, 이안 버틀러 민주당 전 당수는 상원회의 중에 한 여성 의원에게 폭언을 퍼붓는 불상사를 일으킨 바 있다. 둘 다 우울증 때문이었다. 그레그 윌튼 의원은 2000년에 나타난 우울증 중증 증세에 이어 2003년엔 알코올의존증 문제로 최악의 시기를 보냈다. 2005년 존 브록든 뉴사우스웨일스 주 야당 당수의 자살 기도 역시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제프 케넷 전 빅토리아 주 총리는 정계 은퇴 후 우울증으로 자살 직전까지 갔다가 지금은 우울증 환자를 위한 단체인 ‘우울증을 넘어서(Beyond Blue)’의 회장을 맡고 있다.

    “난 우울증 환자, 정치 떠납니다”

    호주 의회의 격렬한 토론 문화는 정치인들에게 우울증을 가져다주는 원인이기도 하다. 연방국회의사당 전경.

    ‘우울증 정치인’들의 면면을 살피다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 모두 한 시절을 풍미한 ‘스타 정치인’이었다는 점이다. 닉 쉐리 상원의원의 별명은 ‘노동당의 떠오른 별’이었고, 존 브록든 전 당수는 ‘자유당의 30대 기수’였다. 제프 케넷 전 총리는 노동당의 텃밭인 빅토리아에서 자유당 집권의 신화를 이룩한 데 이어 최장기 집권기록까지 세웠다.

    내각책임제를 채택하고 있는 호주 의회는 거의 연중무휴로 열리다시피 한다. 게다가 여야가 마주 앉아 격론을 벌이기 때문에 연방의사당은 ‘호주에서 가장 시끄러운 동네’라고 불린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TV 채널을 돌리다 유난히 소란스런 방송이 나오면 그것은 십중팔구 공영방송 ABC-TV가 생중계하는 의사당 토론 장면이다. 그뿐 아니다. ‘호주에서 사용되는 가장 저급한 언어를 듣고 싶으면 의사당으로 가라’는 우스개가 있을 정도로 토론은 격렬하게 진행된다. 이런 까닭에 한 초등학교 교장은 “초등학생에게 의회의 회의 장면을 보여주지 말자”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의사당 국정토론은 의원들이 정치생명의 사활을 거는 생존경쟁의 현장이다. 진지한 국정토론이 주를 이루지만 가끔씩 이전투구의 양상을 보인다. 반대 당 정책의 사각(死角)을 공격해서 최선의 결과를 도출하는 게 상례지만 그게 여의치 않으면 반대 당의 정책을 폄하하거나 의원에게 모욕을 주는 행위도 서슴지 않는다.

    그 결과 국민의 정치 혐오를 불러오는 경우도 있지만 ‘심심한 천국’인 호주에 볼거리를 제공한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바로 그런 평가를 노리는 정치인들이 끊임없이 가십거리를 제공하면서 유권자의 관심을 끌어 모으는 것이다.

    이 같은 호주 의사당에서 가장 크게 상처 받는 이들은 대부분 엘리트 의식이 강한 의원들이다. 우울증, 약물중독, 알코올의존증에 걸리는 의원들 대부분이 이 범주에 속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호주 제1야당인 노동당 소속 닉 쉐리 연방 상원의원의 경우.

    우울증 앓는 정치인 부지기수

    “지금 내 이름은 진흙투성이다. 나의 모든 것이 파괴돼버린 지금 죽음밖에는 선택할 것이 없다. 나는 바보 같은 짓을 했고 나의 어리석음을 사과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인들과 그의 가족들에게 관용을 베풀어주기 바란다. 그들 대부분은 진실하고 헌신적이며 열심히 일하고 있다.”

    이 글은 쉐리 의원이 ‘마지막 보도자료’라는 제목으로 남긴 유서 내용의 일부다. 그는 97년 10월2일 새벽, 호주통신(AAP) 의사당지국 앞으로 장문의 유서를 발송한 뒤 손목의 동맥을 끊어 자살을 기도했다가 절명 직전에 구출됐다. 당시 쉐리 의원은 41세의 젊은 나이에 야당 부대표를 맡을 정도로 장래가 촉망되는 호주 정가의 차세대 주자였다. 그가 태즈메이니아 주의 상원의원으로 당선된 뒤 그의 이름 앞에는 늘 ‘떠오르는 별’이라는 수식어가 붙어다녔다.

    그가 자살을 기도한 이유는 단 한 가지. 320호주달러, 한국 돈으로 24만원 정도의 여행경비를 잘못 계상해 집권당 코스텔로 재무상한테서 조롱에 가까운 공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코스텔로 재무상은 그의 여행경비 신청이 실수가 아니고 고의성이 다분했다고 몰아붙였다. 호주의 정치 풍토에서 이런 사안이 발생하면 해당 의원은 정치적으로 치명타를 입게 마련이다.

    호주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자살을 기도하는 경우는 비단 정치인에 국한되지 않는다. 1월3일, 아름다운 크로눌라 해변이 내려다보이는 바닷가 아파트에서 한 중년 남자가 자살했다. 호주 럭비 국가대표선수 출신의 스티브 로저스(51)라는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럭비클럽의 매니저로 일하면서 바닷가 아파트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았지만 우울증이라는 덫에 걸리고 말았다.

    이안 힉기스 교수는 “호주는 고립된 섬 대륙인 데다 역사적으로 죄수 잔혹사가 있었던 나라여서 이러한 현상이 많이 발생한다. 호주 청소년의 자살률이 스웨덴과 더불어 1~2위를 다투는 이유는 우울증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서 “우울증은 전문의 상담과 진료, 약물치료 등으로 치유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스트레스를 덜 받는 생활태도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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