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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철 교수의 5분 한국사

“백성은 군주의 하늘 … 열어서 어진 이들을 들어오게 하라”

역사의 증인 복원된 광화문 광복절에 개방 … 정도전의 큰 뜻 되새겨야

  • 이영철 목원대 겸임교수 hanguksaok@hanmail.net

“백성은 군주의 하늘 … 열어서 어진 이들을 들어오게 하라”

“백성은 군주의 하늘 …  열어서 어진 이들을 들어오게 하라”

7월 28일 오후, 복원 공사를 위해 바깥 부분에 둘러쌌던 가설 덧집이 제거되면서 제 모습을 드러낸 광화문이 홍예문, 근정문을 뒤로하고 위용을 뽐내고 있다.

고려 말 우왕 원년(1375) 북원(北元, 원 멸망 후 북쪽 사막으로 이동)의 사신이 고려에 왔을 때 권신 이인임(李仁任)은 성균박사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을 영접사로 보내려 했다. 당시 고려는 신흥 왕조인 명(明)과 북원에 모두 사신을 보내 양면외교를 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친명파 정도전은 “내가 사신의 목을 베어오거나 체포해 명나라에 보내겠다”라고 외교상 결례를 해 전라도 나주군 회진현 거평 부곡으로 3년간 귀양을 갔다. 그 후 정도전은 복직되지 못하고 전국 각지를 떠돌며 곤궁하게 살았는데, 유배 직후 쓴 ‘가난(家難)’이라는 글에서 그의 고난을 엿볼 수 있다. 이때 정도전은 “자고로 한 번 죽는 것이니 구차하게 살지 않겠다”라고 다짐했다.

정도전과 이성계 역성혁명 청사진 마련

이렇게 9년간 야인생활을 하다 우왕 9년(1383) 41세의 정도전은 왜구를 치기 위해 동북면도지휘사로 함경도 함주 막사에 있는 48세의 이성계(李成桂, 1335~1408)를 찾아갔다가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정도전과 이성계의 결탁으로, 신유학인 성리학으로 무장한 신진 사대부의 붓과 당대 최고의 군사전략가인 신흥무장의 칼이 만나 역성혁명(易姓革命)의 청사진이 마련됐다. 우왕 14년(1388) 위화도회군 이후 왕조 교체의 정지작업은 빠른 속도로 전개돼 우왕과 창왕을 신돈(辛旽)의 혈통이라 하여 제거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폐가입진론(廢假立眞論), 권문세족의 토지를 몰수해 신진사대부에게 분배하는 사전개혁(私田改革)의 과전법(科田法)으로 이어졌다.

마침내 1392년 7월 17일 이성계가 개성 수창궁에서 즉위해 조선 왕조가 개창됐다. 조선 국호는 단군과 기자의 고조선을 계승한 것인데, 단군조선에서는 역사의 유구성과 천손 후예의 자부심을, 기자조선에서는 8조 금법을 제정한 도덕 문명의 뿌리를 강조했다. 정도전 개인으로서는 이성계를 찾아간 지 만 9년 만의 일이었다. 조선 개국에 즈음해 정도전이 취중에 “한고조가 장자방을 쓴 게 아니라 장자방이 한고조를 쓴 것”이라고 자부한 것이 실현된 것이었다. 새 왕조를 연 이성계의 가장 시급한 첫 번째 과업은 ‘천도(遷都)’였다.

논란 끝에 태조 3년(1394) 8월 새 도읍지로 한양이 결정됐다. 경복궁 자리는 정도전이 잡았지만 그는 풍수(風水)를 잘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 무학(無學) 대사는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궁궐을 세워야 한다고 했으나 정도전은 반대했다. 그는 무학대사가 추천한 곳은 동향이며 터가 너무 좁아 왕도로 적당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결국 정도전의 뜻대로 경복궁이 현재의 자리에 세워졌다. 태조 4년(1395) 9월 종묘와 사직 등이 정비되고 법궁(法宮)으로 경복궁이 완성됐다.



이 모든 과정에 조선 왕조의 설계자이자 신도시 한양의 기획자인 정도전이 관여했다. 그 후 이성계는 여러 신하를 새 궁궐로 불러 주연을 베풀었는데, 술 3순배가 돈 다음 정도전에게 “이제 도읍을 정하고 종묘를 들였으며 새 궁궐마저 준공되었기에 술잔치를 베푼 터라 그대는 마땅히 궁궐의 이름을 빨리 지어서 나라와 더불어 영원히 쉬게 하라” 했다. 이에 정도전은 삼가 머리를 조아리며 ‘시경(詩經)’ 주아(周雅) 편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덕에 배부르니 군자 만년 그대의 경복(景福·큰 복)을 도우리라(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라는 자구를 외며 청하여 새 궁궐의 이름을 ‘경복’이라 했다.

이어 정도전은 경복궁 정문이자 남쪽 문인 오문(午門·광화문)을 가리켜 태조께 아뢰기를 “닫아서 간사스러운 백성을 막고, 열어서 사방의 어진 이들을 들어오게 함은 모든 바른 것 중에서도 큰 것입니다”라고 했다. 사실 광화문(光化門)이란 명칭은 세종 8년(1426) 10월 세종이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옮기고, 경북궁 담 둘레 동서남북에 있는 문이 아직 이름이 없음을 알고 집현전(集賢殿)에 명해 여러 문 이름과 다리 이름을 짓게 해 생겨난 것이다. 광화(光化)는 ‘왕의 큰 뜻이 온 나라를 비춘다’라는 의미다.

600년간 영욕의 현장 말없이 지켜봐

“백성은 군주의 하늘 …  열어서 어진 이들을 들어오게 하라”

(왼쪽)삼봉(三峰) 정도전 (오른쪽)1890년 무렵 경복궁의 남쪽 정문인 광화문과 육조 거리. 복원 공사 전 광화문은 6·25전쟁 때 포격으로 문루가 파괴된 것을 철근 콘크리트로 복원한 것으로 원래의 위치보다 14.5m 북쪽으로 옮겨졌으며 원래 방향보다 동쪽으로 약간 뒤틀어져 있었다.

조선 왕조가 개창된 뒤 이성계가 밤에 여러 공신과 만취해 정도전에게 “내가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은 그대의 힘이라” 하니 정도전이 대답하되, 지난날 보주(甫州) 감옥에 갇혔던 기억을 더듬어 “전하께서는 말에서 떨어진 때를 잊지 마시고, 신도 목이 얽혔을 때를 잊지 아니하면 자손만대에 이를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후 이성계의 뜻에 따라 강비(康妃·신덕왕후 강씨)의 아들 방석(芳碩)을 세자로 책봉하고 국왕이 아닌 재상이 중심이 되는 입헌군주제를 꿈꿨다. 그는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쓰면서 왕에 대해 정의하기를 ‘왕이란 뛰어난 재상을 선택하는 권리만 가진 존재’라고 했다. 바로 이러한 재상중심체제와 세자 책봉문제 탓에 정도전은 “이씨가 세운 나라를 정씨가 말아먹는다”라며 절치부심 비수를 간 이방원(李芳遠, 1367~1422) 등의 종친세력에 의해 1차 왕자의 난인 무인정사(戊寅靖社, 1398) 때 목이 베였다. 그리고 조선 왕조의 설계자인 정도전은 역적으로 몰려 무덤조차 없는 인간이 되고 말았다.

‘군자만년 큰 복의 도움을 얻으리라’는 명칭과 달리 골육상쟁의 1, 2차 왕자의 난 현장이 된 경복궁은 선조 25년(1592) 4월 발발한 임진왜란 때 국왕이 도성을 버리고 몽진길에 오르자 왜군이 한양을 점령하기 전인 4월 30일 분노한 하층 백성이 지른 불에 전소되고 말았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경북궁 터에 273년 만인 고종 2년(1865) 4월 “남문을 열고 파루(罷漏)를 치니 계명산천(鷄鳴山川)이 밝아온다”라는 ‘경복궁 타령’이 울려 퍼지면서 대역사(大役事)가 시작됐다. 흥선대원군은 세도정치로 실추된 왕실의 위엄을 확립하고 전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경복궁을 중건했다. 이때 한양의 설계자인 정도전의 공을 인정해 고종 7년(1870) 문헌(文憲)이라는 시호를 내림으로써 472년 만에 복권이 이루어졌다.

경복궁이 중건됐으나 흥선대원군과 민비의 갈등,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광화문의 역사는 순탄치 못했다. 국모가 시해될 때 일본 자객들이 그곳을 통해 들어왔고, 일제 식민지 시기에는 조선총독부 건물 완공과 때를 같이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그 자리는 ‘총독부 광장’이라 불리며 각종 옥외 행사를 거행하는 곳으로 쓰였다. 미 군정기에도 광화문은 원래 자리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때는 총독부 광장이 ‘군정청 광장’이라 불렸는데 그곳에서 1945년 10월 연합군 환영회가 개최됐고 그 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 기념식도 열렸다. 그러나 6·25전쟁을 겪으면서 목조건물이었던 광화문은 불타버리고 제3공화국 시기에 철근 콘크리트로 새로 만들어졌다. 그야말로 광화문은 영욕의 역사를 한 몸에 담고 있다.

한일강제병합 100년을 맞는 올해 8월 15일 광복절에 3년간의 복원 공사를 마무리하고 흥선대원군이 중건했을 당시의 모습대로 화강암 석축, 2층 목조 누각, 오색단청 등을 갖춘 광화문이 공개됐다. 광화문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지난 600년 동안 우리 역사의 중심에 있으며 역사를 지켜온 역사의 증인이다.

오는 11월 개최되는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에 참석하는 세계 각국 정상이 광화문 광장을 걸으며 광화문을 통해 경복궁 근정전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대저 군주는 국가에 의존하고 국가는 백성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백성은 국가의 근본인 동시에 군주의 하늘이다”라는 정도전의 목소리를 되새겨본다.



주간동아 2010.08.16 750호 (p80~81)

이영철 목원대 겸임교수 hanguksao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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