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35

2010.05.03

세상 바꾸려는 사내들의 한판 승부

이준익 감독의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 심영섭 영화평론가·대구사이버대 교수 chinablue9@hanmail.net

    입력2010-05-03 11: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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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 바꾸려는 사내들의 한판 승부
    칼은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 ‘메스’라 불리는 수술용 칼은 인간에게 생명을 주지만, ‘검’과 ‘도’라 불리는 칼은 목숨을 빼앗는다. 여기, 그 칼로 세상을 바꾸려는 사내들이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두 사람이 꿈꾸는 칼의 노래는 합창이 아니라, 그 방향조차 반대로 허공을 가르는 악연의 한판승부다.

    이준익 감독의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영화 형식을 이야기하지 않고는 그 내용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이다. 영화는 첫 장면부터 이몽학 역의 차승원을 빅 클로즈업으로 잡아낸다.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우는 저 장면. 어디서 봤을까? 바로 ‘석양의 무법자’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잡는 세르지오 레오네의 연출이다. 반면 황정민이 분한 맹인 검객 황정학과 그의 제자 견자가 싸울 때 카메라는 두 사람을 나란히 한 화면에, 그것도 멀찍이서 지켜보는 롱샷을 견지한다. 이러한 형식적인 대비는 이몽학이 꾸는 꿈과 황정학이 꾸는 꿈이 ‘세상을 바꾼다’는 대의명분에도 불구하고 방법적인 면에서 어떻게 천양지차인지 웅변적으로 설명해준다.

    이몽학은 이름에 ‘몽’자가 들어 있는 상징성에서도 알 수 있듯 꿈으로 살아가는 이다. 그를 사랑하는 기생 백지는 복수를 꿈꾸는 견자에게 (몽학은 견자의 아비와 형제를 죽였다) 매몰차게 내뱉는다. “넌 그 사람한테 안 돼. 넌 꿈이 없잖아.” 그러나 몽학이 꾸는 꿈은 대의를 등에 업은 사적인 욕망의 추동력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게 없다. 즉, 그는 관계성을 갖지 못한 자다. ‘석양의 무법자’에서 ‘돈’이란 실질적 욕망 외에는 별다른 대의가 없었던 나쁜 놈 ‘the bad’에 해당한다. 그러니 그가 단독으로 카메라에 잡힐밖에.

    이몽학이 짐승의 그것 같은 송곳니를 드러내며 검을 쥘 때, 포효하는 육식동물의 본성은 유감없이 발휘된다. 그러나 황정학은 끝내 관계성을 포기하지 못한다. 그는 이 영화에서 오히려 가장 잘 보는 자, 슬픔을 아는 자, 스승이 될 만한 자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 눙치지만, 정학은 슬픔을 아는 사내다. 이런 황정학을 잡을 때, 이몽학과 달리 카메라는 뒤로 물러서는 쪽을 택한다.

    사실 이몽학과 황정학의 대결은 눈과 귀의 대결, 꿈과 정의의 대결, 욕망과 가치의 대결, 칼 뒤에 숨은 자와 칼 앞에 나선 자의 대결이나 다름없다. 그리하여 이몽학에게 상한 눈 부릅뜨며 “가지 말라”고 붙잡는 황정학의 애끓는 호소는 욕망의 추동으로 질주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읍소하는 가녀린 것들의 애원으로 공명한다. 이렇게 이 감독은 견자와 이몽학, 황정학 세 주연의 만나고 흩어지는 이합집산적 여정을 통해 ‘황산벌’ ‘왕의 남자’에서 현실을 비틀고 비판했던 것처럼, 체제에 갇혀 몸부림치는 자들의 해학과 비애를 반반씩 섞어낸다.



    장난꾸러기에 퇴행적인 ‘왕의 남자’의 연산처럼, 이 영화가 그린 왕 역시 다혈질에 개인적인 살길만 찾는 능수능란한 정치꾼이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 재현되는 조선 땅은 늘 선혈이 낭자한 폐허다. 권력 뒤에 숨은 양반도 죽고, 가면 뒤에 숨은 광대도 죽고, 칼 뒤에 숨은 검객도 죽고, 결국 내부의 괴멸로 꿈들조차 꿈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땅이다.

    그러나 정서적으로 내밀하고 섬세해 보였던 ‘왕의 남자’에 비해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다소 거칠고, 캐릭터와 스토리의 밀도가 떨어지는 아쉬움을 남긴다. 스토리만 보면 딱 ‘극장판 추노’이고, 하는 일 없이 스크린을 채우는 기생 백지는 ‘민폐 언년이’의 환생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러나 능청스럽고 구리고 깐족대는 황정민의 연기는 단연 압권이며, 신인배우 백성현의 발견 또한 상쾌하다.

    결국 달은 구름을 벗어날 수 있을까? 구름이 끼어도 달은 거기 있는데, 사람들은 달을 보지 못하는데…. 그럼 결국 손가락만 보고 있나. 세상이 너무 깜깜해지면 구름은 다시 별에게 환한 관심의 자리를 내줄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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