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28

2010.03.23

뭍에 오른 쇠고래, 예술로 부활

가브리엘 오로즈코 ‘Mobile Matrix’

  • 김지은 MBC 아나운서·‘예술가의 방’ 저자 artattack1@hanmail.net

    입력2010-03-18 09: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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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뭍에 오른 쇠고래, 예술로 부활

    ‘Mobile Matrix’, 196×1089×266cm, 2006, Biblioteca Vasconselos, Mexico City

    멕시코 출신 가브리엘 오로즈코는 지난주에 소개했듯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무심코 지나치는 현실을 다시 한 번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하는 작가입니다. 그것도 회화나 사진, 조각, 설치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면서 말이죠.

    그의 작품은 오브제 자체보다는 작품과 관객 사이에 형성되는 ‘순간적 상호작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죠.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여했던 그는 당시 가장 보잘것없는 재료로 가장 큰 주목을 끌었습니다. 그는 단지 빈 구두상자를 전시장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았을 뿐이었죠. 유럽이나 미국 중심의 작가 선정에 대한 비판과 함께 극도로 좁은 공간에서 머릿수나 채우고 있던 라틴아메리카 작가들의 열악한 현실을 고발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그는 이렇게 작은 제스처 하나로 작품이 전시되는 공간의 의미를 변환하는 걸로도 유명합니다. 1993년 뉴욕현대미술관 ‘MoMA’에서 열렸던 개인전에서 그는 달랑 요구르트 병뚜껑 4개만 커다란 전시장의 벽에 붙여놓았는데요. 뭔가 잔뜩 ‘볼 것’을 기대하고 왔던 관객들은 병뚜껑이 오히려 전시장의 빈 공간을 부각시킨다는 걸 깨닫게 됐지요. 바로 이런 ‘불편한 순간’은 우리가 보기를 기대하는 것과 실제 본 것의 간극이 빚어내는 심리적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요구르트 병뚜껑에 불편해했던 사람들은 미술관 창밖으로 보이는 기묘한 풍경에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미술관 맞은편 아파트 창가마다 주황색 오브제가 설치돼 있었기 때문이죠. 관객들이 발견하기 전까지는 보이지 않던 오브제의 정체는 바로 신선한 오렌지였습니다. 오로즈코는 주민들에게 오렌지를 창가에 놓아달라고 부탁함으로써 미술관이 아닌 뉴요커들의 가장 사적인 공간을 공공미술의 영역으로 편입했던 것입니다. 이로써 아파트 안 개인은 오렌지 하나로 작가가 기획한 풍경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게 됐고요. 즉 예술과 일상을 연결하는 능동적인 참여자가 된 것이죠. 관객이 기대하는 순간 실망시키고, 실망하는 순간 다시 발견의 기쁨을 선사한 이 프로젝트의 제목처럼 그는 작가로서 ‘홈런(Home Run)’을 쳤는데요.

    그런 그가 16년 만에 다시 같은 장소인 MoMA에서 회고전을 연다고 했을 때, 관객들은 미술관 구석구석 틈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각오로 전시장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관객들은 천장에 매달린 길이 10.8m가 넘는 쇠고래의 뼈가 드리운 그림자 밑에서 또 한 번 입을 다물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Mobile Matrix’는 그가 멕시코 북서부 바하 칼리포르니아 수르의 한 섬에서 채굴한 쇠고래 뼈를 고고학자처럼 맞춘 뒤, 20명의 조수와 함께 뼈 위에 크고 작은 동심원을 그려넣은 작품입니다. 소비된 샤프펜슬만 6000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쇠고래는 해마다 1만 마일이 넘는 거리를 이동하는 포유류인데, 경추(목등뼈)의 석회화로 방향성을 상실해 배에 머리를 부딪거나 얕은 해안가로 잘못 헤엄쳐와 죽는 사례가 빈번하다고 합니다. 작가가 발굴한 뼈도 마찬가지 원인으로 죽은 쇠고래의 것으로 판정 났는데요. 그 고래는 여정의 종착지가 미술관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겠죠. 칫솔만 챙겨 세계 곳곳을 떠돌며 작업하던 유목적 작가 오로즈코가 대표적인 이동성 동물인 쇠고래에 관심을 가진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장소의 이동성은 물론 한 가지 사고에 머무르지 않으려는 작가의 의지로 볼 수 있겠죠. 쇠고래의 뼈에 그려진 동심원은 기하학과 생명체, 즉 예술과 삶을 결합하려 했던 오로즈코의 끝나지 않을 노력의 상징으로 볼 수 있는데요. 뼈만 남은 쇠고래의 시체는 이리하여 뼈에 새겨진 동심원처럼 다시 예술로 부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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