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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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 부총리 “중산층이 사회의 젖소냐”

베스터벨레, 헌재 실업보조금 ‘사실상 인상’ 판결에 원색 비난 파문

  • 슈투트가르트=안윤기 통신원 friedensstifter@gmail.com

    입력2010-03-17 16: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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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獨 부총리 “중산층이 사회의 젖소냐”

    실업보조금을 삭감하는 내용의 법 ‘하르츠Ⅳ’에 대한 독일 국민들의 항의 시위 퍼포먼스.

    하르츠(Hartz)IV. 많은 독일인은 이 말만 들어도 이를 간다. 그 정도로 ‘하르츠IV’는 서민들에게 원망과 증오의 대상이 되는 법이다. 지금도 이 법에 반대하는 월요 시위가 매주 열린다. 벌써 5년째다.

    슈뢰더 정부가 끝나가던 2005년, 독일은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의 복지정책 개혁을 했다. 사회보장의 규모를 축소하는 것이 골자였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독일은 실직자에게 기존 급여의 3분의 2를 실업보조금으로 지급해왔다. 문제는 낮은 재취업 의욕과 실업의 장기화. 일을 안 해도 그럭저럭 생활할 만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슈뢰더 당시 총리는 페터 하르츠를 위원장으로 한 개혁위원회를 소집했는데, 여기서 나온 정책 중 하나가 바로 ‘하르츠IV’다. 주요 내용은 실업보조금을 연차적으로 줄여, 실업 3년차가 되면 최저생활비 수준이 되도록 하는 것. 궁핍에 처하지 않으려면 새 일자리를 구하라는 일종의 압력인 셈이다.

    “실업보조금 다시 산정하라” 각계 환영

    현재 독일에서 680만명의 장기 실업자가 1인당 월 359유로(약 57만원)의 실업수당에 의존해 살고 있다. 그리고 그 가족에 속하는 170만명의 자녀에겐 1인당 215~287유로(35만~45만원)의 수당이 추가 지급된다. 한국 기준으로는 적지 않아 보이지만, 독일의 높은 물가를 고려하면 거리로 내몰리는 것을 겨우 면한 수준이다. 특히 자녀수당 산출 방법에 대한 불만이 높다. 현재 성인의 60~80% 선에서 책정되는데 교육비, 의류비 등 아이에게 들어가는 비용이 성인 못지않다는 것 이다.



    2009년 세 가정이 사회법원에 이 문제를 제기했고, 이것이 헌법재판소(이하 헌재)까지 올라가 최근 판결이 나왔다. “헌법이 보장하는 생존권에 비춰볼 때 성인과 그 자녀에 대한 실업보조금 액수가 잘못 산정됐으니 정치권은 올해 안에 대안을 마련하라”는 것이 판결의 골자다.

    정치권을 비롯, 사회 각계의 반응은 환영일색이다. 사민당, 좌파당, 녹색당 등 야당과 사회복지단체, 어린이보호협회의 환호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여당에서도 판결에 대해 뭐라 하지 못했다. 메르켈 총리는 “선명한 판결”이라 언급했고, 주무부서인 노동부의 장관 폰 데어 라이엔(기민련)은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헌재가 분명히 보여주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문제는 돈이다. 무엇보다 정부 재정 악화가 큰 부담. 이미 매년 400억 유로(64조원) 이상을 실업보조금으로 지출하고 있는데, 장기실업자 1인당 60유로씩만 더 지급해도 정부의 추가 부담이 수십 억 유로에 달하기 때문이다. 실업보조금 인상으로 최저임금 법제화 논쟁이 다시 불붙게 돼 사실상 ‘임금 인상’ 효과가 나타나는 것도 독일정부로선 큰 부담이다(독일은 아직 법으로 최저임금을 정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현 정부는 경기활성을 위한 감세(減稅)와 바닥난 건강보험 개혁을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 이는 특히 집권여당인 자민당의 핵심 공약이다.

    이런 까닭으로 헌재의 판결이 나온 다음 날부터 불만과 비판의 목소리가 정부와 여당에서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부총리 겸 외무부장관 기도 베스터벨레는 언론 기고에서 과격한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힘들여 노력하지 않아도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국민에게 약속하는 것은 국가를 로마 말기의 퇴락으로 몰고 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 따위로 하면 독일은 망하고 말 것이다.”

    그는 또 헌재 판결을 ‘사회주의적’이라고 비난하면서 “국가로부터 누가 더 많이 받을지 따질 것이 아니라, 거꾸로 국가에 세금을 바치는 납세자의 공로를 강조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나랏돈을 받으려는 사람만 있지, 나랏돈을 조성하려는 사람은 없는 점을 비판한 것이다. 그는 또 “돈을 받는 사람은 감 놔라 배 놔라 하고, 정작 그 비용을 모두 감당해야 할 사람은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고 성토했다.

    이런 도발적이고도 직설적인 발언은 베스터벨레의 전매특허와도 같다. 그가 ‘좌파’ ‘사회주의’란 말만 들어도 치를 떤다는 사실 또한 익히 알려진 바다. 다만 흑(기민련)-황(자민당) 정권 출범 후 100일간 외무부 장관으로서 국제무대에서 ‘의외로’ 진중한 모습을 보였던 그가 과거의 ‘야당 전사’로 되돌아온 듯해 다소 의아할 뿐이다.

    이런 베스터벨레를 정치권이 비난하고 나섰다. 사민당 당수인 지그마어 가브리엘은 “베스터벨레가 현실감을 상실했다”며 그를 ‘로마에 불을 지른 네로 황제’에 비유했다. 라인란트-팔츠 주지사 쿠르트 벡은 “베스터벨레가 실업보조금을 받는 680만명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사과를 요구했다. 여당의 한 축을 이루는 기사련(CSU) 당수 호르스트 제호퍼는 “베스터벨레가 모든 것을 자유화, 시장화하려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베스터벨레와 친분이 두터운 메르켈 총리조차도 “베스터벨레와는 달리 생각한다”며 선을 그었다. 심지어 베스터벨레가 당수로 있는 자민당도 그의 가볍고 신랄한 표현을 문제 삼았다. 그야말로 현직 부총리가 고립무원(孤立無援) 처지에 놓인 것이다.

    그러나 베스터벨레는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내 글의 철자 하나도 철회할 생각이 없다”며 “일하는 사람이 일하지 않는 사람보다 더 많이 벌어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나의 발언을 문제 삼는 사람은 모두 사회주의자”라고 목청을 높였다. 그는 또 “중산층이 ‘사회의 젖소’가 돼서는 안 된다. 지금 독일에 사회주의적 사고가 판을 치고 있어 문제”라고도 일갈했다.

    “현실감 상실” 뿔난 독일 국민들

    문제는 독일 국민 대다수가 베스터벨레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가 속한 자민당이 강력하게 추진하는 감세와 건강보험 개혁에도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세금 감면은 뜻밖에도 ‘호텔세 인하’로 포문을 열었는데, 지난해 자민당에 엄청난 후원금을 안긴 뫼벤픽 그룹의 주력 업종이 호텔업인 것과 무관치 않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자민당 소속인 필립 뢰슬러 보건부 장관은 소득에 따라 차등 부과하는 건강보험료도 소득을 고려하지 않는 ‘정액제’로의 전환을 구상하고 있다. 다분히 ‘가진 자’를 위한 정책이 아닐 수 없다. 국민은 베스터벨레와 자민당이 과연 국정수행 능력이 있는지 의심하기 이르렀고, 어느덧 자민당 지지율은 지난 총선 후 불과 넉 달 만에 14.6%에서 8%로 거의 반 토막 났다.

    헌재 판결에 따라 실업보조금 액수를 상향 조정하는 것은 독일의 현 여건에 비춰볼 때 상당한 무리가 따를 것이 틀림없다. 이는 분명 문제다. 그러나 베스터벨레의 일방적이고도 원색적인 비난은 이 문제를 잊게 만드는 치명적 약점이 있다. 베스터벨레는 로마 말기의 퇴락이 스스로 지체 높다 여겼던 상류 지도층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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