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05

2009.09.29

흔들리는 ‘바나나’ (재미교포) 를 위한 변명

2PM 박재범 소동, 정체성 이해 부족 목소리 … “한국은 외갓집 같은 곳”

  •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입력2009-09-23 15: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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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들리는 ‘바나나’ (재미교포) 를 위한 변명

    서울 강남구 청담동 JYP엔터테인먼트 빌딩 앞에 부착된 박재범 응원 게시물들.

    “한국 사람들은 친한 사이끼리 ‘너 미쳤구나’ ‘죽을래?’ 같은 말을 스스럼없이 하잖아요. 미국 사람들도 친밀한 관계에서는 ‘gay’나 ‘hate’라는 표현을 즐겨 써요. 친구한테 ‘You’re so gay’라고 하면 ‘너 정말 웃기다’는 뜻이고, ‘I hate you’라고 하면 ‘야, 너 뭐야?’ 하는 정도예요.

    저는 제가 좀 맘에 안 들 때 ‘I’m so gay’라고 하고, 친언니한테도 종종 ‘I hate you. Stop it’이라고 하는 걸요. 정말 제 자신이 역겹거나 언니를 진짜로 싫어해서 이런 말 하는 건 아니잖아요. 아무것도 아닌 일이 이렇게 커져버려 안타깝습니다.”(재미교포 2세 김모(26) 씨)

    인터넷에 쓴 ‘Korea is gay’ ‘I hate Koreans’ 등의 문장이 한국 비하 발언으로 몰리면서 시작된 아이돌 그룹 2PM 멤버 박재범(22) 논란이 장기화하고 있다. ‘오역(誤譯)’을 비롯해 ‘인터넷 여론재판’ ‘폐쇄적 애국주의’ ‘성급한 언론보도’ 등이 문제로 지적되는 가운데 한국 사회가 해외교포들의 특수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지적도 곱씹어볼 대목이다. 이번 사태를 누구보다 안타깝게 여기는 이들은 재미교포 3세인 박재범과 비슷한 성장과정을 거친 재미교포 2, 3세들. 교포라면 누구나 한국 사회에서 그의 경우와 같은 오해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 미국인, 그리고 한국계 미국인

    “태어나고 자란 국가를 떠나 낯선 나라에 처음 왔는데, 그 나라의 모든 것을 아무 문제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재미교포 최모(28) 씨는 이렇게 물었다. 이번 사태를 둘러싼 한국인들의 첫 번째 ‘실수’는 그를 ‘한국인’으로 여겼다는 점이다. 그리고 한국을 비하한 것으로 오해받은 발언들이 알려지자마자 한국인들은 그를 ‘미국인’으로 간주했다. 최씨는 “그러나 박재범은 낯선 조국인 한국을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었을 뿐이고, 그 점은 나를 비롯해 한국을 찾아온 많은 재미교포 청년들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타국에서 태어난 이민 2, 3세가 1세나 1.5세보다 조국에 대한 이해가 떨어지는 것은 주지의 사실. 한국어도 부모세대보다 훨씬 서툴다. 당연히 이들은 한국인의 정체성보다 거주 국가의 정체성을 더 많이 갖고 있다. 특히 자아가 형성되기 시작하는 청소년기에는 거주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재미교포 이모(27) 씨는 이를 ‘화이트워시(whitewash·백인화)’라고 표현했다.

    “살아남으려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화이트워시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를 주류 미국인인 백인으로 여기거나 백인에 가까이 가려고 노력하는 거예요. 이건 한국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지금 살고 있는 곳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법이니까요.”

    박재범이 사용한 비속어(slang)들 또한 한국인들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재미교포 청소년들은 백인이나 흑인보다 상대적으로 나약해 보이는 외모 때문에 일부러라도 더 불량스러워 보이고자 애쓰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 수단이 비속어와 힙합 등이다. 재미교포 2세 김모 씨는 “남자 청소년들이 슬랭을 즐겨 쓰고 힙합을 즐기는 것도 좀더 강한 미국인으로 보이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 남자아이들이 욕을 섞어 말하며 남성성을 과시하려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재미교포 청소년들은 화이트워시를 통해 미국인 정체성을 완성하는 데 실패하곤 한다. 유럽계 이민자들과는 달리 백인과 확연히 구분되는 아시아 외모 탓도 있고, 미국 가정과는 사뭇 다른 한국 가정에서 자랐기에 백인들과 문화적 차이를 느끼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연히 같은 한인교포 친구들끼리 어울려 지낸다.

    재미교포 2세대 이상을 대상으로 절친한 친구의 민족을 조사한 결과 한인이 40.5%로 백인(29.3%)이나 아시안(20.1%)보다 월등히 많은 것으로 나타난 연구결과(유인진 등, ‘재외동포 차세대 현황과 육성 방안: 미주 지역을 중심으로’, 2005)도 있다. 한인 밀집지역인 로스앤젤레스에서 자란 김씨는 “일부 남자 청소년들은 한국어는 할 줄 몰라도 태극기를 옷에 붙이고 다니는 등의 KP를 즐긴다”고 전했다. ‘KP’는 ‘코리아 프라이드(Korea Pride)’의 약자다.

    미국의 한국 청소년 그룹은 크게 둘로 갈린다. 하나는 교포 그룹이고, 다른 하나는 유학생 그룹이다. 한인 청소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F.O.B와 바나나, 둘 중 어디에 속하느냐는 질문을 받게 마련이다. F.O.B는 ‘Fresh off the boat’의 약자로 원래 이민자를 뜻하는 말이나 유학생을 가리키기도 한다. ‘바나나’는 잘 알려진 대로 외모는 아시아계이나 내면은 백인이나 다를 바 없는 교포를 가리키는 용어다.한국계이지만 한국이 낯선 재미교포와, 미국을 배워야 할 한인 유학생은 상부상조할 수 있는 관계다.

    그러나 이 두 그룹은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다. 시카고대 유학생 황모(29) 씨는 “한국인 학생모임은 교포 그룹과 유학생 그룹으로 분리돼 있다”고 전했다. “교포들은 영어가 능숙하지 못한 유학생들을 답답해하고, 유학생들은 외모만 한국인일 뿐 행동이나 생각이 미국인과 다를 바 없는 교포들에게 동질감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 재미교포 2세 최씨는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교포와 유학생이 서로 얕잡아봤고 자주 다툼이 일었다”고 회상했다.

    “교포 처지에선 시끄럽고 무례한 한인 유학생들이 좀 창피했습니다. 유학생들은 외모는 한국인인데도 영어만 쓰고 미국인처럼 행동하는 교포들이 얄미웠던 것 같고요.”

    성인 되어 조국 찾는 교포 청년들

    그렇다고 교포 청소년들이 한국, 한국인과의 갈등 관계를 오래 지속하는 것은 아니다. 청소년기를 지나 성인이 되면서 많은 교포가 조국을 알기 위해 한국을 찾아온다. 6·25전쟁 휴전일인 7월27일을 미국의 국가기념일로 지정하는 데 주도적인 활동을 한 민간외교관 김한나 씨(리멤버727 대표)와 이중언어 교수요원으로 발탁돼 국내 초등학교에서 다문화 관련 강의를 하는 이현정 씨가 그런 경우다.

    김씨는 여섯 살 때 미국으로 이민 간 재미교포 2세로 서울대 영문학과를 졸업했으며, 이씨는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2세지만 고교와 대학을 미국에서 다녔고 지난해 가을부터 한국에 거주한다. 이 두 여성은 한국에 머물면서 정체성의 정답을 찾았다고 했다. 그것은 한국인 혹은 미국인이 아니라 한국계 미국인, 한국계 일본인이라는 이중 정체성이다.

    “한국은 제게 외갓집 같은 곳입니다. 제가 아버지 성을 따르고 있어도 몸에 외가의 피가 흐르는 것처럼, 저는 미국 사람이지만 한국 사람이기도 해요.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정체성에 많은 혼란이 있었지만,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그걸 깨달았습니다.”(김한나)

    “고등학교 때 한 한국인 친구가 제 앞에서 일본에 대해 안 좋은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지 말라고 하자 ‘너는 한국인이야, 일본인이야?’라고 물었어요. 저 같은 교포에게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상에 한국인과 미국인, 일본인이 있듯이 ‘한국계 미국인’ ‘한국계 일본인’ 또한 존재한다는 점을 인정해줬으면 해요.”(이현정)

    박재범 사태는 한국 사회에 많은 숙제를 남겼다. 그중 하나가 조국을 찾아온 교포 청년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는 문제다. 그 시작은 이들이 한국에서 나고 자란 우리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다문화 사회로의 ‘진화’는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나에게 코리안 아메리칸 정체성은 중요하다. 이것은 내가 누구인가를 반영한다. 내가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나는 이 나라(미국)가 어떤 나라라는 것을 알고, 나는 이 나라의 부분이고, 이 나라가 나에게 부여하는 기회를 이용해왔다. 나는 또한 내가 한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면 한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그것은 나의 (의식의) 중심에 있다.

    -두 살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간 한 재미교포의 고백. ‘북미의 한민족청소년 현황 및 생활실태 연구’(한국청소년연구원, 2007) 106쪽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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