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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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0원대 ‘런치세트의 힘’

낮 12시 맥도날드 매장 고객 발길 부쩍 “매일 뛰는 물가, 싼 거 먹고 살아야죠”

  • 백경선 르포라이터 sudaqueen@hanmail.net

    입력2008-09-08 15: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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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00원대 ‘런치세트의 힘’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의 마지막 주 목요일 낮 12시. 서울 종로구 관훈동 맥도날드 매장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주변에 회사와 학원이 많아 그런지 매장은 금세 직장인과 학원생들로 가득 찼다. 그들은 하나같이 햄버거, 감자튀김, 음료수를 주문했다.

    “이렇게 푸짐하게 먹는데 가격은 3000원대예요. 싸서 좋죠.(웃음)”

    직장인 홍은주(25·여) 씨는 햄버거가 먹고 싶어 이곳을 찾았는데, 싸기까지 하니 금상첨화란다. 홍씨는 주부이다 보니 가격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고.

    “최근 이 근처 밥값이 1000~2000원 올라 6000~7000원 해요. 예전엔 5000원짜리도 많았는데, 이젠 별로 없죠. 다음 달부터는 아예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닐 생각이에요.”

    낮 12시부터 오후 2시까지 선보이는 맥도날드 런치세트는 총 7종류로 모두 3000원대다. 싼 것은 3000원, 비싸봤자 3900원이다. 근처 식당 밥값의 절반 수준인 셈.



    물가와 금리가 오르고, 추석 이후엔 그동안 억제됐던 전기료와 가스요금 같은 공공요금도 오를 예정이라고 한다. ‘9월 위기설’ ‘11월 위기설’도 나돈다.

    반면 월급은 그대로니 서민은 아끼고 아낄 수밖에 없다. 그중 만만한 게 식비요, 그래서 저렴한 런치세트가 인기다. 맥도날드 관계자에 따르면 런치세트는 2005년 5월부터 판매되기 시작했는데, 최근 런치세트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매장을 찾는 고객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대학생 서경원(24) 씨와 이은상(23) 씨는 근처 경영아카데미에 다닌다. 이들은 일주일에 두세 번은 런치세트를 먹으러 “올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군대에 갔다 왔더니 물가가 많이 올랐더라고요. 휴대전화 요금과 의류 구입비를 제외한 한 달 용돈이 40만원 정도인데, 용돈 내에서 생활하려면 아낄 수밖에 없어요. 군대도 다녀왔는데 부모님께 용돈 올려달라고 할 순 없잖아요.”(이은상 씨)

    “식비를 줄이는 게 가장 쉬워요. 그렇다고 안 먹고 살 순 없고, 커피전문점의 커피를 마시고 싶어도 자판기 커피를 마시고, 백반을 먹고 싶어도 김밥이나 햄버거를 먹고 그러는 거죠. 그나마 김밥보다 햄버거가 더 든든하니까 여길 자주 오게 돼요. 특히 런치세트는 꼭 챙기죠. 이런 저렴한 메뉴가 저녁에도 있었으면 좋겠어요.”(서경원 씨)

    3000원대 ‘런치세트의 힘’
    직장인 사경진(33) 씨는 “몸에 좋지 않다고 여기면서도 햄버거를 먹는다”고 말했다.

    보통 오후 1시가 되면 직장인들은 대부분 빠져나가고 서씨와 이씨 같은 대학생들이 매장에 남는다. 그런데 근처 직장에 다니는 강홀구(25) 씨는 2시가 거의 다 돼 매장에 들어선다. 외근을 자주 하다 보니 늦은 점심을 먹는 일이 다반사란다. 혼자 먹기 좋고, 무엇보다 저렴해서 런치세트를 즐긴다는 그는 런치타임이 끝날까봐 조마조마하다고.

    “회사에서 하루 5000원씩 식비가 나와요. 예전엔 그 돈이면 식당 가서 먹을 수 있었는데, 요즘엔 모자라죠. 여기 주변 밥값이 올랐거든요. 그런데 식대는 안 오르고…. 식대에 맞추다 보면 싼 곳을 찾게 되는데, 그래서 분식점이나 패스트푸드점을 자주 이용해요. 그나마 패스트푸드점도 일반 메뉴는 싸지 않으니 런치세트를 먹게 되죠.”

    강씨는 런치세트를 먹으면서 식비를 많이 줄였다고 한다. 그래도 여전히 여유는 없다고.

    “교통비도 올랐잖아요. 밥값 아껴서 교통비로 충당하면 남는 게 없어요. 아무리 아껴도 똑같아요. 정말 살기 힘드네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먹고 살아야죠.(웃음)”

    강씨처럼 혼자 늦은 점심을 먹는 사람이 또 있다. 퇴직 후 근처 일본문화원에서 자료를 수집한다는 정기식(76) 할아버지다. 은퇴하기 전까지 외국인 회사에 다녔던 그는 외국생활을 오래 했다. 지난달 이 앞을 지나다 문득 외국생활 할 때 즐겨 먹었던 햄버거가 먹고 싶어 매장을 찾았다는 그는 햄버거와 감자튀김에 음료수까지 3000원대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서민 아무리 아껴도 생활 팍팍

    “요즘 물가를 생각하면 많이 싸잖아요. 그 뒤로 종종 와서 먹고 가요. 나이 많은 사람도 꽤 있어요. 나처럼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노인은 더욱 절약해야 하니까요.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밥만 먹을 돈으로 이곳에서는 세트 메뉴에 아이스크림이나 커피 같은 후식도 즐길 수 있으니 노인에게는 더할 나위 없
    3000원대 ‘런치세트의 힘’
    이 좋죠. 얼마 되지 않는 돈으로 오래도록 친구들과 이야기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까요.”

    아무리 아껴도 생활이 팍팍하다는 이들은 그래도 절약 속에서 작은 행복이나마 찾고 있었다. 이들이 허리띠를 조금이라도 느슨하게 풀 때는 언제쯤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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