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53

2008.09.16

1970년대 불교신자만 중동 파견?

종교갈등 피하기 위해 비자신청서 종교란에 무조건 불교 기재 관행

  • 황용복 밴쿠버 통신원 facebok@hotmail.com

    입력2008-09-08 15: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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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불교신자만 중동 파견?
    1970년대 중반부터 10여 년간 중동건설 붐이 일었다. 석유값 폭등으로 달러가 주체하기 힘들 만큼 유입되자 중동 산유국들은 갖가지 건설사업을 벌였고, 연인원 수십만명의 한국인이 이 기간 중동에서 일했다. 그런데 이들 대부분은 불교신자였다. 정확히 말하면 이들 나라에 비자 신청을 할 때 신청서 종교란에 거의 다 ‘불교’로 기재됐다.

    한꺼번에 많은 인력을 현지로 보내야 했던 그 시절, 한국 건설업체가 직원들의 비자 발급 업무를 대행했다. 담당직원이 신청서를 일괄 작성하고 당사자는 서명만 했다. 이때 담당직원이 당사자의 실제 종교와는 관계없이 종교란에 불교라고 적어넣는 것이 관행이었다.

    이슬람권 사람들은 짐승이 아닌 인간이라면 누구나 종교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종교는 인간성의 필수 구성요소이며, 인간인데도 종교가 없다면 이는 야만을 뜻한다고 믿는다. 그러니 한국 건설업체 처지에서는 ‘종교 없음’이라고 쓰기도 어려웠고, 이슬람권 사람들이 싫어하는 기독교 등의 종교를 명기하는 것은 더욱 곤란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편법으로 이슬람 세계에서 덜 공격적이고 배타적으로 간주되는 불교를 ‘활용’한 것이다.

    종교갈등 전쟁으로 발전한 사례 무수히 많아

    나는 한국이 수천 년간 정체성을 잃지 않고, 광복 이후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종교적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조선시대 숭유배불(崇儒排佛) 정책의 아픔이 있었고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도 있었지만, 이런 문제 때문에 나라가 쪼개지거나 전쟁이 일어나진 않았다. 특히 광복 이후 현대사에서는 종교 때문에 국민이 분열되거나 이로 인해 힘의 손실이 발생한 적이 거의 없었다. ‘어느 상가에 갔더니 상주들이 종교가 달라 각기 다른 장례의식이 치러지더라’는 정도가 한국인이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종교갈등의 전부이리라.



    대부분의 한국인은 종교를 사적 영역으로 간주해 관용을 보인다. 한국인은 종교를 인간성의 ‘중요 요소’로 인정하지만, 이슬람권 사람들처럼 ‘필수 요소’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한국의 종교인 중에도 타 종교를 아예 부인하는 근본주의자는 많지 않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이 같은 종교적 자유로움을 우리는 당연한 것으로 느끼지만 시야를 넓혀보면 지구촌에서는 드문 축복이다. 중세 십자군전쟁부터 현재 진행형인 중동의 종교갈등, 인도 펀자브 지역의 분리독립운동, 필리핀의 이슬람 반란, 스리랑카의 타밀 분리투쟁, 수단 나이지리아 소말리아 등 아프리카의 내란, 유럽의 발칸반도 사태, 그리고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이르기까지 모두 종교가 중요한 갈등 원인이 되고 있다.

    물론 근본적 이유가 종교 하나뿐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중동 지역의 갈등은 정치권력, 석유를 비롯한 경제이권, 문화적 차이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빚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 갈등의 방정식에서 종교 변수가 삭제된다면 사태는 훨씬 덜 심각할 것이다. 흔히 선진국의 척도로 민주화와 경제발전이 꼽히지만, 이 두 가지를 이루기 위한 중요한 선행조건은 종교적 안정이다.

    지금 번영을 구가하는 선진국들도 과거엔 심각한 종교갈등을 겪었다. 영국은 오랫동안 기독교 신교의 한 갈래인 잉글랜드교회(성공회)를 국교로 삼았지만 스코틀랜드의 가톨릭과 장로교, 아일랜드의 가톨릭, 잉글랜드교회의 개혁파인 청교도 등이 여러 차례 대립했다.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북아일랜드 사태의 바탕에도 종교적 갈등이 깔려 있다.

    1970년대 불교신자만 중동 파견?

    종교갈등으로 인한 중동의 분쟁은 오늘날에도 끊이지 않고 있다. 세계 종교 갈등의 중심에 있는 이스라엘군의 탱크(왼).지난 8월27일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을 가득 메운 불교도. 이들은 이명박 정부의 종교 편향에 항의했다.

    한국 큰 종교갈등 없다 최근 불교계 문제 터져

    프랑스는 ‘위그노’라 불리던 칼뱅주의 신교도와 가톨릭의 대립으로 오랜 종교전쟁을 치르다가 1598년 낭트칙령을 통해 겨우 화해를 하는 듯했다. 그러나 루이 14세가 이 칙령을 폐기하고 다시 신교도들을 탄압해 많은 신도들이 국외로 망명했다. 이때부터 가톨릭이 프랑스의 국교였다가 20세기 들어 ‘드레퓌스 사건’이라는 혁명적 정치 파동을 거치면서 정치와 종교가 분리됐다. 이 밖에 네덜란드 독립전쟁, 히틀러의 유대인 말살 시도 등 유럽 나라 가운데 종교를 계기로 사변을 겪지 않은 곳이 드물 정도다.

    미국은 독립 직후 헌법을 만들면서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명시했지만, 그 전 식민지 시절에는 다수자인 기독교 신교도, 소수자인 가톨릭, 신교도 소수종파인 퀘이커교도가 서로 충돌하며 상당한 갈등을 겪었다. 지금의 메릴랜드 주가 가톨릭 이민자들이 신교도와 부닥치지 않을 장소를 골라 ‘마리아의 땅(Maryland)’이란 이름을 붙인 것이 그 시발이다. 미국 독립 이후 생긴 신흥종교 모르몬교도들은 종교적 박해를 피해 지금의 유타 주에 자리잡았다.

    캐나다 역시 종교 대립의 역사에서 예외가 아니다. 북아메리카가 미국과 캐나다로 갈라진 것도 가톨릭을 믿는 캐나다 땅의 프랑스계 주민들과 미국 땅의 신교도들이 한 배를 탈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국 독립 후 캐나다에서는 프랑스어계 주민의 가톨릭과 영어계 주민의 신교가 불화를 겪었고, 신교 내에서도 여러 갈래 간 다툼이 치열했다.

    다문화주의를 표방하는 요즘의 캐나다는 종교에 대단히 개방적이다. 그 덕에 많은 이민자들이 쇄도한다. 1990년대 캐나다국립경찰(RCMP)은 시크교도가 경찰관이 될 경우 국립경찰의 표준 모자가 아닌 시크교도의 전통 터번을 쓴 채 근무할 수 있도록 했다. 지난해에는 선거 때 이슬람 여성 유권자가 얼굴을 완전히 가린 복장으로 투표장에 나와 신분증 사진과 실물 얼굴을 대조할 수 없는 경우에도 투표를 허용해야 하느냐가 큰 논란거리였는데, 연방선거관리당국은 두 사람의 보증인이 동행해 본인임을 확인해준다면 투표가 가능하다고 결론 내렸다.

    한국은 정치이념으로 인한 분단의 상처를 안고 있고 지역감정 때문에 국력을 낭비했지만, 종교갈등 면에서 자유롭다는 점은 세계에 자랑할 만한 미덕이다. 만일 종교 문제까지 꼬인다면 유고슬라비아 붕괴 이후 풍비박산한 발칸반도가 남의 일이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불거지고 있는 불교계와 정부의 갈등이 걱정스럽게 다가오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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