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71

2017.01.11

인터뷰

“위안부 소녀상은 평화의 상징” 조각가 김운성

‘일본 자극하지 말라’는 비판에 “일본이 합당한 사죄와 배상할 때까지 계속 제작할 것”

  • 김지현 객원기자 bombom@donga.com

    입력2017-01-06 17:3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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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마지막 날, 부산 동구 일본영사관 앞에서 일제강점기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이 시민들의 환호 속에서 열렸다. 12월 28일 부산 동구청 직원들이 평화의 소녀상(소녀상)을 철거하자 이에 시민들이 격렬하게 저항한 지 사흘 만이었다. 동구청은 ‘소녀상이 도로법 제72조(도로에 관한 금지행위) 시행령상 도로점용 허가를 받을 수 있는 공작물이 아니다’라는 이유로 철거했다가 30일 금지 조치를 풀었다. 이날 일본 언론에 따르면 스기야마 신스케 일본 외무성 차관은 주일 한국대사관 측에 “소녀상 재설치는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항의했다. 이 소녀상을 만든 김운성(52) 씨를 1월 4일 서울 종로구 옛 주한 일본대사관 앞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수요집회) 현장에서 만났다.



    살아 있는 친구처럼

    “시민들은 평화로운 미래를 모색하는데, 일본 정부는 이러한 흐름에 역행하고 있어요. 소녀상에 대해 불편함을 느낀다면 위안부 문제부터 해결해야 합니다. 일본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한 소녀상은 계속 설치될 거예요.”

    소녀상은 부부 작가 김서경(53), 김운성 씨의 공동작업으로 탄생했다. 두 사람은 국내외에 있는 소녀상 50여 개를 제작했다. 첫 번째 소녀상은 2011년 12월 14일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설치됐다. 김운성 씨가 2011년 초 수요집회를 처음 목격한 지 1년여 만이었다. 그동안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해결된 줄 알았던 그는 수요집회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고(故) 김학순 할머니가 최초로 위안부 피해 증언을 한 게 1991년이에요. ‘그 후로 20년이 지났는데 왜 해결이 안 됐을까’라는 물음에서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죠.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를 방문해 ‘예술작가로서 위안부 문제 해결에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고, 정대협에서 ‘할머니들의 넋을 기리는 비석을 세우자’고 제안했어요. 아내도 이를 받아들여 작품 구상이 시작됐죠.”



    한복을 입은 단발머리 소녀는 주먹을 굳게 쥔 채 주한 일본대사관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처음 구상한 디자인에서는 소녀의 손이 가지런했지만, 정대협으로부터 ‘일본 정부가 소녀상 설치를 불편해한다’는 소식을 들은 작가가 소녀의 손을 주먹으로 바꿔 저항을 표현했다. 소녀의 어깨에 앉은 새는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영매(靈媒)다. 땅에 딛지 못한 발뒤꿈치는 고향에 돌아와서도 정착하지 못한 위안부를 상징한다. 땅바닥에 박힌 소녀의 그림자 모자이크는 파편처럼 흩어진 위안부들의 상처다.

    첫 소녀상 제작에는 7개월이 걸렸다. 디자인이 결정되면 석고로 본을 뜨고, 그 위에 잔모래 같은 재료를 뿌려 단단하게 굳힌 뒤 동(銅)을 입힌다. 동이 굳으면 안의 석고를 깨뜨려 동상을 완성한다. 김씨는 “동이 1000년 이상 변하지 않는 재료라고 한다. 소녀상이 우리 곁에 오래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 동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소녀상은 시민에게 살아 있는 과거이자 친구 같은 존재다. 겨울엔 ‘추워하지 말라’는 의미로 소녀상에 목도리와 털모자를 씌운다. 소녀상 옆 빈 의자엔 ‘외롭지 말라’고 늘 꽃다발이나 선물이 놓여 있다.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을 수신자로 한 편지가 우편배달된 적도 있다. 1월 4일 수요집회 참가자들은 소녀상을 마치 감싸 안듯 포즈를 취하며 환한 얼굴로 사진을 찍었다. 



    ‘미소 짓는 할머니상’도 만들어

    소녀상에 대한 날 선 비판도 있다. 연약한 소녀의 모습이 다양한 위안부 피해자의 이미지를 대변하지 못한다는 것. 여성계에선 “소녀상은 ‘성적으로 순결한 소녀들만 피해자’라는 왜곡된 이미지를 굳히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에 대한 김씨의 답변은 명료했다.

    “내가 직접 들은 할머니들의 증언은 대부분 ‘13~15세에 끌려갔다’는 것이었고, ‘이를 토대로 소녀상을 만드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20, 30대 위안부 피해자가 있었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성노동에 시달리는 위안부들의 형상은 보는 이에게 역효과를 낼 것이라고 생각한다. 위안부 피해의 폭력성을 잔인하게 묘사한 다른 예술가들도 있지만, 이는 관람객에게 오히려 끔찍한 기억만 남긴다. 소녀상이 ‘침착한 저항’을 표현했기에 시민들도 친구처럼 아끼게 된 것 아닐까.”

    설치 장소에 대한 논란도 있다. “주한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은 한일 감정 대립만 부추겼다”는 것이다. 김씨는 “20년 넘게 이어진 수요집회 현장을 기리려고 설치한 것이지, 일본을 증오하고자 일본대사관 앞에 세운 게 아니다. 한국과 일본이 서로 귀를 열고 대화하자는 것이 소녀상의 본래 목적이다. 일본이 합당한 사죄와 배상을 하기 전까지는 계속 만들겠다”고 말했다.

    한편 일본에서는 “한국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만 요구하지 말고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과 강간을 반성하라”는 목소리도 있다. 김서경, 김운성 씨는 베트남전쟁에서 희생된 민간인의 넋을 위로하고자 ‘베트남 피에타’ 상을 만들었다. 엄마가 아기를 안고 미소 짓는 조각상이다. 김씨는 “베트남전쟁에 대한 한국의 사죄와 일본의 위안부 문제 해결은 별개 사안”이라면서도 “한·베트남의 평화적 관계를 위해 제주와 베트남에 각각 설치할 피에타 상 2개를 만들었다. 다만 베트남에서는 한국 정부의 눈치를 보느라 설치 허가를 못 내주는 것 같다”고 씁쓸하게 말했다.

    소녀상은 ‘미소 짓는 할머니상’으로 최근 다시 태어났다. 김씨는 1월 4일 수요집회에 참석한 길원옥(89), 김복동(91) 할머니의 석고상을 선보였다. 할머니들의 실제 모습과 비슷하게 만든 석고상은 동상으로 완성한 후 서울 마포구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 전시될 예정이다. 초승달 같은 눈으로 웃는 김씨가 자신의 작품 뒤에 섰다. 2개의 석고상과 김씨의 얼굴이 닮아 보였다.

    “누구나 웃는 얼굴은 비슷하죠. 소녀상을 만든 후 할머니들이 조금씩 아픔을 극복하는 모습을 봅니다. 앞으로 할머니들이 웃을 일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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