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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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어떤 ‘나’를 꿈꾸는가

  • 장석만/ 옥랑문화연구소장

    입력2005-05-04 09: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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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캘빈이 호화유람선 광고를 보고 와서 아빠에게 묻는다. 자기는 어째서 그런 호화판 여행을 해본 적이 없냐는 것이다. 언젠가는 캘빈이 이처럼 따질 것을 예상했다는 듯이, 아빠는 휴가에 관한 자신의 소신을 청산유수같이 늘어놓는다. 말씀인즉 집에서 지내는 수준보다 편안하게 여행을 하면 나쁘다는 것이다. 만약 여행을 호화판으로 하고 온다면, 집에서의 생활이 보잘것없게 느껴지고, 화려했던 여행과 지금의 자신을 비교하면서 스스로 불행하다고 여기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반면 잠시 동안 힘들고 불편한 여행을 하고 돌아온다면, 집에서의 생활은 저절로 고맙고, 쾌적하게 느껴질 것이라는 것이 아빠의 논리다.

    어지간해서는 아빠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 없는 캘빈도 이번에는 ‘휴가가 비교의 문제’라는 아빠의 논리를 고스란히 수긍한다. 그뿐 아니라, 캘빈은 비교의 논리를 자신에게 적용시킨다. 당장 엄마한테 가서 자신이 입양되었다고 말해달라고 조르는 것이다. 자신이 입양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입양될 수밖에 없었던 이전의 상황에 비해 지금의 처지를 좀더 행복한 쪽으로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비교의 문제는 휴가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이 세상 거의 모든 것이 비교의 활동과 연관되어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예컨대 아이덴티티 문제에 관계된 것에는 모두 비교 작업이 함축되어 있다. 내가 ‘나’인 것은 나와는 다른 ‘너’가 있기 때문이고, ‘우리’라는 것은 반드시 ‘그들’의 존재를 전제하면서 상호 비교가 이루어짐으로써 나타난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식활동은 비교를 통해 시작되고, 전개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앎이 등장하려면 무정형의 흐름에 토막을 내어 일정한 곳에 배치(配置)하는 분류 작업이 진행되어야 하는데, 이것과 저것 사이에 무수한 비교가 행해지지 않으면 이런 작업 자체가 불가능하다. 우리의 앎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같음과 다름의 비교 망(網) 속에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비교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한 개인도 과거의 자기와 현재의 자기를 비교하며, 자신이 누구인지를 가늠한다. 진보를 주장하는 사람은 과거의 자기보다는 현재의 자기에 많은 가치를 부여하고, 또 미래의 자기가 지금보다 더 바람직한 상태에 놓여 있을 것을 의심치 않는다. 반면에 보수의 주장은 과거의 자기가 지닌 가치의 보존에 많은 중점을 둔다.

    얼마 전에 인기 절정의 여배우가 자살했다는 소식은 많은 이들에게 놀라움과 안타까움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은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조건을 갖춘 그녀가 어째서 죽음을 택해야 했는지 궁금해했다. 유서에서 그녀는 1년 전의 자기와 지금의 자기를 비교하며, 현재의 자신에 대한 커다란 박탈감을 나타냈다. 그리고 1년 전의 자기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만약 그녀가 현재의 박탈감, 미래에 대한 절망감, 그리고 그리운 과거로 복귀할 수 없다는 좌절감의 악순환에 빠져 있는 대신, 캘빈처럼 지금보다 훨씬 악조건의 자신을 상상해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적어도 현재의 자기 처지에 감사할 수 있을 만큼 어려웠던 과거를 떠올릴 수 있었다면, 자살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지 않았을까. 앞으로 닥칠 두려움에 대해 질식할 듯한 고통을 느끼는 대신, 힘들고 아팠던 과거의 자신을 생각하며 그보다는 나은 현재의 자신을 느낀다면 죽음으로써 고통을 피하려 하지는 않았을 게 아닌가?

    캘빈은 험난한 과거를 상상함으로써 현재의 자신에 감사함을 느끼려고 했다. 다른 사람의 몸과 마음속으로 여행하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배우가 캘빈처럼 어려움을 극복하는 상상의 여유가 없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두려움 속에 갇힌 나와 그로부터 벗어난 나 가운데 어느 쪽을 상상하느냐는 것은 생사의 갈림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대, 어떤 ‘나’를 꿈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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