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집행정지 조치로 석방됐거나 형집행정지를 신청한 정치인과 기업인들. 진승현, 권노갑, 정대철, 김운용, 권영해 씨(왼쪽부터).
“형집행정지 지침이 강화돼 검찰이 결단을 내리기 어려운 것 같다. 그러니 세브란스뿐만 아니라 권위 있는 고려대병원의 진단서를 첨부하면 아무래도 객관성과 투명성을 더 높이지 않겠느냐.”
아무리 노무현 대통령 탄생의 일등공신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보는 눈이 있기 때문에 두 병원의 진단서를 첨부해 검찰의 부담을 덜어주어야 형집행정지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지지 않겠느냐는 것. 형집행정지를 신청했다 기각당한 정 전 대표로서는 무슨 수든 써보겠다는 생각이었다.
정 전 대표가 고려대병원을 찾은 것은 주변의 조언에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는 “정 전 대표 측이 검찰과 접촉해 힌트를 얻은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지만, 서울중앙지검 공판송무부 관계자는 “그 문제와 관련, 어떠한 접촉도 한 적이 없다”고 설명했다.
대다수 범털들은 정 전 대표에 대한 검찰의 대응을 유심히 지켜본다. 이에 따라 향후 형집행정지 기상도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를 면회한 열린우리당 한 관계자는 “정 전 대표의 형집행정지를 위해 뛰는 정치인들이 많다”고 말했다. 정 전 대표 측은 검찰이 강화된 형집행정지 지침을 마련했음에도 이런 우호적인 분위기에 기대를 건다.
세계태권도연맹에서 빼돌린 공금을 외국 여행 등 개인 용도로 쓴 혐의로 2004년 1월 구속 수감된 김운용 전 의원도 요즘 형집행정지에 목매는 대표적인 범털이다. 김 전 의원의 가족이 법무부 장관에게 형집행정지를 요청하는 탄원서를 당당하게 보내 범털로서의 면모를 보였는가 하면, 청와대에 탄원서를 보내고, 5월 초에는 김 전 의원 가족이 문재인 대통령 민정수석비서관을 만나 담판을 지을 것이라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이와 관련 문재인 수석은 4월28일 전화통화에서 “김 전 의원 측과 만날 계획이 없다”고 해명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차남 김홍업 씨.
그러나 형집행정지에 대한 김 전 의원 측의 집착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 김 전 의원은 2004년 10월 구속집행정지로 일시 석방돼 병원 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 김 전 의원은 풀려나면 7월 싱가포르에서 열릴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 참석, 자신을 제명하려는 움직임을 막는 계획도 이미 세워놓은 상태.
정 전 대표나 김 전 의원이 목매는 형집행정지는 형 집행으로 인해 현저히 건강을 해치거나 생명을 보전할 수 없을 염려가 있을 때 형 집행을 일시 정지하고 석방하는 제도다. 주로 몸이 아픈 사람들이 이 제도를 통해 병원 치료를 받는 경우가 많다.
재소자들의 인권을 고려한 이 제도는 그러나 운영 과정에 문제가 많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수혜자가 주로 사회적 지위가 있거나 재력이 있는, 이른바 범털 중심으로 이뤄져왔기 때문이다. 당연히 형평성 문제를 야기했다. 2000년 이후 최근까지 정치인과 기업인 등 범털들의 형집행정지 등의 신청 건수는 줄잡아 50여명이 넘는다. 이 가운데 반 이상이 형집행정지로 교도소 문을 나섰다(표 참조).
이들 대부분은 건강을 이유로 형집행정지를 신청했다. 형집행정지 기간은 짧게는 1~2개월, 길게는 5년씩 수형자의 건강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범털들이 형집행정지를 신청하며 검찰 측에 제출한 진단서에 따르면, 범털들은 대부분 중병을 앓고 있다. 당장 병원을 가지 않으면 심각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내용도 포함된다. 2004년 1월 대선자금과 관련, 구속된 한 정치인의 진단서에는 “장기 복역할 경우 자살할 우려도 있다”는 의사 소견이 첨부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진단서 내용대로 ‘상황’이 발생한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멀쩡하게 병원생활을 하거나 등산을 하는 경우도 있다. 때문에 형집행정지라는 합법적 제도를 이용, 실질적으로 교도소를 ‘탈옥’했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권영해 전 안기부장 5년 넘게 혜택
김대중 정권 당시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진승현 게이트’의 주인공 진승현(전 MCI 코리아 부회장) 씨. 그는 2003년 5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이후 20여개월째 서울 소재 한 대학병원에서 생활하고 있다. 뇌에 종양이 있어 제거 수술을 받은 뒤 나타난 후유증 치료가 장기 입원의 배경. 그러나 30대 중반인 그와 함께 생활한 재소자들은 그의 건강 이상설에 의혹 어린 시선을 보내며 형집행정지 제도에 대한 불신감을 표한다.
그는 서울구치소 수감 시절 재소자들에게서 ‘변호사만 만나고 오면 땀을 흘리는 남자’로 통했다. 서울시내 한 대학 병원에 입원 중인 요즘도 상의는 환자복을, 하의는 운동복을 입은 모습을 곧잘 노출한다. 검찰이 그의 형집행정지를 받아들이자 재소자들은 “진승현이 나가면 서울구치소 재소자들 모두 나가야 한다”고 비아냥거렸다. 진 씨는 6월까지 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예정이다.
2000년 1월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이 공판을 위해 서울대병원을 나서고 있다(왼쪽),형집행정지 신청서와 진단서.
구치소와 교도소를 벗어나려는 범털들의 수단은 비단 형집행정지 하나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형이 확정되지 않은 범털들은 구속집행정지를 통해 감옥을 벗어나오고, 보석·가석방 등 동원 가능한 모든 수단이 등장한다. 박지원 전 대통령비서실장은 2004년 2월과 5월 등 모두 6차례에 걸쳐 구속집행정지를 신청, 지병인 녹내장을 치료했다. 손길승 전 SK그룹 회장은 형 확정 후 지난해 10월 보석됐고, 최도술 전 대통령총무비서관도 1월 가석방 대열에 합류했다. 2005년 1월 구속된 박혁규 의원(한나라당)은 의정 활동을 명분으로 당당하게 보석을 요청했고,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으로 3월 말 구속된 민주당 이정일 의원은 구속 19일 만인 4월11일 보석금 5000만원을 내고 풀려났다. 증거인멸과 도주 우려가 없다는 재판부의 결정에 따른 것. 서울 강남구 논현동 자택으로 주거(주소지)를 제한받지만 병원에 가거나 국회 상임위 활동 등이 가능하다. 법원의 허락을 받을 경우 외국 출장도 갈 수 있는 그는 범털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에 비해 세속의 권력에서 멀어진 범털들의 경우 권력무상을 절감하는 경우도 많다. 특가법상 뇌물수수 혐의로 2003년 9월 구속 기소된 뒤 지난해 8월 대법원에서 징역 5년형이 확정된 김용채 전 건설교통부 장관은 3월 중순 형집행정지를 신청했으나 기각당했다. 형집행정지에 대한 검찰의 강화된 지침에 따른 것이지만 그로서는 권불십년을 곱씹을 수밖에 없는 상황.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도 마찬가지. 76세의 고령으로 10여 가지 병을 달고 다니는 그는 ‘움직이는 병동’이란 별명을 얻은 지 오래. 김대중(DJ) 정권 시절 형집행정지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하루 수십명씩 방문객을 맞던 권력자였지만 지금은 특보역을 맡고 있는 배석영 씨 등 몇 명만이 그의 주변을 지킨다. 4월25일부터 나흘간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고 있는 권 전 고문 측은 2월 형집행정지를 신청했다가 기각당했다. 2002년 7월 특가법상 알선수재 등 혐의로 구속기소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차남 홍업 씨도 같은 처지. 2003년 9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이후 무려 다섯 번이나 형집행정지를 연장하며 특권을 누렸던 그는 3월9일 서울구치소에 재수감됐다. 남은 형기는 9개월12일. 홍업 씨가 재수감되기 전 그를 찾은 한 측근은 “조금만 참으면 사면될 것”이라고 격려했다는 후문이다.
손을 떠난 권력을 탓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야속하지만, 그렇다고 범털들이 형집행정지를 포기하는 경우는 드물다. 권 전 고문의 측근들은 지금도 형집행정지에 따른 자료 수집 및 건강을 수시로 체크하고 있다. 한 측근은 “노환은 언제 어떤 사고가 날지 모른다”며 형집행정지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였다. 다리가 불편한 박주천 전 의원(한나라당)도 기회만 닿으면 형집행정지를 통해 치료를 받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하지만 현실 여건이 따라주지 않는다.
형집행정지 상태서 사면되면 ‘최상의 시나리오’
형집행정지를 통해 병원에 입원하는 기간은 형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형집행정지 사유가 소멸될 경우 다시 수감, 남은 형기를 마쳐야 한다. 그럼에도 범털들은 죽기 살기로 형집행정지를 선호한다.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일까.
‘한보사건’으로 징역 15년을 확정 선고받았던 정태수 전 한보그룹 총회장이 그 해답을 보여준다. 그는 고혈압, 당뇨, 협심증 등을 이유로 15차례에 걸쳐 형집행정지 신청을 했다. 서울시내 웬만한 병원은 한두 번씩 드나들었다. 그 과정에서 정 전 회장은 대장암 진단서를 확보(?), 2002년 6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얼마 후 그는 대장암을 이유로 사면까지 받았다. 정 전 회장이 15년 형기 가운데 3분의 1만 마치고 풀려날 수 있었던 것은 ‘형집행정지 후 사면’이라는 고차방정식을 정확하게 풀어냈기 때문.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의 자택으로 이사, 재기를 노리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요즘 암으로 인한 고통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 씨도 비슷한 절차로 자유를 되찾았다. 97년 5월 특가법상 알선수재 등의 혐의로 구속됐던 그는 같은 해 11월3일 보석으로 풀려났다. 이후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아오다 99년 7월26일 징역 2년의 형이 확정됐지만 정부는 형 확정 19일 만인 8월15일 사면했다. 2년을 선고받고도 6월 미만의 구금생활로 죄값을 다 치른 셈. 범털들은 이 같은 절차를 통해 합법적으로 형기를 단축한다. 권영해 전 안기부장이나 홍업 씨, 진승현 씨 등이 수년 동안 형집행정지를 통해 시간을 버는 것도 이 같은 계산이 깔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권은 광복 60주년을 맞는 올해 8월15 사면을 대대적으로 준비할 계획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이후 한 번도 사면을 한 적이 없어 범털들은 어느 때보다 기대감에 차 있다. 대선자금과 관련해 수감된 한 전직 의원의 측근은 “면회 오는 여권 인사들이 8·15를 기대하라고 ‘영감’을 위로한다”고 말했다.
죄를 짓고도 합법적으로 죄값을 치르지 않을 수 있는 이런 허점 속에는 항상 비리 커넥션이 도사린다. 정태수 회장의 대장암 진단서는 검찰 수사 결과 3000만원 이상을 주고 샀다는 의혹을 받았고, 진단서를 발급했던 대학병원 관계자들은 검찰청을 드나들어야 했다. 700여일째 병원생활을 하는 진승현 씨의 진단서 발급 과정에 결정적 구실을 했던 서울구치소 의무과장은 영등포구치소에서 복역 중이다. 다른 재소자의 진단서 발급과 관련해 거액의 뇌물을 받은 것이 확인됐기 때문.
형집행정지는 몸이 아파야 가능하고, 그래서 멀쩡한 몸을 아프게 만드는 경우는 허다하다. 2004년 초 대선자금과 관련, 구속된 한 정치인의 측근은 형집행정지에 필요한 진단서를 끊어주겠다며 1억원을 요구하는 브로커를 만나기도 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현실 속에서 일반 재소자들의 인권은 제대로 지켜지기 힘들다. 이런 흐름을 파악한 검찰은 2월 말 형집행정지와 관련해 강화된 지침을 마련했다. 수술이 필요한 정도의 심각한 상황이 아니면 원칙적으로 형집행정지를 허가하지 않고, 집행정지 기간도 한 번에 최장 3개월로 제한한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