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65

2000.12.28

만화책이야 화집이야

  • 입력2005-06-13 14: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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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화책이야 화집이야
    무더운 6월, 대서양의 외딴 섬에 배 한 척이 도착한다. 폭풍우 속을 헤매다 지도에도 없는 이 작은 섬까지 떠밀려온 라울은 큰 방파제 벽에서 온갖 낙서를 발견하고 흥청거리는 마을을 상상하지만, 등대조차 폐쇄된 이 섬의 주민은 여인숙 여주인 사라와 어딘가 모자라고 난폭해 보이는 사라의 아들 단 두 사람뿐이다. 여기에 라울보다 한발 앞서 이 섬에 정박해 있는 아나가 있다.

    네 사람이 머물고 있는 섬에 이상한 긴장감이 감돌고 사라는 “배 세 척이 동시에 닻을 내리면 불길한 전조”라고 말한다. 후끈한 열기 속에 갈매기들조차 불안한 침묵을 지키던 어느 날 배 한 척이 섬에 닻을 내리고 새로운 두 남자가 나타난다. 아나에게 접근하다 실패한 두 남자는 대신 사라를 강간하고 사라진다.

    다음날 아나에게 거절을 당해 낙담했던 라울은 사라의 유혹에 넘어가 관계를 갖는다. 사라가 자신을 강간한 두 남자를 아들이 죽여 수장해버렸다고 고백하는 순간, 아나가 벌거벗은 두 사람을 발견한다. 놀란 라울은 날이 밝자 허둥지둥 배를 몰고 그 섬을 떠나지만 다시 아나를 만나기 위해 섬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죽었다던 두 남자를 발견하고 헷갈리기 시작한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서부터가 현실인가.

    마르케스나 보르헤스 소설처럼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모호한 이 작품을 만화로 그려냈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스페인 만화가 미겔란소 프라도(42)는 윤곽이 흐릿한 선과 파스텔톤 색상으로 우연과 필연 사이를 오가는 두 남녀의 관계를 묘사했다. 라울과 아나의 관계가 진전되는 듯할 때는 드가 풍의 화사한 색채로, 둘의 관계가 위기로 치달으면 로트레크의 불안하고 데카당트한 분위기로, 외딴 섬을 둘러싼 자연을 묘사할 때는 에드워드 호퍼 풍으로 화풍을 바꿔가며 색채의 마술을 선보인다.

    스페인 라코루나 출신의 프라도는 풍자적이고 정치적인 만화부터 에로틱한 작품, 동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와 화법을 구사해 왔다. ‘섬’은 그의 출세작으로 94년 앙굴렘국제만화제에서 최우수외국어작품상을 수상했다. 이번에 현실문화연구가 출판한 ‘섬’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스페인 만화다.



    만화책이야 화집이야
    프라도의 ‘섬’과 나란히 출간된 파스칼 라바테(39)의 ‘이비쿠스’도 새로운 만화예술의 경지를 보여준 걸작이다. 올해 앙굴렘국제만화제에서 최고작품상을 받은 이 만화는 수묵화를 연상시키는 흑백톤으로 1917년 러시아혁명 당시 모스크바 거리를 재현했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 빈털터리 하급 회계사무원에 불과했던 시메온이 혁명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골동품상의 돈을 빼앗아 갑자기 부자가 된다. 그 후 백작 행세를 하며 돈, 섹스, 마약, 도박, 알코올에 탐닉하는 시메온. 이 책을 번역한 이재형씨는 시메온이라는 인물을 “돈키호테를 뒤집어 놓은 것 같은 시니컬하고 기회주의적인 반영웅(Anti-hero)”이라 평했다. 어쨌든 독자들은 파멸해가는 한 인간의 운명을 쫓아가며 러시아 혁명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라바테는 93년 파리 벼룩시장에서 우연히 알렉시스 톨스토이(레온 톨스토이와는 동명이인)의 소설 ‘이비쿠스’(1926년작)를 발견하고 만화로 옮기는 작업을 시작했다. 4부작(프랑스에서도 아직 4부가 발간되지 않았다)으로 이루어진 이 만화는 풍부한 회색조의 중간톤과 흐릿한 윤곽선, 그로테스크한 인물묘사 등으로 격찬받았다.

    두 책에 앞서 출판된 엥키 빌랄의 ‘니코폴’까지 현실문화연구의 현문코믹스 시리즈는 고급만화 출판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변형 A4 판형에 하드커버로 화집 같은 만화책을 선보인 데 이어 ‘이비쿠스’는 얇은 플라스틱처럼 탄력있는 종이로 커버를 만들고 인쇄는 무광잉크를 써서 미묘한 농담 변화를 잘 살려냈다. ‘섬’은 화려한 색채감으로, ‘이비쿠스’는 담채에 아크릴 기법을 혼합한 표현주의적 화풍으로 미술전공자들 사이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으며, 앞서 나온 ‘니코폴’은 화면 각도의 특이성 때문에 예상 밖으로 영화계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끌며 고급독자 확보에 성공했다.

    ● 섬/ 미겔란소 프라도 그림/ 이재형 옮김/ 현실문화연구 펴냄/ 89쪽/ 1만5000원

    ● 이비쿠스/ 파스칼 라바테 그림/ 이재형 옮김/ 현실문화연구 펴냄/ 137쪽/ 1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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