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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동아 칼럼

고향 친구의 손목시계

고향 친구의 손목시계

고향 친구의 손목시계
오랜 고향 친구가 ‘사람’이라는 담담한 제목을 붙인 산문집 한 권을 부쳐 왔다. 내가 소설을 쓰기 훨씬 이전부터 작가가 되기 위해 글공부를 하던 친구였다.

그의 글을 읽어 내려가다가 나는 몇 번이나 책장을 덮곤 했다. 놀라움 때문이었다. 그와 나는 교육대학 2년을, 그것도 학보사 기자로 함께 보낸 사이였다. 그랬으면서도, 나는 그가 그렇게 힘든 청소년기를 보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는 데 대한 놀라움이었다.

글의 행간마다 묻어 있는 가난. 그가 그때 그렇게 가난했다니! 나는 정말로 그것을 몰랐던 것이다. 그 시절에 누군들 가난하지 않았을까만… 나는 그에게서 그런 가난의 물살에 흔들리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내 기억 속에 잠겨 있는 젊은 날의 그는 언제나 지나치게 낙천적이었다. 무엇에도 조바심하지 않는 여유 있는 모습 그것이었다. 그는 친구와 선배들에게 늘 넉넉했고, 늘 베푸는 쪽이었다.

가난으로 쓰라렸던 그의 그 무렵 이야기를 읽으며 내가 가장 가슴아프게 떠올린 것은 그의 손목시계였다.

손목시계.



당시의 대학 앞 술집에서 손목시계는 가장 믿을 만한 신용카드였다. 그 무렵 우리에게 손목시계는 거의 유일한 재산이었다. 나는 바로 그의 그 소중한 손목시계를 제일 많이 술집에 잡혀먹은 나쁜 친구가 아니었던가. 그의 손목에 걸려 있는 스테인리스 시곗줄만 보여도 “아 오늘은 한잔 할 수 있는 날이구나” 했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결국은 그의 시계를 손목이 아닌 술집에서 잠자게 한 것도 바로 나였다.

뒤늦게 그의 글을 읽으며 깨닫게 되는 것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는 결코 자신의 가난을 숨기려 하지 않았었다. 가난에 함몰되지 않은 청년시절을 보냈을 뿐이었다. 그만큼 그는 늘 무엇인가를 꿈꾸고 있었지만 그러나 한번도 허황되지 않았던 것이다. 지난해 추석 고향에서 그를 만났을 때였다. 글을 쓰기 위해, 평생의 꿈이던 전업작가로서의 꿈을 이루기 위해 그는 30여년 몸담아온 교직을 떠났다고 했다. 그런 소식과 함께 그가 들려준 말이 고향을 떠나오는 내 가슴에 또 축축하게 남았다.

아버지의 수입으로는 형제들의 학비를 대기가 어렵다는 것을 헤아린 막내딸아이가, 자신의 뜻과 꿈을 이룰 수 있는 진로를 찾아 사관학교에 지원했다는 것이었다. 그 아버지에 그 딸이구나 싶었다. 친구는 이 딸을 위해 체력단련 훈련까지 함께 했다고 했다.

서울로 돌아온 후 나는 그 딸의 합격 여부를 묻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토록 영민한 딸아이를 사관학교가 안 뽑으면 그건 사관학교의 손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아이가 사관학교를 가지 않고 훗날 다른 직장을 가진다면 적어도 그 아이의 품성으로 볼 때 그 직장의 보배로운 존재가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관학교를 지망하는 막내딸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이 견뎌야 했던 쓰라림을 친구는 숨기려 하지 않았다.

추석을 맞으며 어쩔 수 없이 ‘고향’의 의미를 떠올린다. 고향이라는 것이 가지는 어떤 원형질, 이제 그것을 찾아야 할 곳은 지나간 시간을 묻힌 채 살아가고 있는 고향 사람일지도 모른다.

나이 탓인가. 명절이 돌아올 때면 간절하게 그리워지는 것은 고향 친구들이다. 산도 강도 마을길도 반추할 추억 따위를 찾아볼 길 없이 변해버렸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사람만이, 친구라는 이름의 그들만이 가장 진솔하게 ‘우리들의 어제’를 담고 살아가고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50을 넘기며 바라보는 친구들의 모습이란 경쟁의 대상이 아니다. 서로가 자신이 살아온 길을 나름대로 아름답게 가꾸고 있으면 자랑스러울 뿐이다. 내 생을 그들에게 비춰보면서 ‘안심’하거나 ‘분발’하던 나이도 이제 넘어섰다.

고향 친구는 요즈음 어떤 손목시계를 차고 있을까. 이번 한가위 고향길에선 그 친구의 손목을 잡고 어제로 떠나보고 싶다. 가난하나 꿈으로 들끓던 그 시절로.



주간동아 2000.09.14 251호 (p190~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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