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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삶

망치 대신 붓 잡은 ‘새만금 지킴이’

목수 경력의 현장미술가 최병수씨, 전북 부안서 ‘밑 빠진 새만금’ 전시회 준비 한창

망치 대신 붓 잡은 ‘새만금 지킴이’

망치 대신 붓 잡은 ‘새만금 지킴이’
●60년 서울 상도동에서 8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나 상도초등학교를 거쳐 한광산업 전수학교에 다니다 중퇴

●신문팔이, 중국집 배달원, 선반보조공, 보일러공, 목수직을 전전하다 86년 ‘정릉 벽화 사건’에 연루되어 화가로 전업

●87년 6월 시민항쟁 당시 대형 걸개그립 ‘한열이를 살려내라’ 제작

●87년 환경운동연합 문화예술 기획위원 역임

●‘반전반핵도’(88년) ‘쓰레기들’(92년) 등의 작품이 ‘타임’지 등 세계 각국의 언론매체에 소개됨



●현재 전북 부안에서 새만금 갯벌을 살리기 위한 조형물 제작과 11월 헤이그에서 열리는 환경회의에 전시할 작품 구상 중.

도시의 붙볕더위를 피해 바다로 산으로 떠나는 사람들로 고속도로는 이른 아침부터 꽉꽉 막혀 있었다. 평소 같으면 서울에서 차로 4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곳을 그날은 7시간이나 걸려 도착했다.

전라북도 부안군 하서면. 한낮의 태양은 여지없이 뜨거웠지만, 서울의 빌딩숲에서 느꼈던 인정사정없는 더위는 아니었다. 짙푸른 산과 물,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과 어우러져 모든 생명을 키우고 단련시키는 속정 깊은 어머니의 얼굴을 한 태양 아래서는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도 그리 싫진 않았다.

오토바이를 탄 그가 마중을 나왔다. 밀짚모자를 쓴, 검게 그을은 얼굴의 그는 우릴 보고 활짝 웃는 것으로 첫인사를 건넸다. 반바지 아래로 드러난 다리까지 온통 검게 그을은 모습이 방금 밭에서 나온 농부 같다. 그러나 그는 농부가 아닌 화가다.

‘현장미술가’ 최병수씨(41). 그는 4월부터 이곳에 내려와 살고 있다. 지난 3월26일 부안의 해창마을 앞 갯벌에서 새만금 간척사업을 반대하는 장승제가 열렸는데, 최씨는 이때 환경단체들의 부름을 받고 내려와 1주일 동안 밤을 새워 장승을 만들었다. 이렇게 만든 70여개의 장승들은 갯벌을 보호해달라는 사람들의 염원을 담고 지금도 잿빛 갯벌 위에 우뚝 서 있다.

“6년 전쯤 우연히 이곳을 지나다가 산을 깎아 갯벌을 메우고 있는 공사현장을 봤습니다. 커다란 덤프트럭들이 돌을 가득 싣고 오가는데, 그 아름답던 산들이 흉하게 파헤쳐지고 바닷물도 시커멓게 죽어가고 있더군요. 그걸 보고 어찌나 화가 나던지, ‘왜 덤프트럭 운전기사 중에는 양심선언하는 사람이 없을까’ 생각했어요. 그 새만금을 지키려는 행사라기에 두말없이 뛰어왔죠.”

행사가 끝나고 모두 돌아갔지만 그는 혼자 이곳에 남았다. 멀리서 애만 태우느니 스스로 ‘새만금 지킴이’가 되기로 결심한 것. 부안 사람들이 간척사업으로 문을 닫게 된 김공장을 작업실로 내줘 그곳으로 일터를 옮겼다. ‘평지수산에서 그림 그리는 사람’ 하면 다 알 정도로 그는 이곳에서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의 작업실에 들어가면서 보니, 앞마당에 크고 작은 수십 개의 항아리가 도열해 있다. 자세히 보니, 대부분 밑동이 깨진 ‘밑 빠진 독’이다. “불교에서 ‘백팔번뇌’라는 말을 하잖아요. 108개의 독을 깨서 ‘밑 빠진 새만금’이란 주제로 가을에 절 마당에 전시할 계획이에요. 이 항아리들 꽤 비싸요. 주민들이 싸게 넘겨줘서 사 모으고 있는데, 아직 다 못 샀어요(웃음).”

내부로 들어서니 화가의 작업실이라기보다 목수의 작업장에 더 가깝다. 어지럽게 널려 있는 목재 비품들과 선반에 가득한 각종 연장들, 직접 켜고 다듬어 만든 듯한 책장 탁자 의자 등이 그의 타고난 손재주를 그대로 보여준다. 안쪽으로 들어가니 또 하나의 방이 나온다. 그곳에 들어서자 갑자기 커다란 그림들이 눈앞으로 다가온다. 남북을 가르는 철조망 위로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의 모습을 그린 ‘철새’ ‘백두산’ ‘최후의 만찬’ 등 모두 그가 그린 걸개그림들이다.

단순하지만 사실적이고 강렬한 메시지, 캔버스에 그려진 ‘얌전한’ 그림들과 달리 사람의 눈과 가슴을 치는 선전-선동성. 그렇다. 그는 ‘한열이를 살려내라’(87년)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걸개그림 작가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보기 위해 전시회장을 갈 필요는 없었다. 그의 그림은 외침이 있는 거리 곳곳에 걸렸고, 사람들이 가만히 있어도 그의 그림이 먼저 다가갔다.

“초등학교 졸업하고 중학교 다니다 가출해 별별 일을 다 하면서도 화가가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 어릴 때부터 손으로 뭘 만드는 건 곧잘 했어요. 주머니에서 칼이 떠나질 않았죠. 산수공책에 만화 그리고, 선생님 분필 훔쳐 장승 깎다가 혼난 기억이 있어요.”

그는 8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중학교에 다니던 중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집도 학교도 모두 싫었다. 무작정 집을 나와 신문팔이를 시작으로 중국집 배달원, 선반보조공, 공사판 막노동꾼, 보일러공, 용접공, 레스토랑 웨이터를 거쳐 목수일을 하고 있던 86년, 그의 인생을 바꿔놓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른바 ‘정릉 벽화사건’.

그해 홍익대 미대 출신 화가 4명이 정릉의 한 담벼락에 벽화작업을 하고 있었다. 분단을 상징하는 ‘상생도’를 그리는 일이었다. 화가 한명과 친분이 있던 그는 그곳에 받침대를 짜주러 갔다. 화가들이 밑그림으로 진달래를 그리고 있었다. 그가 “왜 진달래만 그리느냐, 개나리도 봄에 피는 꽃인데…”라고 묻자 사람들은 “그리고 싶으면 네가 그려라”고 했다. 색을 써서 그림을 그린다는 건 초등학교 때 스케치북에 크레파스로 그려본 게 다였지만,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 싶어 신나게 개나리를 그렸다.

이 벽화는 당국의 주목을 받았고, 그는 다른 화가들과 함께 성북경찰서로 연행됐다. 형사가 물었다. “당신 어디 출신이야?” ‘목수’라는 대답에 어리둥절해하던 형사들은 그를 ‘수상한 자’로 지목했다. 미대 출신도 아니고 중학교 중퇴 학력의 목수가 운동권 화가들과 어울려 그림을 그렸다는 점 때문에 ‘진짜 빨갱이’로 의심받았다. 그가 모든 이력을 털어놓자 난감해진 쪽은 오히려 형사들이었다. “그림 그리다 잡혀왔으니 ‘목수’는 안 되고 ‘화가’라고 해야 한다”며 조서에 그의 직업을 ‘화가’라고 기록했다. 그가 풀려났을 때 친구들은 ‘경찰이 인정한 화가’라는 뜻으로 ‘관제화가’라는 별명을 붙였다. 이 일을 겪으면서 그는 “사회적 모순에 눈뜨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말’지와 ‘전태일 평전’ 등을 보면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했고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저 소박하게 돈이나 좀 모아 장가가서 잘 먹고 잘사는 게 꿈이었는데, 이렇게 모순된 사회구조 속에서는 그것조차도 안 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길에서 주운 끌로 여자 누드조각이나 깎던 그의 손에 붓과 연장이 쥐어지고, 그때부터 ‘철새’ ‘산 자여’ ‘분단인’ 등 민중과 통일을 주제로 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평론가들이 찾아와 “어느 대학 나왔느냐”고 물을 때 ‘목수 출신’이라고 답하면 그들은 하나같이 “박노해 같구먼” 했다. 그가 백두산을 그리면 ‘주사파’라고 했고, 노동해방도를 그리면 ‘PD계열’로 몰아붙였다. 그러나 그는 “집회의 성격에 맞는 그림을 그릴 뿐”이었다.

87년 6월 당시의 작품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우리나라 걸개그림의 효시로 인정되어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80년대 후반의 걸개그림 현장에는 어김없이 그가 있었다. 대중집회 날짜가 잡히면 그는 천을 떠와 학교 운동장이나 건물 옥상에 펼쳐놓고 며칠이고 그림을 그렸다. 현장에서 구조물을 설치하고 그림을 매다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암울했던 시대 상황은 이렇게 한 막노동꾼을 화가로 바꾸어 놓았다.

사회가 변하면서 그의 생활도 바뀌었다. 거리에서만 볼 수 있던 그의 작품이 세종문화회관이나 국립현대미술관 같은 공간에 전시되었고, 92년에는 인사동 화랑에서 첫 개인전도 가졌다. 그림의 주제는 핵, 쓰레기 같은 환경문제로 바뀌었다. 87년부터 환경단체들과 일하면서 환경운동연합 문화예술기획위원도 지냈다. 88년 히로시마 ‘원폭평화대회’에 걸린 ‘반전반핵도’, 92년 리우환경회의에서 전시된 ‘쓰레기들’, 96년 지구의 날 행사에 선보인 ‘깡통맨, 야쿠르트 걸’, 반달곰 살리기 운동집회에 등장한 ‘곰인형과 덫’이 모두 그의 작품이다.

“제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고 싶다는 소망 때문입니다. 개발논리에 빠져 환경을 파괴하고 인간의 행복을 빼앗아가는 행위에 그림으로 대항하는 것이죠. 제가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가서 그림을 그릴 겁니다.”

쉽지 않았던 그동안의 세월을 말해주듯 그의 손은 상처투성이로 거칠기 이를 데 없다. 대학 출신의 평론가와 꽤 오랫동안 연애도 했지만 결혼에는 이르지 못했고 아직 혼잣몸이다. 언뜻 그의 모습에서 외로움이 묻어나긴 했지만, 깊은 사랑의 상처도 그의 ‘일하는 손’을 멈추게 하지 못했다. 그의 손이 움직이는 한 새만금 갯벌도 맥없이 사라지지는 않을것 같았다.



주간동아 2000.08.17 247호 (p7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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