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81

..

죽어서까지 군대 보초 세웠나

  • 김두규/ 우석대 교수 dgkim@core.woosuk.ac.kr

    입력2003-04-23 15:19: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죽어서까지 군대 보초 세웠나

    전설적인 명풍수 두사충의 무덤(오른쪽)과 무덤 입구에 있는 모명재.

    조선시대 명풍수로서 숱한 전설을 남긴 이 가운데 두사충(杜師忠)이란 인물이 있다. 그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돕기 위해 중국에서 온 섭정국, 시문용, 이문통 등과 같은 풍수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들은 모두 지리에 밝아 명나라 군대의 ‘진지와 병영 위치 선정(屯軍置營)’ 참모로 활동하다가 더러는 귀국하고, 더러는 조선에 눌러앉았다. 이들로 인해 조선 중기 이후 한반도 풍수, 특히 묘지 풍수 양식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두사충은 생전에 경기 양평에 있는 한학사대가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조부묘를 감평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또 그는 당시 조선 사대부들의 무덤을 정하는 데 관여했기 때문에 그 전설이 아직까지도 전해오고 있으며, 그가 잡지 않은 자리까지도 ‘두사충이 소점한 자리’라고 전해지는 곳이 많다.

    두사충은 당나라 시인 두보의 21대 후손이었다(두사충의 11대 후손인 고 두재규 선생이 증언했다). 그는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의 처남으로, 복야(僕射·중국 당·송시대의 재상)로서 진린을 따라 조선에 왔다. 수군이었던 진린 도독이 이순신 장군과 자주 만났는데 이때 두사충도 이순신 장군과 친교를 맺었다. 이순신 장군이 두사충에게 준 ‘봉정두복야(奉呈杜僕射)’라는 시가 아직까지 전해진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귀국했던 두사충은 정유재란(1597)이 발발하자 다시 조선에 온다. 이때 그는 조선에 가지 않겠다는 부인을 혼자 중국에 남겨두고 두 아들만을 데리고 오는데, 그것으로 영영 부인과는 이별하고 말았다. 정유재란이 끝나고 진린 도독이 귀국하려 하자 두사충은 “도독은 황제의 명을 받은 사람이니 되돌아가야겠지만 나는 이곳에 남겠다”며 작별인사를 했다. 이미 명나라가 망할 것을 예측했기 때문이다.

    그 후 그가 대구에 정착해 ‘고국 명나라를 잊지 않고 섬긴다’는 뜻에서 ‘대명(大明)’이란 지명을 붙이고 살았는데 그곳이 바로 현재의 ‘대명동’이다. ‘대명동’이란 지명은 경북 성주군 용암면에도 있는데 이 역시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들어와 귀화한 풍수 시문용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붙인 지명이다. 시문용은 광해군 당시 실세 정인홍의 추천으로 한양에 올라가 궁궐터 소점에 관여한 풍수로 유명하다.



    대구에서 살다가 죽은 두사충은 만촌동(대구 남부 시외버스 터미널 뒤)에 묻힌다. 그곳은 그가 살아 있을 때 잡아놓은 자리로 지금까지 그대로 전한다. 두사충의 후손들은 현재 전국에 약 100여 가족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직계후손이 두사충 묘 입구에 있는 사당 ‘모명재(慕明齋)’를 지키며 살고 있다. 모명재 역시 고국 ‘명나라를 그리워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두사충의 묘는 당시 중국 풍수들의 터 잡기 양식을 엿볼 수 있는 곳으로서 현재 술사들이 선호하는 혈장(穴場·유골이 안치되는 일정한 곳으로서 혈을 이루며 특정한 형태를 갖춘다)을 찾기는 어렵다. 그 대신 주변 산들이 편안하면서도 위엄 있게 이곳을 감싸고 있다.

    특이한 점은 두사충 무덤 주변에 국가정보원 지부와 2군사령부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후손 두재규씨는 “살아 있을 때도 군대 속에서 살았는데 죽어서까지 군사들을 보초 세울 정도로 땅을 보는 안목이 뛰어났다”고 말했다. 풍수에서는 “사람은 자기 세계관에 맞는 땅을 찾아 들어간다”고 말한다. 두사충의 세계관과 당시의 풍수 양식을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실전 풍수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