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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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사람들이 세상을 바꾼다

소시민 7인의 아름다운 세상 만들기 … “안 될 거야 생각하지 마세요, 하니까 되더라고요”

  • <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外

    입력2004-11-02 14: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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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자신의 병원을 의료생협에 출자하고 스스로 월급쟁이가 된 의사, 중학생들 입에서 ”학교 가는 게 재미있다”는 말이 튀어나오게 한 도덕 선생님, 사이버 농장을 구축한 벤처 농부들, 국내 최초의 소액주주 대표로 사외이사가 된 전직 회사원, 지역 교육운동의 싹을 틔운 주부, 가뭄 극복방안을 마련한 공무원들, 어린이책의 개념을 바꾼 출판사 사장, '주간동아'가 만난 7명의 보통 사람들이 가꿔가는 세상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새해부터 '주간동아'는 작은 실천으로 세상을 바꿔 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발굴, 소개하려 한다. <편집자> >>
    보통사람들이 세상을 바꾼다
    새안산의원 이재광 원장

    “환자가 주인인데 소홀히 할 수 있나요”

    경기도 안산시 월피동 새안산의원. 이곳은 말이 병원이지 월피동과 인근 아파트 주민들의 ‘사랑방’이나 다름없다. 이곳 의사는 환자보다 말을 많이 하면서도 환자의 눈치를 본다. 이 병원 이재광 원장(38)은 네모나고 커다란 안경에 모나지 않은 얼굴로, 마치 복덕방 아저씨 같은 다정다감함으로 환자들의 긴장감을 풀어준다. 새안산의원은 개원한 지 1년6개월 만에 ‘인심 좋은 병원’으로 소문나 늘 환자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새안산의원에 환자가 몰리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중 가장 큰 것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원장의 고객만족 서비스다. 늦게 귀가하는 주민을 위해 평일은 밤 9시까지 진료하고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에도 병원 문을 열어놓는다. 또한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을 위해 매주 한 번씩 왕진도 나간다. 그뿐인가. 지역 주민들을 불러 건강 강좌를 열고, 환자들의 동정과 건강상식을 담은 소식지도 발간한다. 최근에는 주민 스스로 자신의 건강을 돌볼 수 있도록 매주 1회 보건학교를 열어 여기서 배출한 졸업생들이 직접 봉사활동에 나서게 했다.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돈 벌기에 혈안이 된 개인의원 원장의 ‘호기’로 오해하기 십상이지만 새안산의원은 사실 이원장의 소유가 아니다. 이 의원의 주인은 무려 720여명. 안산시 지역 주민들이 몇 만원씩 출자해 만든 안산의료생활협동조합 부설 의료기관인 것이다.



    그에게 “자기 병원도 아닌데 힘들거나 억울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매번 똑같은 대답이 돌아온다. “환자가 돈 벌어주는 기계처럼 보이지 않아 요즘 의사 노릇 할 맛이 절로 난다”고. 그는 “의사생활 10여년 동안 지금처럼 마음 편한 적은 없었다”고 말한다. 그만큼 개인의원을 하면서 느낀 부담감이 컸다는 증거다.

    “환자들이 병원의 주인이니까 오래 상담해도 간섭할 사람 없어 좋고, 필요 없는 약을 더 쓰거나 검사 더 해 매출을 뻥튀기할 필요도 없죠. 환자들은 자신의 상태에 대해 오래 설명을 들으니 속이 시원하죠. 무엇보다 환자들이 나를 믿어주는 게 너무 기쁩니다.”

    이원장은 새안산의원의 주인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지난 99년 12월 자신이 운영하던 개인의원의 문을 닫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의료기구와 시설을 조합에 전액 현물 출자했다. 전 재산을 털어 월급쟁이 의사가 되기를 자처한 것. 그래도 그는 “세금 제하고 400만원이 넘는 월급은 적지 않은 액수”라며 “조합이 잘되면 월급도 올라가지 않겠느냐”고 웃어 보인다.

    “마음 편히 의사 노릇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 보니 환자가 주인이 되는 의료생협이라는 게 있더군요. 그래서 뛰어들었죠.” 개인의원을 그만둔 그는 2000년 1월부터 안산의료생협 준비위원으로 조합원 모집에 나서 7개월 만에 조합원 400여명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의약분업 이후 의료계 전면파업 당시 저는 진료를 계속했어요. 후배들이 찾아와 욕하더군요. 그래서 이 병원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주민이다, 주인이 문닫지 말라는데 어떻게 하느냐 했더니 머쓱해서 그냥 돌아갔지요.”

    지금 안산에선 한 의사의 외로운 도전이 의약분업 이후 사라진 의사와 환자 간의 신뢰를 부활시키며 변화의 싹을 틔우고 있다.

    <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보통사람들이 세상을 바꾼다
    장승중학교 안승문 교사

    ‘학교 바꾸기‘ 실험은 계속된다

    올해 서울 동작구 장승중학교 3학년 8개 학급은 책걸상을 모두 교체했다. 다리 뻗기도 불편할 만큼 낮은 책상, 조금만 앉아 있어도 좀이 쑤시는 딱딱한 의자 대신, 높낮이 조절이 가능한 책상과 등을 편안히 받쳐주는 첨단공학 의자가 생겼다. 장승중학교의 또 다른 자랑은 화장실. 고급 레스토랑에서나 볼 수 있는 꽃과 그림이 있고, 심지어 변기 옆에는 예민한 여학생들을 위해 물소리가 흐르는 에티켓 벨까지 갖춰졌다.

    도대체 이 평범한 산동네 공립학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지난해 장승중학교 교사들은 다른 예산에서 조금씩 절약해 1700만원을 마련하고 매년 한 학년씩 책걸상을 교체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일부 교사들이 반대했다. 아이들이 칼로 긋거나 낙서하면 수리 비용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때 안승문 교사(41·도덕)가 나섰다.

    “좋은 책상과 의자를 갖게 되는 일과 그에 따른 책임까지 아이들 스스로 결정하도록 기다립시다. 만약 파손되면 어떻게 해결할지도 아이들에게 답이 있을 겁니다.”

    첫 수혜자가 된 3학년 학생들은 당장 학급회의를 열어 책상과 걸상마다 자신의 이름을 붙이고 후배들에게 물려줄 때까지 잘 관리하겠다는 다짐의 서명까지 했다. 그러나 얼마 후 심하게 훼손된 책상과 의자가 발견되었다. 다시 학급회의가 열렸다. 아이들이 결정한 벌칙은 “훼손한 학생에게 예전에 쓰던 낡은 책걸상을 다시 쓰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 후 1년 가까이 아이들은 스스로 만든 약속을 잘 지켜냈다.

    안교사는 서울대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83년 교직에 들어섰다. 그러나 전교조 활동으로 89년 해직되자 4년 동안 학교 밖에서 학교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기회가 생겼다. 94년 복직하자 그는 교사와 학생, 학부모가 참여하는 교육개혁운동을 구상했다. 98년 장승중학교에 부임하면서 그런 구상을 하나둘 실천하기 시작했다.

    첫 결실은 학생 스스로 만들고 지키는 교칙이었다. 99년 학생회장의 선거공약이 두발 자율화였던 것을 계기로 자율의 한계를 어디에 둘 것인지 학생들이 직접 정하도록 했다. 대의원회가 열리고 교사와 학생이 함께 설문지를 만들어 학생, 학부모, 교사들의 의견을 구했다. 윗머리 1cm, 앞머리 3cm로 엄격했던 남학생 머리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단정한 형태’로 바뀌었고, 단발이나 커트로 제한했던 여학생의 머리는 ‘어깨 아래까지 기를 경우 묶는다’는 규정으로 바뀌었다. 단 무스, 젤, 스프레이, 염색은 하지 않는 것으로 정했다.

    한 가지 더. 안교사의 도덕 수업은 조금 특별하다. 형식적으로 진행하는 수행평가가 아니라 진짜 수행평가를 한다.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리포트가 50점, 교실 내에서 학생들끼리 하는 인격평가가 20점, 그리고 부모가 자녀를 평가하는 부모평가가 30점이다. 모두 학원이 대신해 줄 수 없는 과제들이다. 학생평가는 학급 내에서 관계 맺음을 교육하는 것으로 괴롭힘, 따돌림, 욕설, 규칙위반 등을 줄이는 데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부모평가는 학생이 집에서 설거지나 방 청소 등 가족의 일원으로서 최소한의 역할을 하는지 부모가 점수를 매기는 것이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실제보다 후한 점수를 주기도 하지만 대부분 아주 냉정하게 점수를 주는 것을 보고 안교사도 놀랐다고 한다.

    처음에는 이런 변화에 어리둥절하던 학부모들이 요즘은 “아이가 학교 가는 게 재미있다고 말한다”며 학교편이 되었다. 장승중학교 졸업생들은 이제 고등학교도 달라져야 한다고 말한다. 다른 학교로 부임한 교사들은 장승중학교의 실험이 어떻게 성공했는지 전파한다. 안교사가 피워낸 변화의 불씨는 작지만 강했다.

    <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보통사람들이 세상을 바꾼다
    사이버팜 만든 벤처 농부들

    ‘인터넷 영농’으로 부농 꿈 무럭무럭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에서 쌀농사를 하는 홍승욱씨, 포도농사를 하는 이진규씨, 고추농사를 하는 박종하씨, 배농사를 하는 박주순씨 등 4명은 몇 년 전까지 평범한 농부였다. 그러나 컴퓨터를 배우고 인터넷을 이용하면서 명실공히 ‘벤처 농업인’이 되었다. 이들이 함께 힘을 모아 만든 인터넷 사이트 ‘사이버팜’(www.eCyberfarm.com)은 농업분야의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라 할 만하다. 기존의 주말농장 개념을 인터넷상에 옮겨온 이 사이트는 농민과 도시 소비자를 직접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고, 농작물을 재배하는 어려움과 수확의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게 만들었다. 사이버팜을 통하면 누구나 농장 일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씨 뿌리기에서 추수까지 전 과정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만든 이메일로 받아볼 수 있고, 주말이면 자녀들을 데리고 직접 농장을 찾아 농사 체험도 할 수 있다. 수확한 농산물은 다달이 가정으로 배달된다.

    “1년 단위로 임대분양 받는 방식으로 내 땅이 생기는 거지요. 분양받은 사람은 농장주가 되고 우린 농장지기가 되는 겁니다. 단순히 농작물을 사고파는 개념이 아니라, 신뢰를 바탕으로 인간적인 관계를 맺어 일반 시장 물건과 다른, 확실하고 믿을 수 있는 농산물을 제공하는 것이 관건입니다.”(박주순)

    이들은 사이버팜 모델 개발에 앞서 2년간 컴퓨터 교육을 받았다. 처음엔 마우스도 제대로 잡지 못했지만, 어느 순간 자신감이 생기면서 “이것으로 뭔가 해보자”고 의기투합했다.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다 선진국의 그림 같은 농촌을 꿈꾸며 다시 농촌으로 돌아왔지만 20년이 지나도 농촌환경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요. 결국 남보다 앞서가는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고민하고 노력하는 수밖에요.”(홍승욱)

    이 사이트는 1월에 정식으로 문을 연다.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낯선 세상에 들어가는 기분”이라고 말하지만, 이들의 얼굴에선 의욕과 자신감이 넘친다. 앞으로 주 5일 근무제가 도입되면 주말을 적극적으로 설계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고, 디지털과 레저를 결합한 이런 모델이 인기를 끌지 않겠느냐고.

    “회원들이 와서 쉬고 갈 수 있는 공간도 만들고 인근의 여행지와 연계해 상품화하는 방안도 연구하고 있습니다. 발렌타인데이에 초콜릿을 선물하는 것처럼, 견우 직녀가 만나는 칠월칠석날에 연인에게 포도나무를 분양해 주는 이벤트를 만드는 것도 좋을 거라고 생각해요.”(박종하)

    1차 산업인 농업에 인터넷과 문화를 접목시켜 가치와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농부들에게서 농촌의 밝은 미래를 본다.

    < 신을진 기자 >happyend@donga.com

    보통사람들이 세상을 바꾼다
    대우전자 소액주주 사외이사 임용재씨

    ”개미군단의 매운맛 보여줬죠”

    “어떡하면 좋죠? 우리는 세상을 바꾸려고 나선 건 아니었는데….” 거창한 사회의식 때문이 아니라 그저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고 있을 뿐이라고 담담히 말하는 이 사람은 대우전자소액주주운동본부의 임용재 대표(44). 대우전자 본사가 빤히 건너다 보이는 서울 도화동 오피스텔의 운동본부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임대표는 지난 3월 소액주주 대표로서 대우전자 사외이사로 정식 등재돼 주목받았다.

    “처음에는 분노로 시작했죠. 뼈빠지게 일해 번 돈으로 투자한 주식이 날아가게 생겼으니까요.”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한 그는 기아자동차와 대우자동차 연구소를 거치며 신차 개발을 담당하는 연구원으로 일했다. 기업회계나 운영은 ‘남의 일’이라고 믿은 전형적인 엔지니어였다. “중동의 사막과 시베리아를 오가며 성능 테스트를 담당했습니다. 집안일은 신경 쓸 새도 없이 미친 듯이 출장 다녔죠.”

    그렇게 번 ‘피 같은 돈’으로 98년 대우전자 주식을 샀다. 흑자라고 기록된 재무제표와 장밋빛 사업 전망을 믿고 선뜻 내린 결정이었다. “그런데 그게 날조였다는 겁니다. 피가 거꾸로 솟았죠.” 99년 6000~7000원을 달린 주가는 분식회계가 문제 되면서 하루아침에 500원대로 추락했다. 소액주주들이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한 것도 이때. 십시일반 돈을 추렴해 사무실을 구하고 운영위원도 뽑아 운동본부를 만들었다. 불길이 댕기자 반응은 뜨겁게 타올랐다. 퇴직금과 주택자금을 날린 주주들로부터 위임받은 소액주주 지분만 4500만주. 채권단 지분을 제외하면 전체 주식의 70%에 육박하는 엄청난 양이다.

    “회사로서는 눈엣가시였겠죠. 문전박대도 많이 당했고요. 그렇지만 이제는 사장도 수시로 만날 수 있을 정도가 됐습니다.” 처음 운동본부에서 사외이사를 내겠다고 했을 때 펄쩍 뛴 회사가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 역시 엄청난 주식 지분 때문. 밀실 결정과 전횡의 상징이었던 대우전자 이사회는, 이제 채권단 관계자가 “대한민국에 이만큼 투명한 이사회는 없다”고 할 만큼 확 달라졌다.

    새해에는 우선 분식회계에 대한 손해배상소송에 주력할 생각이다. 법에 어긋난 경영으로 주주들에게 손해를 입혔다면 당연히 배상해야 한다는 취지. 논의중인 해외 매각이 제대로 이뤄지는지 감시하는 것도 큰 과제다. 그러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소액주주의 권한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법률개정운동.

    “변하긴 변했습니다. 사회적 이슈로 부각하는 데도 성공했고요. 하지만 제도나 시스템은 바라는 만큼 빨리 변하지 못하더군요. 명분이 옳아도 힘있는 이들이 갖고 있는 권한을 되찾아오는 일은 만만치 않으니까요.”

    < 황일도 기자 >shamora@donga.com

    보통사람들이 세상을 바꾼다
    교육운동가 김정명신씨

    ”부모이기심 버려야 교육개혁 성공”

    갑자기 어려워진 수능시험 때문에 한바탕 소동을 치르고, 그럭저럭 아이의 점수에 맞춰 ‘가나다’ 군에서 한 학교씩 골라 원서 쓰고 논술고사까지 치른 지금, 수험생 학부모 김정명신씨(45)의 입에서 저절로 이런 말이 나온다. “우리나라 교육운동은 고3 부모 노릇까지 해봐야 할 수 있어요.”

    그는 ‘수험생 엄마’로서 자신의 모습은 교육운동가라는 직함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부끄러워했다. 고2 겨울방학이 되어 다급해진 아들이 학원에 가겠다고 했을 때 그것을 막지 못했고, 대학입학 원서를 쓰면서 남들처럼 점수에 맞춰 눈치작전도 펼쳤다. 그러나 지금의 사교육 열풍이 ‘광기’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최신 수험정보에 달통한 비싼 과외선생을 ‘새 지도’, 그렇지 못한 선생을 ‘헌 지도’에 비유하는 그는, 내 자식만큼은 새 지도를 들고 누구보다 빨리 목적지에 도달하게 만들려는 부모들이 이기심을 버리지 않는 한 교육개혁은 늘 제자리걸음이라고 강조한다. 따라서 입시제도의 개선도 필요하지만 학부모 한 명 한 명의 마음을 바꾸는 일을 누군가는 해야 한다는 것.

    김정씨의 교육운동 경력은 11년. 90년 아들 동원이(고3)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인간교육실현 학부모연대’에 참여한 것이 시작이었다. 98년에는 17개 교육시민운동단체들이 연합한 ‘교육개혁시민운동연대’의 사무국장을 맡아 굵직한 교육 현안에 대한 성명서 작성을 도맡아 했다. 그러나 98년 교원정년 단축 문제를 놓고 교원단체와 학부모단체가 갈등을 빚자 한때 교육운동에 대한 회의에 빠지기도 했다.

    “꼼짝도 하지 않는 정부를 향해 제도와 정책을 바꾸라고 외칠 게 아니라 교육의 최전선인 지역으로 돌아가 개혁의 씨를 뿌리는 작업부터 다시 해보자는 생각을 했어요.” 이렇게 해서 99년 4월 서초강남교육시민모임이 결성되었다. NGO(비정부기구)의 불모지라는 강남에서 최초로 생긴 지역 시민 모임이었다.

    “모임에서 매년 온 가족이 참여하는 ‘양재천 탐사 체험교육’을 하고 있는데 반응이 좋아요. 양재천 상류부터 하류까지 수중·수서 생물을 관찰하고 환경오염 실태도 살펴보는 것이죠. 이처럼 교육운동과 무관해 보이는 프로그램으로 출발해 차츰 학교운영위 활동과 학부모의 역할을 알려주는 등 운동의 범위를 넓혀갔습니다. 요즘은 교복 공동구매 운동을 하고 있어요.” 알음알음 10여명의 회원으로 시작한 모임은 어느새 200여명으로 불어났다. 서초강남이라는 지역적 특성 때문에 모임의 활동에 주목하는 이들도 많아졌다.

    이 모임과 별도로 그는 학부모 웹진 ‘같이하자’(www.haja.net/with)를 운영중이다. 웹진을 열면 이런 글귀가 나온다. “10대들의 에너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내 방식대로 사랑하려다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부모의 모습에서 벗어나 아이들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방식을 익혀 평등하고 즐거운 10대와 부모를 만들어 갑니다.” 김정씨는 세상의 부모들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식을 해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 김현미 기자 > khmzip@donga.com

    보통사람들이 세상을 바꾼다
    농촌을 가꾸는 공무원 벤처

    물 부족 해소 비법 마련한 ‘아이디어 뱅크’

    지난해 5월 춘천시 농정과 직원 4명은 벤처 동아리 ‘농촌을 가꾸는 사람들’을 만들었다. 황문규(47ㆍ6급) 한범수(45ㆍ7급) 이영훈(36ㆍ7급) 함명용씨(41ㆍ8급)가 그 주인공. 이들은 최근 ‘작지만 의미 있는’ 성과를 이뤄냈다. 이들이 효율적인 농업용수 활용 방안으로 지난 11월 발표한 ‘자연환경 보전과 농업용수에 관한 연구’를 획기적 발상이라 판단한 춘천시 건설과가 예산을 책정해 2002년중 관련사업을 추진하기로 한 것이다.

    이들의 독자적 아이디어는, 6~9월 계곡 및 산간지역에 빗물이 고이도록 소형 강우저수지를 설치해 지하로 흐르는 물을 가둔 뒤 용수관을 통해 농경지로 물을 끌어들여 가뭄 때 농업용수로 쓰는 방안. 농업용수는 대부분 하천물을 이용하므로 가뭄으로 하천이 마르면 용수 확보에 지장이 있다. 하지만 강우저수지는 계곡의 지하수는 물론 하천 지하수까지 손실 없이 모이도록 설계돼, 논뿐만 아니라 밭에도 농업용수를 공급할 수 있어 지하수 확보를 위한 하천 굴착 예산까지 절약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지녔다. 지금은 농한기라 춘천지역의 경우 저수율이 80%라도 늦가뭄을 버텨내고 있으나, 2002년 봄 또 한 차례 극심한 물 부족 사태가 우려되고 있어 이들이 내놓은 방안의 의미는 남다르다.

    호반도시 춘천의 호수에서 수생식물인 연(蓮)을 재배해 농가소득을 얻는 한편, 농촌과 도시오수를 호수에서 정화할 수 있는 친환경적 방안을 모색한 이들의 2000년도 연구실적은 춘천의 한 민간단체가 채택하기도 했다. 이처럼 ‘농촌을 가꾸는 사람들’은 동아리 활동의 적극성을 인정받아 2000년에 춘천시로부터 우수 동아리 장려상을, 2001년엔 동상을 받았다.

    직접 벼농사도 짓는 팀장 황씨를 비롯해 동아리 회원들은 모두 농업직에만 9∼27년 근무한 춘천 토박이들이다. 이들은 “열악한 농촌 현실을 직접 체험함으로써 얻는 산 경험과 지식이 동아리 활동의 원동력”이라고 입을 모은다.

    춘천시청 내 벤처 동아리는 모두 8개. 지적정보 공유체계 시스템 구축, 벤처기업 마케팅 지원전략, 지방세 고지 및 인터넷 수납 등 고유 담당업무를 인터넷과 연계한 동아리들이 대다수다. 다른 시ㆍ군에선 찾기 힘든 벤처 동아리 활동은 춘천시의 특수시책 사업이다. 그러나 농업관련 동아리는 ‘농촌을 가꾸는 사람들’이 유일하다.

    “근무 특성상 출장이 잦아 주로 공휴일에 동아리 활동을 갖는다”는 황팀장은 “동아리 연구 실적이 농촌의 어려움을 더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말한다. 또 “그동안 강원지역 하천들을 조사하면서 동해안 하천의 어도(魚道)가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수자원 피해가 많은 현실이 안타까웠다”며 “어도를 많이 만들어도 1개만 잘못 설치하면 전체를 못 쓰게 되므로 관련 연구가 절실하다”는 지적도 빼놓지 않았다.

    ‘농촌을 가꾸는 사람들’의 모토는 ‘생각하는 곳에 방법이 있다’다. 자신들의 삶과 농촌의 미래를 함께 짊어진 이 ‘초미니 동아리’가 일궈낼 작지 않은 변화들이 자못 기대된다.

    < 김진수 기자 >jockey@donga.com

    보통사람들이 세상을 바꾼다
    어린이책 재미마주 이호백 대표

    그림책 한 권 만드는 데 3년 정성 쏟아붓기

    세속적인 시각에서 볼 때 도서출판 재미마주의 이호백 대표(40)는 분명 유별난 사람이다. 그는 1995년 어린이책 전문 출판사인 재미마주를 만든 이래 6년간 고작 13권의 책을 출판했다. 책 한 권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3년. 한 해에 100여권씩 책을 내는 다른 아동출판사에 비하면 재미마주의 개미 같은 행보는 기이하기까지 하다.

    이호백 대표는 가장 자연스러운 그림, 가장 감동적이고 예술적인 그림을 만들어내기 위해 수백장의 그림을 직접 그리며 작가가 지칠 때까지 씨름한다.

    “그림책의 본질적 기능은 어린이에게 감동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림책은 아이가 처음으로 예술을 접하는 매체니까요. 말 못하는 아이도 피카소나 다빈치의 그림을 보면 감동합니다. 다만 어른의 언어로 그 감동을 표현하지 못할 뿐이죠. 그래서 아이들 책일수록 더욱 많이 연구하고, 그려야 합니다.”

    ‘감동을 주는 그림책, 예술적인 그림책’에 대한 그의 신념은 지난해 5월 출판된 ‘노란 우산’에서 실현된 듯싶다. ‘노란 우산’에는 그림만 있을 뿐 글이 없다. 대신 작곡가 신동일의 피아노곡 CD가 들어 있다. ‘노란 우산’은 2001년 스위스 바젤에 있는 국제어린이도서협의회(IBBY)에서 지난 50년간 만들어진 가장 우수한 어린이책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이호백 대표는 서울대 응용미술과와 고려대 신방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 1대학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했다. “저는 그림책을 공부하고 싶어 응용미술과에 진학했습니다. 그런데 한국 최고학부라는 서울대 미대에서도 그림책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한 명도 없더군요. 결국 그림책에 대한 흥미 때문에 프랑스 유학까지 가게 된 셈이죠.”

    재미마주의 책이 나오기 전까지 어린이 그림책 시장은 90% 이상 외국 번역책이었다. 지금도 이런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다른 출판사들이 재미마주의 고급스러운 그림책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고작 아이들 책 만들면서 그렇게 진 빼고 앉아 있느냐”는 비아냥거림도 어느 순간부터 들리지 않았다.

    < 전원경 기자 >winni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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