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호영 기자]
향가는 한자의 뜻과 소리를 가차한 향찰로 쓰였다. 만엽집 역시 한자 발음을 취한 일본어표기법인 만요가나로 표기돼 있다. 향찰이 먼저 등장한 뒤 만요가나가 등장했다는 점에서 그 영향관계를 미뤄 짐작할 수 있다. 고대 한국과 일본은 발음이 유사한 단어가 많았다는 점에서 둘의 비교연구는 한국의 언어와 시가 연구에도 중요하다.
기자는 레이와의 원전을 찾고자 만엽집을 검색하다 권 20으로 된 이 시가집이 지난해 비로소 우리말로 완역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하지만 대형서점에선 절판됐고, 도서관에도 1권씩만 소장된 귀중본이라 대출받아 그 내용을 확인하는 데도 한나절 이상이 걸렸다.
‘한국어역 만엽집’은 전체 14권이다. 1~14권 중 어느 한 권도 1쇄 이상을 찍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출판사(도서출판 박이정)를 통해 들었다. 이 책을 번역한 부산의 이연숙(63) 동의대 명예교수와 전화통화를 했다. 준비 기간을 포함해 10년 세월을 만엽집에 쏟아부어 지난해 2월 ‘한국어역 만엽집’ 완간과 함께 명예퇴직하고 한일문화 교류에 이바지할 길을 모색 중이라고 했다. 동아시아 시가문학의 보고를 세계에서 다섯 번째(영어, 프랑스어, 체코어, 중국어, 한국어 순)로 완역했는데 대중은 물론 학계에서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아 서운했다고 했다. 인터뷰를 하고 싶다 했더니 반색하며 서울로 오겠노라 했다. 4월 9일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에 자리한 출판사에서 직접 만나 만엽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신라 향가 14수 vs ‘만엽집’ 4516수
첫 번째 의문은 제목이 왜 만엽집인가 하는 거였다. 많은(萬) 작품(葉)을 모은 책(集)이라는 뜻과 만대(萬代)까지 전해지기를 바라는 은유적 표현이라는 설명이 뭔가 미진하게 느껴졌는데 이 교수의 설명을 듣고 무릎을 쳤다.“일본인들은 마음속 생각이 자라 싹을 틔우고 잎사귀를 피우는 게 곧 언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언어를 말잎사귀라는 뜻의 고토바(言葉)라고 합니다. 만엽집이란 그런 생각의 무수한 잎사귀를 골고루 따 모아놓은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놀랍게도 이교수는 일문학 전공자가 아니다. 부산대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까지 마친 국문학자다. 향가와 만엽집에 실린 시가를 비교연구하려고 일본 도쿄대 비교문학·비교문화과에서 석사부터 시작해 박사과정까지 마쳤다. 또 1999~2000년 오사카여대 객원교수로 재임할 때 거기서 이번 연호를 추천한 만엽집 연구의 대가 나카니시 스스무(中西進) 명예교수를 비롯한 일본, 중국의 만엽집 연구자 6명과 공동으로 향가와 비교연구를 진행하면서 만엽집 완역에 도전할 결심을 하게 됐단다.
“만엽집의 작가를 500명 전후로 보는데 제가 분석한 바로는 일본으로 건너간 도왜(渡倭)계 작가가 절반 가까운 222명이나 됩니다. 그중에서 한국계는 보수적으로 잡아도 167명입니다. 백제계가 145명, 고구려계가 8명, 신라계가 5명으로 추정됩니다. 백제 의자왕의 아들 풍장으로 추정되는 이쿠사노 오키미(軍王), 형제관계인 텐지와 텐무 일왕의 사랑을 동시에 받은 누카타노 오키미(額田王), 일본 교과서에 시가 실린 학자 야마노우에노 오쿠라(山上憶良)가 대표적입니다. 또 만엽집에는 한국어와 어원이 같은 말이 많이 보입니다. 예를 들면 ‘칼 도(刀)’에 해당하는 ‘나’는 한국어 ‘날’, ‘구슬 주(珠)’에 해당하는 ‘구시로’는 한국어 ‘구슬’, ‘수풀 삼(森)’에 해당하는 ‘모리’는 한국어 ‘뫼’와 어원이 같다고 보는데 이런 예가 참 많습니다.”
이 교수가 한국어 번역본의 원본으로 삼은 책이 나카니시 교수가 편수한 ‘만엽집’(고단샤문고)이다. 일본 고전을 출전으로 삼은 첫 연호 레이와가 발표된 이후 “만엽집은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해 화제가 된 나카니시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 이렇게 밝혔다. ‘만엽집 노래를 출발시키고 있는 것이 고대 한국으로부터의 충격력 때문이었다. 백촌강(白村江)전투가 없었다면 만엽집도 없었을지 모르겠다. (중략) 백제 문화를 일본이 계승하는 형식으로 역사가 흘러갔는데 그 속에서 탄생한 것이 만엽집이다.’
백촌강전투는 나당연합군의 침공을 받은 백제를 도우려고 663년 일본에서 보낸 원군이 금강 어귀로 추정되는 곳에서 벌인 전투를 말한다. 이 전투에서 패한 일본은 동맹국이던 백제 유민과 그 문화를 대거 받아들였다.
“만엽집 권 제20에는 755년 2월 이키섬, 대마도와 기타큐슈의 연안 방어를 위해 일본 전역에서 차출된 국경수비병과 그 가족들이 부른 노래 93수가 실려 있습니다. 사키모리노우타(防人歌)로 불리는 이 노래들에는 고향 생각, 앞날에 대한 불안감이 담겼습니다. 사키모리(防人)가 처음 설치된 것이 백촌강전투 다음 해인 664년입니다. 백제 멸망으로 인해 한반도와 접한 해안가 방위가 중요해졌기 때문인데, 그 영향으로 사키모리노우타가 탄생한 것입니다.”
고대인의 진솔한 심성이 담긴 노래
[지호영 기자]
첫 번째 인상은 진솔하다는 것이었다. 꾸밈없는 기쁨과 슬픔, 회한을 접할 수 있었다. 일왕을 비롯한 남자가 여성의 이름을 물어보는데 ‘내 이름을 묻지 말아요’라고 답하는 시가가 있었다. 해설을 보니 고대에는 이름을 함부로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여성의 이름을 묻는 행위는 곧 청혼을 의미하는 것이라 여성들이 신중을 기했다고 한다. 요즘 청춘남녀가 서로 관심 있을 때 전화번호를 따는 것과 비교해놓아 웃음이 배어나왔다. 일곱 가지 보물보다 귀하다고 여겼던 어린 아들의 죽음에 ‘뛰어 날뛰며 / 발 구르며 외치며 / 엎드려 울며 / 가슴 쳐 탄식하네 / 손에 쥐었던 / 내 자식 떠나갔네’라는 노래를 읽노라니 절로 콧날이 시큰해졌다.
또 왕과 귀족, 궁녀뿐 아니라 이름 없는 농부와 어부, 가난한 서민이 지은 노래가 대등하게 실려 있다. 신라 향가의 작가는 승려나 화랑 같은 엘리트였음을 감안하면 파격적이다. 가난한 빈자(貧者)와 찢어지게 가난한 궁자(窮者)가 서로의 신세를 비교하며 한탄하는 노래(백제계로 추정되는 야마노우에노 오쿠라의 작품)에선 시대를 뛰어넘는 문제의식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만엽집의 매력이 거기 있습니다. 대체로 노래 내용이 꾸밈이 없고 권위의식도 없어 인간적이라 부담 없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2013년 개봉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 ‘언어의 정원’에도 만엽집 속 작품이 등장합니다. 비가 오는 날 연인의 마음이 오가는 노래입니다. 연인의 발길을 붙잡아두고픈 남자가 ‘천둥번개가 / 아주 조금 치고는 / 흐리어져 / 비도 내리지 않나 / 그대 잡을 것인데’라고 노래하자 여인이 답합니다. ‘천둥번개가 / 아주 조금 치고는 / 비 안 내려도 / 나는 머물겠어요 / 그대가 잡는다면’이라고.”
이 교수가 추천한 작품 가운데 유배를 가게 된 연인을 떠나보내며 여인이 지은 권 제15에 실린 3723번 노래는 왠지 익숙하다. ‘그대가 가는 / 길이 멀고 먼 것을 / 말아 접어서/ 태워서 없애버릴 / 하늘 불 있었으면.’
머나먼 유배길이 힘들지 않게 접어서 태워버리고 싶다는 표현은 시간을 접었다 펴고 싶다는 황진이의 시조와 묘한 대구를 이룬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어 /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 어룬님 오신날 밤이어드란 구뷔구뷔 펴리라.’
만엽집의 작가들은 잘 울고 잘 웃는다. 슬픈 시만 있는 게 아니라 파안대소하게 만드는 시도 많다. 권 제16에 실린 3826번 노래는 오키마로라는 남자가 어여쁜 여인과 자기 아내의 외모를 이렇게 비교한다. ‘연꽃의 잎은 / 이렇게 생긴 것인데 / 오키마로의 / 집에 있는 그것은 / 토란잎인 것이겠지.’
자수율까지 맞춘 번역 · 교정 홀로 해내
일본 만엽집 연구 권위자인 나카니시 스스무 오사카여대 명예교수와 이연숙 교수 등 한중일 학자 7명이 2008년 공동으로 펴낸 ‘향가 - 주해와 연구’. [지호영 기자]
이연숙 교수의 번역은 김사엽 교수의 번역과 몇 가지 차별성을 띤다. 김 교수는 한자를 활용한 만요가나 원문과 그에 대한 일본어 훈독을 달고 번역을 했다. 반면 이 교수는 원문과 훈독 외에 5·7조를 기본으로 하는 가나문을 병기했다.
일본 와카는 크게 단카(短歌)와 조카(長歌)로 나뉜다. 단카는 5·7, 5·7, 7을 기본 자수율로 하는 정형시다. 그리고 조카는 5·7을 반복해 나가다 맨 마지막 구를 7로 종결한다. 한자로만 표기한 만요가나와 그에 대한 일본어 훈독만 읽으면 이런 자수율을 파악할 수 없다. 이 교수는 이를 감안해 자수율을 맞춘 가나문을 병기했을 뿐 아니라 이를 우리말로 번역할 때도 이 자수율을 최대한 그대로 유지했다. 또 그것에 대한 자세한 해설도 달았다.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단카 1줄을 번역하는데 알맞은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이틀이나 걸린 적도 있습니다. 조카의 경우 최대 149구에 이르지만 거의 한 문장처럼 전개되는 것을 자연스럽게 번역하려고 진땀을 뺄 때가 많았습니다. 특히 권 제5와 권 제17~20은 한문 문장이나 한시가 많고 조카도 많아 악전고투의 연속이었습니다. 번역뿐 아니라 교정까지 저 혼자 하려니 한번 앉으면 7~8시간씩 자리를 안 뜨고 매달려야 했습니다. 책 출판 기간은 6년이지만, 그 전의 준비 작업까지 합치면 10년 이상 세월이 소요됐습니다. 너무 힘들어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원로교수님들이 ‘아무리 힘들어도 꼭 완역해야 한다’고 격려 편지를 보내주셨고 그것을 읽고 또 읽으며 버텼습니다.”
더욱 감탄스러운 점은 정부나 학술단체로부터 아무런 지원도 받지 않고 홀로 대장정을 마쳤다는 것이다. 유일한 지원이라면 2017년 11월 일본 외무성과 문부과학성이 후원하고 나라(奈良)현에서 수여하는 제5회 나라만엽세계상 수상으로 1000만 원 상금을 받은 것이 다였다.
“학자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누구에게 손을 내밀겠습니까. 일본 학자들은 지원금이 없더라도 누군가 해야 할 기초연구라면 아무리 시간이 걸리고 어려운 일이라도 묵묵히 해냅니다. 그게 학자 본연의 임무니까요. 한국에는 신라 진성여왕 때 향가를 집대성한 ‘삼대목’이 유실되고 14수밖에 안 남은 반면, 일본에는 만엽집에 실린 4516수의 고대시가가 그대로 남아 있는 이유가 뭘까요. 긴 안목으로 역사를 보지 못하고, 권력과 이권이 아닌 문화의 가치를 인정하고 보존하려는 노력의 차이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