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역 시절 ‘갈색폭격기’ 명성
그는 8월 11일 국가대표 배구팀의 트레이너로 태릉선수촌에 들어갔다. 26년간의 선수생활을 마친 뒤 지도자로서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새벽 6시에 일어나 월드리그 준비로 담금질을 하는 국가대표 선수들을 위해 하루 8시간 동안 가르치고 돌봐준다. 현역시절 서브 리시브에 능했던 신진식은 현재 대표팀의 가장 큰 약점인 리시브 능력을 끌어올리는 데 초점을 맞추며 틈틈이 선수시절 경험도 전해주고 있다.
“말이 트레이너지 하는 건 코치나 다름없어요. 볼도 많이 때려주고, 선수들의 부족한 기본기나 기술 등은 저녁에 따로 가르치죠. 현재 대표팀 선수들은 지나치게 부상을 두려워해요. 그렇다고 몸 관리를 잘하는 것도 아니에요. 아프면 쉬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럴 게 아니라 보강운동을 통해 보완을 해야 합니다.”
2007년 12월 신진식은 팀 동료인 김상우, 방지섭과 함께 은퇴 발표를 했다. 선수생활 연장을 위해 다른 팀으로 이적하겠다는 뜻을 접고 화려했던 현역생활에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었다. ‘자의반 타의반’ 은퇴에 더는 한국이 낳은 슈퍼스타를 볼 수 없게 된 팬들의 아쉬움은 무척 컸다.
“당연히 더 뛰고 싶었죠. 하지만 선수생활을 더 하면 유학을 포기해야 하고, 유학을 가면 선수생활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라 적절한 시기에 유학을 가야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은퇴와 유학을 택했습니다.”
은퇴 후 그는 호주 시드니에서 영어 랭귀지 코스를 밟으면서 아내 권세진 씨와 함께 두 아이의 육아에 힘썼다. 또 일주일에 한두 차례 시드니대학에서 서브와 리시브 등을 가르치면서 배구에 대한 감을 유지해왔다. 최근 1년 동안은 현지 교민을 대상으로 웨이트트레이닝과 기초체력 관리, 다이어트 등을 가르치면서 퍼스널 트레이너로서의 경험을 쌓았다. 제39회 전국소년체육대회(8월 11~14일)에 참가한 호주의 교포 수영선수단도 신진식이 기초체력 관리를 맡았었다.
“새로운 문화와 함께 지도자로 거듭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한 것이 2년 10개월의 호주 체류기간에 얻은 가장 큰 수확이라 생각합니다.”
국내 배구계에서 신진식만큼 대학 진학, 프로 입단, 은퇴 때마다 화제를 남겼던 선수도 없을 것이다. 성균관대 재학시절 5회 우승을 이끌었던 신진식이 졸업반이 된 1996년, 국내 굴지의 대기업인 현대와 삼성이 신인 최대어인 그를 두고 스카우트 전쟁을 벌였다. 실업배구 원년부터 실업팀을 운영하던 현대와 달리 1995년에 배구팀을 창단한 삼성은 신진식을 영입하는 게 팀 창단과 운영의 기본 골자였다.
“그해 6월까지만 해도 전통의 명문 현대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삼성 쪽 이야기를 듣고 조금씩 마음이 움직였죠. 입단 전 4박5일 동안 삼성 측의 제안으로 서울 서초동 한 호텔에서 동기 3명과 함께 묵었어요. 가족과의 연락 외에 통신도 모두 두절됐고, 당시 대표팀 소집에도 못 나갔죠. 거기서 동기들과 입단계약서에 사인했습니다.”
신진식<br>● 1975년생. 익산 남성고-성균관대 졸업. 1996년 삼성화재 입단<br>● 슈퍼리그 신인왕(1994년 성균관대), 최우수선수 4회(1998·1999·2001·2002년 삼성화재), 대통령배, 전국체전 최우수선수(1992년 남성고). <br>● 아시아청소년선수권대회 최우수선수(1994년 성균관대) 슈퍼리그 9연패, 77연승. 2002·2006년 아시안게임 2연패
“제가 생각해도 정말 완벽한 팀이었어요. 공격, 수비, 서브, 리시브 모두 좋았고 감독님이 지시를 안 해도 선수들이 알아서 움직였지요. 모든 게 훈련 덕분이었습니다. 삼성은 선수들이 너무 좋아서 연승을 한다고 했는데 사실 우리는 다른 팀이 휴가 갈 때도 계속 훈련했습니다. 훈련량만을 놓고 보아도 어느 팀이든 삼성을 이기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극적이었던 경기를 1996년 도쿄에서 열린 한·일전을 꼽는다. 애틀랜타올림픽 예선전으로 치러진 한·일전에서 한국은 1차전에서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살리지 못하고 패한 뒤, 도쿄에서 열린 원정 2차전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상황. 여느 한·일전처럼 이 리턴매치도 전 국민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으나 당시 주전선수들은 부상이었다. 이때 대안으로 떠오른 선수가 성균관대 졸업반인 신진식이었다.
그의 발탁을 놓고 ‘국내용 선수가 잘할 수 있을까’라는 우려가 적지 않았다. “이제부터 시작이다”라는 각오를 품고 결전에 임한 끝에 그는 국내 선수 중 최다 공격포인트를 올리며 팀의 3대 1 승리와 올림픽 출전권을 거머쥐었다. 당시 일본 최고 스타 나카가이치는 부지런히 코트를 누비던 신진식의 활약에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이 경기를 통해 그는 전국구 스타로 떠올랐고, 이후 대표팀은 늘 그에게 러브콜을 했다.
“시작을 했으니 끝을 보겠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과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의 결승전에서 금메달을 결정짓는 마지막 스파이크의 주인공이 바로 저였지요.(웃음)”
화려한 선수생활을 보낸 신진식은 이제 지도자로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배구철학을 구현하는 지도자가 되고 싶다고 밝혔다. 그의 배구철학은 ‘기본기’다. 좋아하는 좌우명 역시 ‘Back to the basic(기본으로 돌아가라)’이다. 신진식이 가장 존경하는 은사인 김은철 감독(현 남성고 감독)이 고교 시절 가르쳐준 철학이다.
“모든 건 기본에서 출발합니다. 기본기 탄탄한 배구만이 오랫동안 살아남습니다. ‘신진식에게 배웠더니 기본기가 많이 탄탄해졌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요.”
그는 “시작을 했으니까 끝을 보겠다”는 말로 앞으로의 각오를 밝혔다.
“한국 배구계에 큰 업적을 남기신 신치용(삼성화재) 감독님의 명성을 넘어서는 지도자가 되고 싶습니다. 현재는 대표팀에 몸담고 있지만 이후 삼성으로 돌아가 팀을 우승으로 이끌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