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사람의 현역 군인이 병영을 이탈한다. 그렇다고 영화 ‘탈주’가 탈영병 이야기는 아니다. 사실 세 사람이 도망친 곳은 단순히 부대가 아니라, 군대로 제유(提喩)되는 우리 사회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시작하면 세 명의 군인이 뛰쳐나온다. 안경을 쓴 허약한 사람은 처음부터 어긋나기 시작한다. 덫에 발이 끼고 만 것이다. 나머지 두 사람의 길도 순탄치만은 않다. 탈영한 순간 그들에겐 길이 사라진다. 사실 길은 마음껏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활보할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곳이다. 만일 행보가 떳떳치 못하다면, 그래서 남의 눈을 피해야 하는 사람들이라면 길은 더는 길이 아니게 된다. 그들은 대개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길 아닌 길을 헤쳐나갈 수밖에 없다.
탈주의 사전적 의미는 몰래 빠져나와 달아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탈주하는 순간 이미 그들에게 허락된 궤도는 없다는 것이다. 탈주하지 않는 삶이란 적정한 궤도를 유지하는 삶일 것이다. 정해진 나이가 되면 군대에 가고 20개월 정도 맴돌다 집으로 돌려보내지고, 결혼하고 애 낳고, 집 장만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세상이 말하는 궤도다.
그런데 세 사람은 군대를 더는 견딜 수 없다며 뛰쳐나왔다. 견딜 수 없는 이유는 각기 다르다. 한 사람은 반복적인 성추행을 견디다 못해 탈영을 선택했고, 또 한 사람은 고참들의 구타 때문에 도망쳤다.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말기암으로 고통받는 어머니와 연락이 안 되자 탈영을 감행했다. 그럼 이쯤에서 묻자. 왜 이들은 진작 이 사실을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을까?
아니다. 다시 생각해보자. 그들은 군인이다. 군대는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질문이 불가능한 세계로 그려진다. 이송희일은 군대에는 합리나 이성이 없다고 말한다. 만일 이성이나 논리가 있다면 장교가 사병을 성추행하고, 고참이 신참을 구타하는 게 가능하기나 할까? “어머니가 죽지 않는 이상 휴가는 없다”는 대답도 비이성적이긴 마찬가지다. 군대는 바로 논리적 대화를 거절하는 세상 자체를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세 사람의 탈주병은 우리가 질서 또는 법이라 부르는 세상의 규칙에 저항하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군대를 바꾸지 못하기 때문에 탈영한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질서나 법의 궤도에서 이탈한 탈주병들이 어떤 미래를 만나게 되느냐다.
안타깝지만 영화는 비극적 결말로 대답을 대신한다. 세 사람의 탈영은 죽음으로 마무리된다. 군대라는 질서의 공간을 탈주해 아무리 멀리 간다 해도 세상이라는 더 큰 군대를 벗어날 수는 없다. 군대는 시스템, 질서, 일상 그 자체로 엄연히 존재한다. 이들의 탈주가 더욱 비극적인 것은 이들의 목적이 벗어나는 것, 탈주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 탈주는 세상이 정상이라 부르는 다수의 삶을 이탈한 자들의 행로이기도 하다. 이성애가 다수인 세상에서의 동성애자, 부자가 대접받는 세상에서의 극빈자. 이 약자 모두가 어쩌면 탈주자일지 모른다. 감독의 전편 ‘후회하지 않아’가 동성애자의 사랑을 전면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으로 탈주했다면, ‘탈주’는 알레고리를 통해 탈주의 고통을 이야기한다. 담백하다 못해 소박해 심심해 보이기까지 하지만 오히려 그 고민의 농도는 짙고 쓰다. 역설적이게도 탈주의 고통은 탈주를 염원하는 자에게만 찾아온다.
탈주의 사전적 의미는 몰래 빠져나와 달아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탈주하는 순간 이미 그들에게 허락된 궤도는 없다는 것이다. 탈주하지 않는 삶이란 적정한 궤도를 유지하는 삶일 것이다. 정해진 나이가 되면 군대에 가고 20개월 정도 맴돌다 집으로 돌려보내지고, 결혼하고 애 낳고, 집 장만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세상이 말하는 궤도다.
그런데 세 사람은 군대를 더는 견딜 수 없다며 뛰쳐나왔다. 견딜 수 없는 이유는 각기 다르다. 한 사람은 반복적인 성추행을 견디다 못해 탈영을 선택했고, 또 한 사람은 고참들의 구타 때문에 도망쳤다.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말기암으로 고통받는 어머니와 연락이 안 되자 탈영을 감행했다. 그럼 이쯤에서 묻자. 왜 이들은 진작 이 사실을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을까?
아니다. 다시 생각해보자. 그들은 군인이다. 군대는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질문이 불가능한 세계로 그려진다. 이송희일은 군대에는 합리나 이성이 없다고 말한다. 만일 이성이나 논리가 있다면 장교가 사병을 성추행하고, 고참이 신참을 구타하는 게 가능하기나 할까? “어머니가 죽지 않는 이상 휴가는 없다”는 대답도 비이성적이긴 마찬가지다. 군대는 바로 논리적 대화를 거절하는 세상 자체를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세 사람의 탈주병은 우리가 질서 또는 법이라 부르는 세상의 규칙에 저항하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군대를 바꾸지 못하기 때문에 탈영한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질서나 법의 궤도에서 이탈한 탈주병들이 어떤 미래를 만나게 되느냐다.
안타깝지만 영화는 비극적 결말로 대답을 대신한다. 세 사람의 탈영은 죽음으로 마무리된다. 군대라는 질서의 공간을 탈주해 아무리 멀리 간다 해도 세상이라는 더 큰 군대를 벗어날 수는 없다. 군대는 시스템, 질서, 일상 그 자체로 엄연히 존재한다. 이들의 탈주가 더욱 비극적인 것은 이들의 목적이 벗어나는 것, 탈주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 탈주는 세상이 정상이라 부르는 다수의 삶을 이탈한 자들의 행로이기도 하다. 이성애가 다수인 세상에서의 동성애자, 부자가 대접받는 세상에서의 극빈자. 이 약자 모두가 어쩌면 탈주자일지 모른다. 감독의 전편 ‘후회하지 않아’가 동성애자의 사랑을 전면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으로 탈주했다면, ‘탈주’는 알레고리를 통해 탈주의 고통을 이야기한다. 담백하다 못해 소박해 심심해 보이기까지 하지만 오히려 그 고민의 농도는 짙고 쓰다. 역설적이게도 탈주의 고통은 탈주를 염원하는 자에게만 찾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