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0일 고(故) 이재찬 씨의 발인 모습. 선글라스를 낀 이가 고인의 형인 이재관 전 새한그룹 부회장이고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 이가 부인 최선희 씨다.
재찬 씨의 아버지인 이창희 전 회장은 이병철 삼성그룹 선대 회장의 차남이자 이건희 현 회장의 둘째 형으로, 바로 위 형이 CJ그룹 이재현 회장의 아버지이자 삼성가의 장자인 이맹희 씨다. 따라서 재찬 씨는 삼성가의 3세대 장손인 이재현 회장의 사촌동생이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사장의 사촌형이 된다.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은 큰고모, 이명희 신세계 그룹 회장은 막내고모이고 조동혁 한솔그룹 명예회장과 조동길 한솔그룹 회장, 정용진 신세계 부사장 등과는 고종사촌 간이다.
새한그룹은 이창희 전 회장이 1991년 58세의 나이에 백혈병(혈액암)으로 숨을 거둔 후 1995년 삼성그룹에서 완전 분리됐다. 이후 ㈜새한, 새한미디어 등 계열사 12개를 거느린 중견그룹으로 성장했지만 IMF 당시인 1998년 경영상황이 나빠져 결국 공중해체됐다. 분리 당시 7000억 원이던 빚은 3년 새 무려 1조7000억 원으로 불어나 있었다. 재찬 씨는 새한그룹의 계열사가 모두 매각된 2000년 이후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도전했으나 실패하고 2005년부터는 부인 최선희 씨(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의 딸)와 고등학생, 중학생인 두 아들과 별거에 들어갔다. 살고 있던 아파트도 월세. 경찰은 이씨의 자살 이유를 사업 실패 후 겪었던 생활고와 우울증 때문인 것으로 추정한다.
사업 실패 후 생활고와 우울증
새한그룹 분리 후 재찬 씨를 포함한 이창희 전 회장의 3남1녀 자녀들은 고 이병철 회장의 기일에도 불참하는 등 다른 삼성가 가족들과 왕래를 거의 끊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 때문일까. 이날 재찬 씨의 장례식장에는 형인 이재관(47) 전 새한그룹 부회장 등 직계 형제들과 부인, 두 아들 등 유족만 참가했을 뿐 삼성가의 어느 누구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 밖에 유석렬 삼성토탈 대표, 배호원 삼성정밀화학 대표 등 재찬 씨와 일한 경험이 있는 삼성그룹 관계자들이 얼굴을 비쳤다. 유 대표는 한때 제일합섬(1995년 새한그룹 편입)에서 고인과 같이 근무한 인연이 있으며, 배 대표는 그룹 비서실 재무팀에 근무하며 고인과 알고 지냈던 사이. 재찬 씨 아래에 상원 씨가 있었지만 장례식 상주는 막내동생인 혜진 씨의 남편이자 전 라이프그룹 조내벽 회장의 아들인 조명희 씨가 맡았다.
이런 재벌가 자손의 수난사는 다른 가문도 만만치 않다. 그중 현대가는 창업주인 정주영 명예회장의 아들 대에 불운이 집중됐다. 1982년 당시 인천제철 사장 겸 동서산업 사장이었던 정 명예회장의 장남 몽필 씨가 인천제철 울산공장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로 사망한 데 이어, 1990년에는 4남이자 현대알루미늄 회장이었던 몽우 씨가 서울 강남의 한 호텔에서 음독자살했다. 당시 몽우 씨는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일선 BNG스틸 사장, 아나운서 출신 노현정 씨와 결혼한 정대선 비에스엔씨(BS·C) 사장의 아버지가 바로 그다. 몽우 씨의 자살은 울산 현대중공업이 노사분규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가운데 발생해 당시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현대家도 2명이나 자살
불행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2003년에는 대북지원 비자금 사건으로 검찰의 조사를 받던 현대아산이사회 정몽헌(5남) 회장이 계동 사옥에서 투신자살했다. 창업주 정 명예회장의 8명 자식 중 3명이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고 이 중 2명이 자살한 것. 1962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 정 명예회장의 넷째 동생 정신영(당시 동아일보 기자) 씨를 합하면 현대가에서 모두 4명이 불의의 사고나 자살로 목숨을 잃었다. 신영 씨는 정 명예회장이 “형제 중에서 가장 명석하다”며 애지중지했던 동생.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일에서 손을 놓은 적이 없던 것으로 유명한 정 명예회장이 슬픔에 빠져 일주일 동안 일을 하지 않았다는 일화도 있다.
가장 최근의 재벌가 자살 사례는 지난해 11월 자택에서 목을 매 숨진 박용오 성지건설 회장이다. 일명 ‘형제의 난’ 이후 그룹에서 쫓겨나 독립을 선언했던 그는 죽기 전 “회사 부채가 너무 많아 경영이 어렵다”는 글을 남겼다. 1987년 투신자살한 박건석 전 범양상선 회장도 기업경영의 어려움과 슬픔을 유서로 남긴 바 있다.
이처럼 재벌가에 유독 자살이 많은 이유는 뭘까. 정신과 전문의 손석한 박사는 치열한 경영권 경쟁에서 오는 극도의 스트레스와 선택에서 배제되거나 실패했다는 상실감을 이유로 꼽는다. 손 박사는 “재벌가 자손들은 조선시대 왕자들처럼 늘 권력투쟁 속에서 살고 있다. 선택받기 위해 경쟁해야 하는 것에 엄청난 중압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 경쟁에서 배제되고 새로운 경영도전이 실패하면 극단의 우울증이 찾아든다. 그 결말이 자살”이라고 설명했다. 공병호 공병호연구소장은 한 언론의 칼럼에서 “기업가가 기업과 부를 잃어버리는 건 거의 모든 것을 잃는 것”이라며 “잘 짜인 조직에서 명령과 지시로만 움직이는 데 익숙한 사람이 척박한 사업 세계에서 자리를 잡기는 무척 힘들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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