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교육계에 투신한 것은 분노 때문입니다.”
서울대 대학원에 다니던 청년이 스타 강사로 변신했다.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강의가 입소문을 타면서 학생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분당에서 강남으로 외연을 넓히며 승승장구하던 그는 2000년 메가스터디 창립 멤버로 참여했고, 2003년 연봉 18억 원의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연봉과 명성이 정점을 찍자 회의가 밀려왔다.
“연봉이 1억8000만 원만 돼도 괜찮았을 텐데, 18억 원은 말이 안 되잖아요. 그 시스템 속에서 피해 입는 학생들을 보면서 우리나라 교육시스템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미련 없이 은퇴한 그는 이후 사교육 투사로 변신했다. 교육평론가로 학부모들에게 사교육의 이면을 알리는 한편 ‘굿바이 사교육’ ‘이범의 교육특강’ 등의 책을 펴냈다. 그런 그가 최근 인생의 새로운 챕터를 열었다.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의 정책보좌관으로 계약직 공무원이 된 것. 7월 16일부터 출근한 새내기 공무원 이범(41) 씨를 8월 23일 서울시교육청(교육청)에서 만났다.
#‘사교육 암행어사’로 교육청 입성
약속 시간보다 10분 일찍 도착했다. 8층 비서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10여 개의 눈이 일제히 날아와 꽂힌다. “누구를 찾아오셨습니까?” 2초 만에 날아오는 신원 확인 질문. 느슨한 사무실은 낯선 이가 방문해도 경계하지 않았다. 막 둥지를 꾸린 곽 교육감의 비서실에는 기분 좋은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 교육청 비서실에 어떻게 합류하게 됐나.
“지난 교육감 선거에 이어 올해에도 선거 지원 활동을 했다. 경기와 서울을 짝홀로 번갈아 가며 유세를 펼쳤다. 경기는 안정권이었지만 서울은 위태로워서 막판까지 결과를 점치기 어려웠다. 결과적으로 상대 후보의 10% 교원퇴출 공약이 승리를 도왔다고 본다. 절대적 기준에 못 미치는 교원이 아니라 하위 10%를 자른다고 하니 보수·진보 불문하고 일제히 등을 돌린 것이다.
곽 교육감은 예비후보 시절 처음 만났다. 한 토론회 사회를 맡으면서 인사를 드렸다. 합류 제의를 받고 새로운 일을 한다는 생각으로 수락했는데, 주변에서는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출퇴근 시간 없이 자유롭게 살던 사람이 잘하겠느냐는 걱정들도 하고.(웃음) 규격화된 공조직에 열심히 적응하는 중이다.”
▼ 곽 교육감 취임 후 비서실 규모가 5명에서 10명으로 늘었다. 이에 비서실이 독단으로 업무를 처리하고, 기존 직원들과 소통하지 않는다는 비판도 나온다.
“기존 관행을 모르고는 일을 할 수 없다. 관행을 숙지하는 동시에 새로운 것을 설계해야 업무 추진이 가능하다. 관련 업무 부서 직원들과 협의하면서 업무를 익히는 중이다. 곽 교육감은 기존 교육감과 상당히 다른 교육적 지향으로 당선됐지만 관료적 합리성을 존중하는 분이다. 국가인권위원회 사무총장을 경험해 관료조직을 잘 이해하고 있다.”
▼ 교육청 직원들과 소통에 따르는 어려움은?
“처음에는 수동적인 모습이 다분했다. ‘업무와 관련한 개선안을 만들어보자’는 이야기를 ‘뭐 하는지 지켜볼게’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느낌도 있었다. 그리고 내 의견을 받아 적어 그것을 그대로 반영하려고만 했다. 그런 일처리는 겉치레다. 진심이 담기지 않은 정책은 작동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야기를 자주 나누다 보니 점차 달라지는 걸 느낀다.”
▼ 사교육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정책을 담당하는 것으로 안다. 구체적인 업무 내용은?
“사교육 시장은 대입뿐 아니라 고입도 많이 좌우한다. 특히 최근에는 외고, 국제고, 과학고 등 특목고 시장이 급팽창했다. 특목고 입시안은 교육과학기술부(이하 교과부)가 만들고 교육청은 세부 운영을 담당한다. 그동안 총론은 멋진데 각론이 총론을 배신하는 교육정책이 많았다. 그게 일상이 되면서 학부모는 정책을 불신하고, 사교육 시장은 커졌다.”
▼ 올해부터 특목고 입시에 도입되는 자기주도학습 전형은 어떻게 평가하나.
“외고 내신은 영어, 과학고 내신은 수학·과학만 보고, 비교과 활동과 면접 비중이 늘어났다. 옳은 방향이다. 과학고에서 국어를 보면 아인슈타인이 떨어지는 우를 범할 수 있다. 또 교육청 직원이 면접에 참여하고, 규정대로 선발했는지 사후 영향평가를 한다. 전체적인 안은 사교육비 줄이는 쪽으로 잘 설계했다고 본다. 실제로 특목고 학원장들을 만나면 매출이 줄었다고 한다. 다만 과학고는 조금만 잘못 관리하면 취지가 무색해질 수 있다. 입시안을 더 보완해야 한다.”
▼ 그래도 학부모들은 반신반의한다.
“1년이 지나봐야 안다. 자화자찬으로 학부모를 설득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한번 해보고 결과를 내놓으면 신뢰가 생길 것이다.”
#교과부와 충돌하지 않겠다?
7월 1일 교육감들이 취임한 후 교육계는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일제고사, 교원평가제 등으로 일부 진보교육감과 교과부가 의견 충돌을 보였다. 곽 교육감은 “교과부와 합리적으로 의견을 조율하겠다. 처음부터 무리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난 8월 19일 교육청은 학교 현장과 갈등을 빚었다. 서울시내 초·중·고교의 체벌규정을 금지하는 설명회에서 일부 교장과 교사가 답답함에 자리를 박차고 나간 것. 이에 대해 교육계 관계자들은 “교육감의 이상과 상관없이 주요 공약 전부가 갈등의 씨앗을 내포하고 있다. 교과부, 학교 현장과 충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 최근 체벌 폐지 방침에 대한 학교 현장의 반발이 거세다.
“반발하는 교장, 교사 대부분은 사립학교 소속이다. 오랫동안 한 조직에 몸담고 있는 분들이라 전통을 지지하는 측면에서 반발하는 것 같다. 곽 교육감은 온화하고 부드럽다. 하지만 인권 문제에는 강한 모습을 보인다. 체벌 문제에 대해서는 시대정신에 따라 폐지해야 한다는 생각이 분명하다. 교과부가 최근 체벌 금지 내용을 법제화하겠다고 밝혔지만, 교육청 차원에서도 인권조례안을 만들어 발표할 계획이다.”
▼ 체벌의 교육적 효과도 있지 않나. 교권 침해가 더 심각해질 가능성도 있다.
“교육적 효과를 따지는 차원으로 생각하면 답이 안 나온다. 혐연권과 흡연권 중 혐연권을 존중하는 것과 같은 논리다. 보편적인 규칙은 체벌을 반대하는 학부모의 요구를 따라야 한다. 또 때리지 못할 뿐이지 벌을 주는 것은 가능하다. 교실 뒤에 줄을 세우거나, 밖으로 내보내거나 격리하는 등. 교사와 학생이 체벌 없이 동등해지는, 서구 모델로 가는 것이다.”
▼ 교육감마다 교육가치관이 다르다. 때문에 지역별 정책 통일성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교육감 권한이 크지 않다. 핵심 제도인 승진제도와 교육과정에는 손을 못 댄다. 대입 제도도 권한 밖이다. 전국 일괄 정책에 익숙해서 그렇지,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우리 교육자치도는 낮은 편이다. 연방 국가이긴 하지만 미국, 영국은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이 없을 정도로 교육자치가 확실히 이뤄진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권한이 적다. 교육감 권한에 대해서는 추후 합리적 토론이 이뤄져야 한다.”
▼ 무상급식과 혁신학교가 주요 공약으로 꼽힌다. 구체적인 실천 계획은?
“무상급식은 내년부터 추진에 들어간다. 외부 상황이 나쁘지 않아 추진에 탄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상당수 구청장이 무상급식을 공약으로 내걸었고, 서울시도 끝까지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교육청 차원에서도 예산 절약을 검토 중이다. 현장의 불필요한 전시성 사업을 줄여나가면 예산을 확보할 수 있다. 혁신학교는 올해 겨울 첫 학교들을 지정할 계획이다. 이 역시 공약으로 여러 곳에서 내걸어 지역별 요구가 많다. 몇 해 전 특목고 유치 공약이 바람을 일으켰듯, 혁신학교도 순탄하게 진행될 것이다.”
▼ 혁신학교는 김상곤 경기도교육감이 먼저 시작했다. 경기도 모델과 내용이 같은가.
“큰 틀에서 비슷하다. 혁신학교는 한 학급 25명 내외로, 교사의 자율성을 기반으로 교육활동을 혁신하는 학교를 뜻한다. 혁신학교의 두 가지 모토는 학생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교육, 뒤처지는 학생을 돌보는 교육이다. 그러려면 교사진의 준비가 중요하다. 초·중등학교는 상대적으로 입시에서 자유로우니 보다 큰 호응이 있으리라 본다. 경기도 혁신학교도 어느 정도 성과를 내고 있고. 낙후지역의 중학교 중심으로 혁신학교를 늘려갈 계획이다.”
#이해할 수 없는 수능 개편안
“긍정적인 측면? 거의 없죠.” 이번 수능 개편안에 대해 이 보좌관은 “이대로 확정될까 봐 상당히 우려스럽다”라고 말했다. 잔뜩 찌푸린 미간과 고갯짓에서 그의 걱정은 과장이 아닌 진심으로 보였다. “좋은 점 하나는 있지 않겠느냐”는 질문에도 단호했다. 발표된 개편안에 따르면 2014년부터 수능은 A형(더 쉽게)과 B형(현행 수준)으로 두 번 시행하며, 과학탐구와 사회탐구 과목이 대폭 준다. 한 방으로 진학이 결정되는 불합리함을 개선하고, 사교육을 줄인다는 취지다. 또 언어·외국어·수리를 국어·영어·수학으로 바꿔 수능과 교과과정이 일치하도록 한다.
▼ 수능 개편안은 어떻게 평가하나.
“우리나라는 국·영·수 과목 전통이 강하다. 수능은 원래 국·영·수 중심으로 설계됐는데, 이번에 더 강화됐다. 전공, 적성과 상관없이 국·영·수를 보게 하는 것이다. 반면 사회탐구, 과학탐구는 한 과목만 달랑 선택하도록 했다. 이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들다. 유럽, 미국은 전공과 개성에 따라 적합한 과목을 선택하게 한다. 공통필수 과목은 없거나 최소화돼 있다. 우리도 하루빨리 국·영·수 마인드에서 벗어나야 한다. 현장 감각 없이 수립된 정책은 위험하다. 이번 개편안은 그런 의미에서 아쉬움이 있다.”
▼ 이번 개편안은 입학사정관제와도 엇박자로 보인다.
“입학사정관제는 개성과 적성을 입증해야 하는 제도다.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효과적으로 보여줘야 한다. 미국 대입은 이런 입학사정관제에 최적화돼 있다. 중3 이상 수준의 SAT는 필수과목은 축소화돼 있고 선택과목이 많아서 교과로 자신의 색깔을 보여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국·영·수 중심으로 붕어빵 교육을 하면서 미국식 입학사정관제를 도입하겠다고 한다. 획일화된 교과 대신 비교과 영역으로 적성을 입증하려니, 사정관제의 취지를 살리기 어렵다. 비교과 영역의 비중이 과도해져서 학생 부담이 늘어나게 된다.”
▼ 사교육 측면은 어떤가.
“사교육도 늘어날 것이다. 향후 전공에 따라 과목이 분화되는 구조에선 선행학습이 어렵다. 미리 전공을 예측하기 어려우니 선행학습을 할 여지가 줄어드는 것이다. 한데 이번 개선안은 전공과 상관없이 무조건 국·영·수를 보게 돼 있다. 내가 학원장이라면 중1부터 4년짜리 프로그램을 만들겠다. 고입 때까지 국·영·수를 완성시켜 준다면 학부모 입장에서 매력적일 것이다. 사교육 업계에 오래 있어서 정책에 따른 사교육계의 반응이 본능적으로 그려진다.”
▼ 그렇다면 대입은 어떤 방향으로 바뀌어야 할까.
“미국식이나 유럽식으로 가야 한다. 유럽은 논술형이다. 필요한 과목만 시험 보고, 국가고시인 논술로 선발한다. 미국은 SAT를 원하는 과목을 골라 1년에 8번 본다. 미국의 공교육은 논술형·토론형으로, 교사의 자율이 보장된다. 학생마다 원하는 과목, 시험 보는 시기 등 작전이 모두 달라서, 학교가 장단을 맞출 수 없다. 수업시간에 객관식 문제집을 푸는 나라는 우리뿐이다. 입학사정관제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이런 기조로 가면 공교육, 비교과 활동, 사교육이 따로 놀면서 각각의 문제가 심화될 것이다.”
▼ 교육정책은 현장을 고려해 신중하게 바꿔나가야 한다.
“대입은 바꾸려면 확 바꿔야 한다. 교육은 깔때기 구조라서 아래로부터 바꾸기는 굉장히 어렵다. 혁신학교가 그런 시도인데, 중학교까지는 개선이 상당 부분 가능해도 고등학교는 어렵다. 고등학교는 대입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다양화를 넘어 획일화로’?”
대표적인 MB정부 교육정책으로는 ‘고교다양화 300 프로젝트’ ‘대학자율화 3단계’ ‘전국단위 일제고사’ 등이 있다. 정책 대부분은 이주호 교과부 장관 내정자의 손에서 탄생했다. 그가 쓴 책 ‘평준화를 넘어 다양화로’가 정책의 밑그림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이와 관련 이범 씨는 “다양화는 좋다. 한데 지금 정책들은 ‘다양화를 넘어 획일화로’처럼 보인다”라고 지적했다.
▼ 현 교육정책 전반을 평가한다면.
“신자유주의를 남용하는 것에 저항감을 갖고 있지만, 지금의 교육정책 기조는 상당히 신자유적이다. 경쟁을 통해 효율을 재고하려면 잣대가 필요하다. 대입은 수능이, 그 아래 학년은 일제고사가 잣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주호 장관 내정자는 학력의 다양한 의미를 읽어내지 못하는 것 같다. 미국에서 대학원뿐 아니라 초·중·고 교육을 경험했으면 생각이 달랐을 것이다.
정부는 다양화를 강조하지만 현장에서는 다양화가 죽고 있다. 당연한 일이다. 일제고사나 수능 개편안은 모두 국·영·수 중심 문제풀이식 교육을 유발한다. 평가 잣대가 협소하니 거기에 맞출 수밖에. 자율형사립고 대부분이 특성화는커녕 국·영·수 중심 문제풀이 수업을 확대하고 있다. ‘고교다양화 300 프로젝트’를 해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실질적인 다양화는 교사나 학생 수준에서 이뤄져야 한다. 그러려면 앞서 말했듯 유럽이나 미국식 대입을 도입해야 한다.”
▼ 대학 자율화 정책에 따른 입학사정관제에 대한 논란도 끊이지 않는다.
“대학자율화는 초기부터 강하게 문제 제기한 부분이다. 헌법상 대학 자율화는 학문의 자유를 일컫는다. 하지만 우리는 엉뚱하게도 학생 선발과 연관해 자율을 이야기한다. 대입을 학교에만 맡기는 게 옳은지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우리나라는 국립대뿐 아니라 사립대도 국고보조금 등 혜택을 많이 받고 있으니까. 우리나라 대학은 나름 우아한 교육철학을 내세우면서도 치열하게 서열 경쟁을 한다. 그건 미국도 마찬가지다. 하버드나 예일도 학벌장사를 한다. 하지만 그건 그리 좋은 모습이 아니다. 그래서 아이비리그 대학 중에는 공식적으로 기여 입학을 인정하지 않는 곳이 많다. 기여 입학이 흔한 줄 아는데, 미국도 일부 사립대만 그렇다. 기여 입학, 사교육비를 유발하는 비합리적인 대입을 내버려둬선 안 된다. 대입 제도를 다루는 협의기구를 만들어야 한다. 대학 총장이 모인 대학교육협의회는 기득권 침해하는 일을 할 리가 없으니까.”
▼ 교원평가제 등 교사 사회 개혁정책에 대한 의견은?
“현재의 교원평가제는 탁상행정이다. 학부모 평가는 의미가 없고, 동료교사 평가는 참고만 해야 한다. 평가는 학생 중심 수업 평가로 가야 한다. 초등학교 고학년만 돼도 수업 평가가 가능하다고 본다. 또 평가 지표도 교육철학을 반영해 개선해야 한다. 예컨대 학생들의 발표·토론을 중심으로 하는 미래지향적 교육을 했는지가 평가에 반영돼야 한다.”
그의 교육에 대한 관심은 회의와 분노에서 출발했다. 수입이 끊길 것을 예상하고 사둔 건물 덕분일까. 그 분노는 ‘교육’이 ‘일’이 된 다음에도 다행히 그치지 않았다. “대부분 교육 현실에 분노하다가도 아이가 대학 가면 잊어버리더라고요.(웃음)” 아홉 살, 일곱 살, 네 살, 이제 9개월 된 자녀를 둔 다둥이 아빠가 건넨 마지막 인사. 교육계 현장을 종횡무진 움직이는 그의 모습을 한참 더 볼 수 있을 것 같다.
서울대 대학원에 다니던 청년이 스타 강사로 변신했다.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강의가 입소문을 타면서 학생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분당에서 강남으로 외연을 넓히며 승승장구하던 그는 2000년 메가스터디 창립 멤버로 참여했고, 2003년 연봉 18억 원의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연봉과 명성이 정점을 찍자 회의가 밀려왔다.
“연봉이 1억8000만 원만 돼도 괜찮았을 텐데, 18억 원은 말이 안 되잖아요. 그 시스템 속에서 피해 입는 학생들을 보면서 우리나라 교육시스템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미련 없이 은퇴한 그는 이후 사교육 투사로 변신했다. 교육평론가로 학부모들에게 사교육의 이면을 알리는 한편 ‘굿바이 사교육’ ‘이범의 교육특강’ 등의 책을 펴냈다. 그런 그가 최근 인생의 새로운 챕터를 열었다.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의 정책보좌관으로 계약직 공무원이 된 것. 7월 16일부터 출근한 새내기 공무원 이범(41) 씨를 8월 23일 서울시교육청(교육청)에서 만났다.
#‘사교육 암행어사’로 교육청 입성
약속 시간보다 10분 일찍 도착했다. 8층 비서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10여 개의 눈이 일제히 날아와 꽂힌다. “누구를 찾아오셨습니까?” 2초 만에 날아오는 신원 확인 질문. 느슨한 사무실은 낯선 이가 방문해도 경계하지 않았다. 막 둥지를 꾸린 곽 교육감의 비서실에는 기분 좋은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 교육청 비서실에 어떻게 합류하게 됐나.
“지난 교육감 선거에 이어 올해에도 선거 지원 활동을 했다. 경기와 서울을 짝홀로 번갈아 가며 유세를 펼쳤다. 경기는 안정권이었지만 서울은 위태로워서 막판까지 결과를 점치기 어려웠다. 결과적으로 상대 후보의 10% 교원퇴출 공약이 승리를 도왔다고 본다. 절대적 기준에 못 미치는 교원이 아니라 하위 10%를 자른다고 하니 보수·진보 불문하고 일제히 등을 돌린 것이다.
곽 교육감은 예비후보 시절 처음 만났다. 한 토론회 사회를 맡으면서 인사를 드렸다. 합류 제의를 받고 새로운 일을 한다는 생각으로 수락했는데, 주변에서는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출퇴근 시간 없이 자유롭게 살던 사람이 잘하겠느냐는 걱정들도 하고.(웃음) 규격화된 공조직에 열심히 적응하는 중이다.”
▼ 곽 교육감 취임 후 비서실 규모가 5명에서 10명으로 늘었다. 이에 비서실이 독단으로 업무를 처리하고, 기존 직원들과 소통하지 않는다는 비판도 나온다.
“기존 관행을 모르고는 일을 할 수 없다. 관행을 숙지하는 동시에 새로운 것을 설계해야 업무 추진이 가능하다. 관련 업무 부서 직원들과 협의하면서 업무를 익히는 중이다. 곽 교육감은 기존 교육감과 상당히 다른 교육적 지향으로 당선됐지만 관료적 합리성을 존중하는 분이다. 국가인권위원회 사무총장을 경험해 관료조직을 잘 이해하고 있다.”
▼ 교육청 직원들과 소통에 따르는 어려움은?
“처음에는 수동적인 모습이 다분했다. ‘업무와 관련한 개선안을 만들어보자’는 이야기를 ‘뭐 하는지 지켜볼게’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느낌도 있었다. 그리고 내 의견을 받아 적어 그것을 그대로 반영하려고만 했다. 그런 일처리는 겉치레다. 진심이 담기지 않은 정책은 작동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야기를 자주 나누다 보니 점차 달라지는 걸 느낀다.”
학원강사로 승승장구하던 이범 씨는 2003년 은퇴한 뒤 무료 온라인 강의를 시작했다.
“사교육 시장은 대입뿐 아니라 고입도 많이 좌우한다. 특히 최근에는 외고, 국제고, 과학고 등 특목고 시장이 급팽창했다. 특목고 입시안은 교육과학기술부(이하 교과부)가 만들고 교육청은 세부 운영을 담당한다. 그동안 총론은 멋진데 각론이 총론을 배신하는 교육정책이 많았다. 그게 일상이 되면서 학부모는 정책을 불신하고, 사교육 시장은 커졌다.”
▼ 올해부터 특목고 입시에 도입되는 자기주도학습 전형은 어떻게 평가하나.
“외고 내신은 영어, 과학고 내신은 수학·과학만 보고, 비교과 활동과 면접 비중이 늘어났다. 옳은 방향이다. 과학고에서 국어를 보면 아인슈타인이 떨어지는 우를 범할 수 있다. 또 교육청 직원이 면접에 참여하고, 규정대로 선발했는지 사후 영향평가를 한다. 전체적인 안은 사교육비 줄이는 쪽으로 잘 설계했다고 본다. 실제로 특목고 학원장들을 만나면 매출이 줄었다고 한다. 다만 과학고는 조금만 잘못 관리하면 취지가 무색해질 수 있다. 입시안을 더 보완해야 한다.”
▼ 그래도 학부모들은 반신반의한다.
“1년이 지나봐야 안다. 자화자찬으로 학부모를 설득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한번 해보고 결과를 내놓으면 신뢰가 생길 것이다.”
#교과부와 충돌하지 않겠다?
7월 1일 교육감들이 취임한 후 교육계는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일제고사, 교원평가제 등으로 일부 진보교육감과 교과부가 의견 충돌을 보였다. 곽 교육감은 “교과부와 합리적으로 의견을 조율하겠다. 처음부터 무리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난 8월 19일 교육청은 학교 현장과 갈등을 빚었다. 서울시내 초·중·고교의 체벌규정을 금지하는 설명회에서 일부 교장과 교사가 답답함에 자리를 박차고 나간 것. 이에 대해 교육계 관계자들은 “교육감의 이상과 상관없이 주요 공약 전부가 갈등의 씨앗을 내포하고 있다. 교과부, 학교 현장과 충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 최근 체벌 폐지 방침에 대한 학교 현장의 반발이 거세다.
“반발하는 교장, 교사 대부분은 사립학교 소속이다. 오랫동안 한 조직에 몸담고 있는 분들이라 전통을 지지하는 측면에서 반발하는 것 같다. 곽 교육감은 온화하고 부드럽다. 하지만 인권 문제에는 강한 모습을 보인다. 체벌 문제에 대해서는 시대정신에 따라 폐지해야 한다는 생각이 분명하다. 교과부가 최근 체벌 금지 내용을 법제화하겠다고 밝혔지만, 교육청 차원에서도 인권조례안을 만들어 발표할 계획이다.”
▼ 체벌의 교육적 효과도 있지 않나. 교권 침해가 더 심각해질 가능성도 있다.
“교육적 효과를 따지는 차원으로 생각하면 답이 안 나온다. 혐연권과 흡연권 중 혐연권을 존중하는 것과 같은 논리다. 보편적인 규칙은 체벌을 반대하는 학부모의 요구를 따라야 한다. 또 때리지 못할 뿐이지 벌을 주는 것은 가능하다. 교실 뒤에 줄을 세우거나, 밖으로 내보내거나 격리하는 등. 교사와 학생이 체벌 없이 동등해지는, 서구 모델로 가는 것이다.”
▼ 교육감마다 교육가치관이 다르다. 때문에 지역별 정책 통일성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교육감 권한이 크지 않다. 핵심 제도인 승진제도와 교육과정에는 손을 못 댄다. 대입 제도도 권한 밖이다. 전국 일괄 정책에 익숙해서 그렇지,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우리 교육자치도는 낮은 편이다. 연방 국가이긴 하지만 미국, 영국은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이 없을 정도로 교육자치가 확실히 이뤄진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권한이 적다. 교육감 권한에 대해서는 추후 합리적 토론이 이뤄져야 한다.”
▼ 무상급식과 혁신학교가 주요 공약으로 꼽힌다. 구체적인 실천 계획은?
“무상급식은 내년부터 추진에 들어간다. 외부 상황이 나쁘지 않아 추진에 탄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상당수 구청장이 무상급식을 공약으로 내걸었고, 서울시도 끝까지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교육청 차원에서도 예산 절약을 검토 중이다. 현장의 불필요한 전시성 사업을 줄여나가면 예산을 확보할 수 있다. 혁신학교는 올해 겨울 첫 학교들을 지정할 계획이다. 이 역시 공약으로 여러 곳에서 내걸어 지역별 요구가 많다. 몇 해 전 특목고 유치 공약이 바람을 일으켰듯, 혁신학교도 순탄하게 진행될 것이다.”
▼ 혁신학교는 김상곤 경기도교육감이 먼저 시작했다. 경기도 모델과 내용이 같은가.
“큰 틀에서 비슷하다. 혁신학교는 한 학급 25명 내외로, 교사의 자율성을 기반으로 교육활동을 혁신하는 학교를 뜻한다. 혁신학교의 두 가지 모토는 학생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교육, 뒤처지는 학생을 돌보는 교육이다. 그러려면 교사진의 준비가 중요하다. 초·중등학교는 상대적으로 입시에서 자유로우니 보다 큰 호응이 있으리라 본다. 경기도 혁신학교도 어느 정도 성과를 내고 있고. 낙후지역의 중학교 중심으로 혁신학교를 늘려갈 계획이다.”
#이해할 수 없는 수능 개편안
“긍정적인 측면? 거의 없죠.” 이번 수능 개편안에 대해 이 보좌관은 “이대로 확정될까 봐 상당히 우려스럽다”라고 말했다. 잔뜩 찌푸린 미간과 고갯짓에서 그의 걱정은 과장이 아닌 진심으로 보였다. “좋은 점 하나는 있지 않겠느냐”는 질문에도 단호했다. 발표된 개편안에 따르면 2014년부터 수능은 A형(더 쉽게)과 B형(현행 수준)으로 두 번 시행하며, 과학탐구와 사회탐구 과목이 대폭 준다. 한 방으로 진학이 결정되는 불합리함을 개선하고, 사교육을 줄인다는 취지다. 또 언어·외국어·수리를 국어·영어·수학으로 바꿔 수능과 교과과정이 일치하도록 한다.
▼ 수능 개편안은 어떻게 평가하나.
“우리나라는 국·영·수 과목 전통이 강하다. 수능은 원래 국·영·수 중심으로 설계됐는데, 이번에 더 강화됐다. 전공, 적성과 상관없이 국·영·수를 보게 하는 것이다. 반면 사회탐구, 과학탐구는 한 과목만 달랑 선택하도록 했다. 이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들다. 유럽, 미국은 전공과 개성에 따라 적합한 과목을 선택하게 한다. 공통필수 과목은 없거나 최소화돼 있다. 우리도 하루빨리 국·영·수 마인드에서 벗어나야 한다. 현장 감각 없이 수립된 정책은 위험하다. 이번 개편안은 그런 의미에서 아쉬움이 있다.”
▼ 이번 개편안은 입학사정관제와도 엇박자로 보인다.
“입학사정관제는 개성과 적성을 입증해야 하는 제도다.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효과적으로 보여줘야 한다. 미국 대입은 이런 입학사정관제에 최적화돼 있다. 중3 이상 수준의 SAT는 필수과목은 축소화돼 있고 선택과목이 많아서 교과로 자신의 색깔을 보여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국·영·수 중심으로 붕어빵 교육을 하면서 미국식 입학사정관제를 도입하겠다고 한다. 획일화된 교과 대신 비교과 영역으로 적성을 입증하려니, 사정관제의 취지를 살리기 어렵다. 비교과 영역의 비중이 과도해져서 학생 부담이 늘어나게 된다.”
▼ 사교육 측면은 어떤가.
“사교육도 늘어날 것이다. 향후 전공에 따라 과목이 분화되는 구조에선 선행학습이 어렵다. 미리 전공을 예측하기 어려우니 선행학습을 할 여지가 줄어드는 것이다. 한데 이번 개선안은 전공과 상관없이 무조건 국·영·수를 보게 돼 있다. 내가 학원장이라면 중1부터 4년짜리 프로그램을 만들겠다. 고입 때까지 국·영·수를 완성시켜 준다면 학부모 입장에서 매력적일 것이다. 사교육 업계에 오래 있어서 정책에 따른 사교육계의 반응이 본능적으로 그려진다.”
▼ 그렇다면 대입은 어떤 방향으로 바뀌어야 할까.
“미국식이나 유럽식으로 가야 한다. 유럽은 논술형이다. 필요한 과목만 시험 보고, 국가고시인 논술로 선발한다. 미국은 SAT를 원하는 과목을 골라 1년에 8번 본다. 미국의 공교육은 논술형·토론형으로, 교사의 자율이 보장된다. 학생마다 원하는 과목, 시험 보는 시기 등 작전이 모두 달라서, 학교가 장단을 맞출 수 없다. 수업시간에 객관식 문제집을 푸는 나라는 우리뿐이다. 입학사정관제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이런 기조로 가면 공교육, 비교과 활동, 사교육이 따로 놀면서 각각의 문제가 심화될 것이다.”
▼ 교육정책은 현장을 고려해 신중하게 바꿔나가야 한다.
“대입은 바꾸려면 확 바꿔야 한다. 교육은 깔때기 구조라서 아래로부터 바꾸기는 굉장히 어렵다. 혁신학교가 그런 시도인데, 중학교까지는 개선이 상당 부분 가능해도 고등학교는 어렵다. 고등학교는 대입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다양화를 넘어 획일화로’?”
대표적인 MB정부 교육정책으로는 ‘고교다양화 300 프로젝트’ ‘대학자율화 3단계’ ‘전국단위 일제고사’ 등이 있다. 정책 대부분은 이주호 교과부 장관 내정자의 손에서 탄생했다. 그가 쓴 책 ‘평준화를 넘어 다양화로’가 정책의 밑그림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이와 관련 이범 씨는 “다양화는 좋다. 한데 지금 정책들은 ‘다양화를 넘어 획일화로’처럼 보인다”라고 지적했다.
▼ 현 교육정책 전반을 평가한다면.
“신자유주의를 남용하는 것에 저항감을 갖고 있지만, 지금의 교육정책 기조는 상당히 신자유적이다. 경쟁을 통해 효율을 재고하려면 잣대가 필요하다. 대입은 수능이, 그 아래 학년은 일제고사가 잣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주호 장관 내정자는 학력의 다양한 의미를 읽어내지 못하는 것 같다. 미국에서 대학원뿐 아니라 초·중·고 교육을 경험했으면 생각이 달랐을 것이다.
정부는 다양화를 강조하지만 현장에서는 다양화가 죽고 있다. 당연한 일이다. 일제고사나 수능 개편안은 모두 국·영·수 중심 문제풀이식 교육을 유발한다. 평가 잣대가 협소하니 거기에 맞출 수밖에. 자율형사립고 대부분이 특성화는커녕 국·영·수 중심 문제풀이 수업을 확대하고 있다. ‘고교다양화 300 프로젝트’를 해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실질적인 다양화는 교사나 학생 수준에서 이뤄져야 한다. 그러려면 앞서 말했듯 유럽이나 미국식 대입을 도입해야 한다.”
▼ 대학 자율화 정책에 따른 입학사정관제에 대한 논란도 끊이지 않는다.
“대학자율화는 초기부터 강하게 문제 제기한 부분이다. 헌법상 대학 자율화는 학문의 자유를 일컫는다. 하지만 우리는 엉뚱하게도 학생 선발과 연관해 자율을 이야기한다. 대입을 학교에만 맡기는 게 옳은지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우리나라는 국립대뿐 아니라 사립대도 국고보조금 등 혜택을 많이 받고 있으니까. 우리나라 대학은 나름 우아한 교육철학을 내세우면서도 치열하게 서열 경쟁을 한다. 그건 미국도 마찬가지다. 하버드나 예일도 학벌장사를 한다. 하지만 그건 그리 좋은 모습이 아니다. 그래서 아이비리그 대학 중에는 공식적으로 기여 입학을 인정하지 않는 곳이 많다. 기여 입학이 흔한 줄 아는데, 미국도 일부 사립대만 그렇다. 기여 입학, 사교육비를 유발하는 비합리적인 대입을 내버려둬선 안 된다. 대입 제도를 다루는 협의기구를 만들어야 한다. 대학 총장이 모인 대학교육협의회는 기득권 침해하는 일을 할 리가 없으니까.”
▼ 교원평가제 등 교사 사회 개혁정책에 대한 의견은?
“현재의 교원평가제는 탁상행정이다. 학부모 평가는 의미가 없고, 동료교사 평가는 참고만 해야 한다. 평가는 학생 중심 수업 평가로 가야 한다. 초등학교 고학년만 돼도 수업 평가가 가능하다고 본다. 또 평가 지표도 교육철학을 반영해 개선해야 한다. 예컨대 학생들의 발표·토론을 중심으로 하는 미래지향적 교육을 했는지가 평가에 반영돼야 한다.”
그의 교육에 대한 관심은 회의와 분노에서 출발했다. 수입이 끊길 것을 예상하고 사둔 건물 덕분일까. 그 분노는 ‘교육’이 ‘일’이 된 다음에도 다행히 그치지 않았다. “대부분 교육 현실에 분노하다가도 아이가 대학 가면 잊어버리더라고요.(웃음)” 아홉 살, 일곱 살, 네 살, 이제 9개월 된 자녀를 둔 다둥이 아빠가 건넨 마지막 인사. 교육계 현장을 종횡무진 움직이는 그의 모습을 한참 더 볼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