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란 직후임에도 선조가 정성 들여 만든 의인왕후 능침의 석물들.
목릉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東九陵)에서 가장 깊숙한 곳인 건원릉의 동편 언덕에 자리했다. 왼쪽 정자각 바로 뒤쪽으로 보이는 것이 선조의 능침이고 그 오른쪽이 의인왕후, 비각 오른쪽이 인목왕후의 것이다.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신로와 어로는 곡선형을 이루었다.
명종이 승하했으나 그를 이을 적손(嫡孫)이 없자, 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군의 아들 하성군이 명종의 양자로 입적돼 왕에 즉위했는데 그가 선조다. 선조는 명종 7년(1552) 11월 11일 인달방(仁達坊) 덕흥군 사저에서 태어났다. 선조는 서손(庶孫) 출신으로 방계승통을 한 최초의 임금이다.
하성군은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고 기백과 도량이 영특해 모두 비범하게 여겼다. 어느 날 명종이 하성군과 그의 두 형을 불러들여 자신이 쓰고 있던 익선관(冠)을 써보라 했다. 이때 하성군이 “군왕께서 쓰시던 것을 신자(臣子)가 어떻게 감히 머리에 얹어 쓸 수 있겠습니까”라며 사양하니 명종이 경탄하면서 “마땅히 이 관을 네게 주겠다”고 했다. 또 명종은 “임금과 아버지 중 누가 더 중하냐”고 묻고는 글로 답하라 했는데 하성군이 “임금과 아버지는 똑같은 것이 아니지만 충(忠)과 효(孝)는 본래 하나입니다”라고 하자 매우 기특해했다.
덕흥군과 하동군부인 정씨의 3남으로 태어난 하성군이 졸지에 왕위에 오른 것은 그의 나이 16세 때라 명종비 인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그러나 1년 뒤부터 친정을 했으니 조선 왕 중 가장 어린 나이에 시작한 것이다. 세자교육을 받지 않은 선조는 초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난세에 나타난 성군이랄까? 성리학적 왕도정치를 구현하고 정국을 안정시키고자 인격이 훌륭하고 덕망이 높은 이황, 이이, 정철, 이덕형, 이항복 등 많은 인재를 등용해 사림이 중앙정치 무대에서 주도권을 잡았다. 그러나 정국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사림 내부의 분열로 동인과 서인의 붕당 간 대립이 심해지고, 임진왜란이 일어나 인적 손실이 막대했을 뿐 아니라 황폐화한 국토, 문화적 손실 등의 상처가 오래도록 아물지 못하고 정국은 혼란스러웠다.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는 반성부원군 나주 박씨 박응순의 딸로 15세에 왕비에 책봉됐다. 1569년 어린 왕 선조가 친정할 때 이루어진 결혼이다. 착하고 어진 왕비로 알려져 있던 의인왕후는 1600년 6월 27일 임시 궁궐인 월산대군의 집에서 승하했다. 선조는 임란 때 피해를 본 선릉과 정릉 그리고 자신의 친아버지 덕흥대원군(大院君·왕이 자손 없이 죽어 종친 중에서 왕위를 계승했을 때 그 왕의 생부에게 봉하던 직위, 최초의 대원군임)의 산소까지 참변을 당해 부랴부랴 개수했는데 그 직후 의인왕후가 승하해 황망해했다. 전란으로 국력은 약해지고 능역을 조영하는 산릉도감의 인력 확보도 어려웠던 터라 조정에서는 선릉 개수에 쓰려던 지석을 그대로 써 민력을 덜기도 했다.
1 목릉의 정자각 뒤로 연결되는 신로는 조선 왕릉 중 가장 길게 조영됐다. 인목왕후 능에서 바라본 목릉. 앞의 터는 인목왕후 승하 후 3년간 사용한 가정자각 터로 보기 드문 유적이다. 2 임란을 겪고 조영된 선조의 능침.
이때 선조는 자신도 의인왕후와 함께 묻히고자 쌍분의 수릉(壽陵)을 만들려 했다. 선조 승하 8년 전의 일이다. 선조는 마침 왜란으로 폐허가 된 도성을 재건하고자 불러들였던 명나라의 풍수가인 섭정국(葉靖國) 등을 동원, 고양·파주를 비롯해 여러 터를 물색했다. 중추부사 이덕형, 영의정 이항복 등 많은 논객과 청오경, 금낭경, 칠요구성법, 지리신서, 정혈법, 호신순의 책 등을 보며 여러 차례 논의했으나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수개월 동안 우왕좌왕했다. 선조의 우유부단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심지어 포천과 교하 두 곳을 결정하고 5000여 명을 동원, 40일 동안 작업을 하다가 다시 터를 물색하게 한 일도 있었다. 전란이 끝난 뒤라 국고는 바닥이 났고 신하들은 자기 살길 마련에 바빠, 왕권은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황이었다. 왕이 길지를 찾으라고 수차례 지시를 내렸으나 사대부마저 자신들의 선영을 선뜻 내놓지 않았다.
이처럼 4개월 동안 논란만 계속되자 이항복 등은 우리나라의 왕릉 인산(因山) 법도는 중국이나 사대부의 법도와 달라 “형세와 향배가 필수적일 뿐 아니라, 혈도가 광활해 석물을 놓을 수 있어야 하며, 명당이 넓게 있어야 하고, 제궁을 지을 수 있으며, 청룡과 백호가 분명하고, 마주보는 산이 법대로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미 200여 년 전 조성된 태조 건원릉이 있는 검암산을 지목하며 “이곳은 태조께서 무학과 함께 대대로 왕릉을 쓸 수 있는 곳으로 평가받았다”고 추천했다. 의인왕후 승하 5개월 만에 결정된 것이다. 결국 건원릉 동측 세 번째 언덕에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안장하고 유릉(裕陵)이라 했다. 5개월의 국장 기간을 넘기고 승하 6개월 만에 안장했으나 이곳은 지금까지도 풍수가 사이에 길지냐 흉지냐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선조는 의인왕후 승하 후인 1602년 방년 19세인 연흥부원군 김제남의 딸을 계비(인목왕후)로 맞이했다. 그리고 55세인 1606년에 늦둥이 영창대군을 얻어 총애했다. 그러자 영창대군을 세자로 교체하자는 의견이 나왔으나 당시는 이미 선조의 둘째 아들 광해군(공빈 김씨 소생)이 임진왜란 때의 공을 인정받아 세자로 책봉된 상태였다.
1608년 2월 1일 선조가 정릉동 행궁에서 점심에 찹쌀밥을 먹고 기(氣)가 막혀 급작스럽게 승하했다. 이때 어의는 허준(許浚)이었으나 손쓸 수가 없었다. 다음 날 33세인 세자 광해군이 곧바로 즉위해 상례를 주도했다.
광해군은 선조가 의인왕후와 함께 묻히기를 원했던 자리를 무시하고 이항복, 이원익, 이덕형 등과 논의 끝에 건원릉 서측 다섯 번째 능선에 모셨다. 현 경릉(景陵) 터로 추정된다. 선조의 휘호를 현문의무성경달효(顯文毅武聖敬達孝)로 올리고 묘호를 선종(宣宗), 능호를 목릉이라 했다. 후에 인조 때 선종은 선조로 묘호를 바꿨다.
이후 부실공사에 풍수적 논란까지 일자, 인조반정 후 인조가 직접 행차해 1630년 11월 21일 의인왕후 능침 좌측으로 천장했다. 건원릉 지역은 세조가 단종에게서 왕위를 찬탈한 이후 꺼리던 자리였다. 선조의 능침을 이곳으로 선정한 것은 최초의 방계혈통으로 왕위에 올라 사림의 왕권 도전을 뿌리친 선조의 혈통이 태조의 음덕을 받아 길이 왕조의 발전을 기원하는 바람이었을 것이다.
광해군이 즉위한 뒤 영창대군을 세자로 추대하려던 세력인 소북파는 광해군을 지지하던 대북파에 의해 쫓겨났다. 영창대군은 강화로 쫓겨나 사사되고 인목대비는 폐서인돼 유폐됐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복호돼 대왕대비로서 인조의 후견인 노릇을 했다. 인목대비는 어려서 총명하고 왕비가 돼서는 인자했으며 검소하고 글씨에 능했다고 전해진다.
인조 10년(1632) 6월 28일 인목대비 김씨가 인경궁(仁慶宮) 흠명전(欽明殿)에서 승하했다. 자신의 후견인이었던 인목대비가 승하하자 인조는 정성을 다해 모셨다. 묘호는 인목으로 하고 능호를 혜릉(惠陵)이라 했다. 선조의 목릉은 이미 2년 전 의인왕후 오른쪽으로 옮겨져 있었다. 선조의 능침 오른쪽이 인목왕후 능침으로 추천되나, 우상좌하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해 의인왕후 능침의 왼쪽 두 번째 언덕으로 결정했다. 정자각은 그대로 두고 신로로 연결했으며 세 능침의 능호를 목릉으로 통일했다. 이때 산릉 책임자는 한음 이덕형이었다.
3 드넓은 잔디정원을 가지고 있는 목릉. 정자각 뒤가 선조의 능침, 왼쪽이 의인왕후, 오른쪽이 인목왕후 능침이다. 의인왕후와 인목왕후의 능침은 숲으로 가려 서로 보이지 않게 했다. 4 눈을 감고 입을 꼭 다문 문석인. 임란을 거치면서 할 말을 잃었을까, 아니면 말하기 싫어서일까.
선조의 능침에는 다른 두 왕비 능침에는 보이지 않는 병풍석이 둘러쳐 있다. 병풍석 대석과 장명등 대석에 새겨진 연화와 모란의 꽃문양이 독특하다. 이것은 이후에 조성되는 왕릉 석물의 문양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이는데 조선 말기까지 계속 사용됐다.
의인왕후 박씨 능침의 상설제도는 병풍석이 설치돼 있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선조의 것과 같다. 능선이 길지 않은 단유형(短乳形)이며, 선조의 능침보다 폭이 좁다. 석물은 조형미가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 왜란을 겪은 뒤여서 뛰어난 장인을 구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왕후 김씨의 능침 역시 의인왕후의 것과 같은 형식을 따르지만 좀 더 숙련된 솜씨로 만든 듯하며, 전체적으로 생동감이 있다. 인조의 정성이 담긴 것이다. 그러나 문무석인의 허리 윗부분과 아랫부분의 비율이 2대 1 정도로 상하의 균형이 맞지 않아 다소 불안해 보이기도 한다. 인목왕후의 능침 아래에는 흉례로 모시는 가정자각 터가 그대로 남아 있어 보존 가치가 있다.
목릉에서 의인왕후의 능침은 남편 선조가, 선조의 능침은 광해군이, 인목대비의 능침은 인조가 감독한 것이므로 시대별 조영의 특징을 비교할 수 있다.
2007년 겨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국제학술대회 참가 학자들은 이곳 건원릉과 목릉을 답사했다. 필자는 목릉을 “조선 왕릉 중 가장 자연친화적이며, 중국이나 베트남과 달리 우상좌하로 능침을 배치했음을 설명했다. 같은 유교 국가였던 중국, 베트남 등은 가운데 왕, 양쪽에 정비와 계비를 배치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조선의 왕릉은 우측에 왕의 능침, 좌측에 정비와 계비의 능침을 순서로 배치했다. 이러한 특징은 동구릉 지구의 목릉과 경릉(景陵)에서 잘 나타난다. 이 우상좌하의 제도는 세종대왕의 지시에 따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종대왕이 우리만의 독특하고 우수한 문화 창달에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필자는 또 목릉은 인류사의 많은 왕릉 중 잔디정원이 가장 넓은 왕릉이라 설명했다. 그리고 정자각 뒤 신로는 가장 길 뿐 아니라 자연스럽게 조영된 것이 특징이라고 강조했다. 의인왕후의 능침과 인목왕후의 능침은 숲으로 가려 서로 보이지 않게 하고, 선조의 능침에서는 두 왕비의 능침을 마주보게 한 것이 특이하고 흥미롭다. 정비와 계비 사이를 고려한 후손들의 심리적 배려가 돋보인다.
세계 유산의 보존과 관리는 진정성이 요구된다. 조선 왕릉은 많은 기록물의 진정성 확보에 큰 도움이 됐다. 특히 상례를 자세히 기록한 각종 의궤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임란으로 많은 기록물이 소실돼 현재 남아 있는 도감은 의인왕후의 상례를 기록한 의궤가 최초의 것으로 왕릉 연구와 관리에 도움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