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동아일보 제7대 사장을 지낸 근촌 백관수 선생. 동아DB
도쿄서 2·8 독립선언서 낭독
근촌은 1889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열세 살 때 서당에서 인촌 김성수를 만나 깊은 교분을 쌓으며 조국 독립에 대한 열정과 의지를 나눴다. 1907년 두 젊은이는 내소사 청련암(靑蓮庵)을 찾아가 호연지기를 펴는데, 뜻밖에 고하 송진우가 찾아와 함께 나라 장래를 걱정했다.근촌이 일본 메이지대에 유학 중이던 1919년 1월 6일 도쿄 조선기독교회관에서 조선인 유학생 웅변대회가 열렸다. 이 모임에서 유학생들은 조선 독립을 일본 내각과 각국 대사, 공사들에게 청원할 것을 결의했다. 이때 백관수, 김도연 등 10인이 조선독립운동 대책위원으로 뽑혔다.
이들은 2월 8일 학우회 총회를 조선기독교회관 강당에서 개최했다. 이날 근촌이 연단에 올라 비장한 음성으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장내는 터질 듯한 박수 속에서 이를 제지하려는 일본 경찰과 학생들 사이에 격투가 벌어졌고 우렁찬 독립 만세 소리가 장내를 뒤덮었다. 난투극 끝에 근촌을 비롯한 학생 9명이 체포됐으며, 참가 학생 수백 명이 검거됐다. 3·1 독립운동을 앞두고 도쿄에서 일어난 2·8 독립선언은 우리 독립운동사의 한 페이지를 찬란하게 장식했다.
1936년 8월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동아일보는 무기한 정간 처분을 당했다. 신문 속간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인촌과 고하에게 일본 총독부는 “동아일보 제호를 바꿔라” “폐간 조치하겠다”는 협박을 계속했다. 인촌은 근촌 백관수를 사장으로 하고 사장인 고하와 취체역인 자신이 회사를 떠나겠다는 마지막 카드를 제시했으며, 총독부가 이 제의를 받아들여 동아일보는 9개월간 정간을 마감했고 근촌이 제7대 사장으로 취임했다.
1940년 1월 총독부 경무국장은 백관수 사장과 송진우 고문을 불러 동아일보는 폐간한 뒤 매일신문에 통합하라고 했다. 그러나 근촌은 이를 즉각 거절했다. 그러자 총독부는 “동아일보 간부들이 김성수 집에 모여 비밀결사를 모의했다”는 엉뚱한 혐의를 뒤집어씌워 백관수 사장 등 간부들을 구속했다. 근촌은 고등계 형사들에게 연행되기 직전 편집국에 들어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내 손으로 폐간계에 서명 날인하지 않겠다”는 인사말을 남기고 끌려갔다. 근촌은 구속 중에도 목숨 걸고 자진 폐간을 끝까지 거부했다. 총독부는 수감 중인 동아일보 중역들을 불러 모아 중역회의를 열도록 하고 발행인 겸 편집인을 근촌 대신 병중에 있던 임정엽 상무로 변경토록 강요해 임정엽 명의로 폐간계를 내게 했다.

서울언론인클럽은 2015년 2월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근촌 백관수 선생 생애와 업적 조명’ 심포지엄을 열었다. 동아DB
“죽어도 폐간계 서명 않겠다”
동아일보 강제 폐간 후 근촌은 향리 고창으로 내려가 은둔의 나날을 보냈다. 그러다 해방 후 고향 고창에서 제헌의원에 당선했다. 그는 해방 정국에서 국회 법사위원장으로 선출돼 신생 대한민국의 법적 기틀을 마련하는 등 건국 과정에서 중대한 역할을 맡았다.1950년 6·25사변이 발발했고, 근촌은 7월 2일 북한 정치보위부원들에 의해 납북됐다. 남한에 알려진 몇 가지 자료로는 근촌이 10여 년 후 1961년 3월 평북 선천의 결핵 요양병원에서 생을 마감한 것으로 돼 있다. 이 자료는 공인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북한에서 10여 년을 생존했다는데 북한 정권에 협력했다든가, 숙청됐다든가 하는 그 어떤 정보나 알려진 행적이 없어 상당한 의문으로 남아 있었다. 그 후 ‘민족21’의 2001년 8월호에 ‘평양애국렬사릉’ 답사기 등이 수록되면서 백관수 선생의 묘와 ‘1950년 10월 25일 서거’ 묘비 등이 알려졌고, 근촌은 1961년이 아니라 납북된 후 바로 별세했음이 드러났다. 납북되는 험난한 여정에서 고립무원 상태로 숨을 거두었음이 입증된 것이다.
전북 고창의 지역사학자 류희춘 씨는 각종 자료를 추적 조사한 끝에 2025년 2월 국가보훈부에 ‘백관수 선생에 대한 독립유공자 공적 재심사’를 요청했다. 그 소명 근거 자료로, 근촌은 일제의 요시찰 인물이라는 조선군 참모장이 작성한 조선사상개요, 근촌은 전향을 거부한 인물이라는 총독부 고등법원검사국 사상부 발간 자료, 근촌은 동아일보 폐간에 반대해 종로경찰서에 구류됐다는 총독부 경무국장의 보고서, ‘왜정시대 인물사료’에 수록된 백관수에 대한 인물평, 2·8 독립선언 인물 열전 등을 제시했다. 보훈부는 “제출한 자료에 대한 검토와 조사를 거쳐 2026년 광복절을 계기로 공적 재심사를 진행할 것”이라고 답변해왔다.
백관수 선생은 어둠의 시대에 민족 자존(自尊)을 지켜냈고, 2·8 독립선언을 주도해 3·1운동의 불씨를 지폈으며, 동아일보 강제 폐간이라는 압박 속에서도 민족 언론의 등불을 지켜냈고, 건국 과정에서도 큰 역할을 담당한 우리 민족의 거목이다. 왜곡된 역사 기록을 바로잡고 국가를 위해 헌신한 인물을 온전히 기리는 것은 당연한 국가의 책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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