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 2.4% 이율로 최대 1억2000만 원까지 전세대출이 가능합니다. 초과분은 3%의 이율로 대출할 수 있습니다.”
기자가 23일 한 주요 시중은행 상담창구에서 들은 말이다. 대출을 위해 필요한 서류 설명이 이어졌다. 재직증명서와 갑종근로소득원천징수영수증, 4대보험가입확인서, 임대차계약서 등 다양했다. 하지만 이미 마음을 정리한 상태. 전세가가 치솟은 탓에 얼추 계산해도 매년 300만 원 이상 이자로 나갈 판이었다. ‘차라리 그 돈으로 퇴직연금을 들자’부터 ‘내 집 마련은커녕 괜찮은 전세 구하기도 어렵구나’ 같은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1시간이 넘는 통근 시간을 반으로 줄이겠다는 입사 포부가 10분 만에 물거품이 됐다.
“대한민국 현실 그대로 반영”
11월 23일 오후 동아일보 충정로 사옥에서 무주택자인 주간동아·신동아·여성동아 기자 세 명이 모노폴리 K-부동산 게임을 했다. [최진렬 기자]
부동산을 소유한 ‘그들이 사는 세상’은 어떨까. 20대 무주택자들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현실을 닮은 ‘모노폴리 K-부동산’게임을 해보기로 했다. 게임업체 해즈브로 코리아는 9월 게임으로나마 부동산 시장을 체험할 수 있도록 이 게임을 출시했다. 만원 후반대라 가격도 저렴하다. 모노폴리(Monopoly·독점)는 각국 수도를 독점해 상대를 파산시키는 보드게임이다.
게임 표지에 적힌 문구는 ‘대한민국 현실 그대로 반영 놀면서 배우는 부동산 상식’. 한국판 버전인 만큼 호텔 대신 주택과 아파트를 건설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여기에 한국의 상황에 맞춘 찬스카드도 도입됐다. △주택청약 당첨 △신도시청약 당첨 △재건축지역 선정 △투기과열지구 선정 △종합부동산세 과금 등 여러 부동산 정책카드가 있다. 이 외에도 긴급재난지원금과 청년지원금 등의 일반 정책 카드도 있다.
대출창구에서 마주한 헛헛함을 달래고자 기자(27) 외에도 문영훈(27) 신동아 기자와 이현준(29) 여성동아 기자 등 입사동기 3명(이하 A, B, C 씨)이 모노폴리 K-부동산을 했다. 모두 일찌감치 내집 마련을 포기한 무주택 동지다. 셋 중 둘은 부동산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주식에 뛰어들었다.
게임에서 체험한 수도권 부동산 불패신화
“내 집 마련 계획? 포기한지 오래다. 운이 좋다면 노년에 장만할 수도 있다. 그저 장기임대주택에 들어가 이사의 압박만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B 씨의 한탄과 동시에 게임이 시작됐다. 다주택자는커녕 1주택자도 되기 힘든 이번 생에 대한 회한이 담긴 탓일까. 셋 모두 게임 시작과 동시에 공격적인 투자 성향을 보였다. “전주 땅을 내가 갖고 있었구나. 부동산이 너무 많아서 몰랐다”는 ‘웃픈’ 소리도 나왔다.게임 시작 20분이 경과하자 부동산시장의 틀이 잡혔다. 출발 지점에서의 작은 차이가 큰 격차를 만들었다. ‘찬스카드’ 덕에 게임 초반 서울을 방문한 A씨는 곧바로 서울과 인천 부지를 매입했다. 이윽고 가용 재산을 모두 사용해 주택을 지었다. 게임 내 최고 임대료를 자랑하는 수도권 부동산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공격적인 부동산 매입 전략은 통했다. 수도권 외에도 부산과 전주 등 굵직한 도시도 모두 매입해 선두로 치고나갔다. B씨와 C씨는 각각 3개, 2개의 부동산과 몇몇 공공기관만을 가졌을 뿐이었다. 열세에 몰린 B 씨와 C 씨는 물어야할 임대료도 늘어갔다. ‘부동산 불패’ 신화는 게임에서도 이어졌다.
판을 흔든 것은 C씨가 뽑은 종합부동산세 과금카드. 카드를 보는 순간 그를 원망했다. 건물을 2채 이상 소유한 모든 사람이 건물 수만큼 은행에 세금을 지불하는 것이 룰이다. 플레이어 중 건물을 2채 이상 소유한 사람은 A씨 뿐. A씨는 서울과 인천에 올린 주택 4채를 지키기 위해 현금의 절반을 처분했다. 가용자산이 줄어든 A씨는 두 사람이 부동산을 소유한 지역을 방문할 때마다 임대료를 지불하기 위해 부동산을 하나씩 처분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서울이 ‘투기과열지구’에 선정돼 부동산 가치가 절반으로 떨어졌다.
게임 도중 정부 정책에 호의적인 목소리도 나왔다. B씨는 보금자리주택(정부가 무주택 서민을 위해 직접 공급하는 주택) 수혜 대상자가 되자 “정부를 열렬히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그의 지지는 오래가지 않았다. 연거푸 재산세와 토지증여 대상이 되자 그는 자금 확보를 위해 부동산을 하나 둘 처분했다. 조세 정책은 플레이어 전원을 대상으로 하는 탓에 게임 참여자 모두 정책 카드를 뽑은 상대를 원망했다. 보유 부동산이 가장 적었던 B 씨가 세금과 임대료에 지쳐 가장 먼저 파산했다.
“부동산 시장에 절대악은 없다”
23일 이현준 여성동아 기자가 보유한 마지막 부동산을 문영훈 신동아 기자에게 넘기고 게임에서 가장 먼저 패배를 선언했다. [최진렬 기자]
B씨가 파산하며 처분한 부동산을 C씨가 하나하나 주워 담았다. 전라도 대지주였던 C씨는 금방 전국구 부동산 거물이 됐다. 부동산이 많아지면서 정부 정책에 대한 발언도 바뀌었다. 그는 평소 “20년 전으로 부동산 가격을 되돌리고 싶다”고 한탄했다. 그런데 게임 도중 “기득권이 돼 보니 알겠다. 정부 정책 중 최고는 무(無)정책”이라며 “동일한 사람이라도 상황이 바뀌니 정책에 대한 입장도 바뀐다. 사람이 문제가 아니다. 부동산 시장에서 절대악은 없다”고 말했다.
하늘 아래 C씨의 손이 미치지 않는 부동산은 없었다. 주사위를 던질 때마다 그에게 임대료를 지불해야 했다. ‘게임에서마저 이렇게 살아야 하나’라는 생각을 하던 A씨에게 동아줄이 내려왔다. A씨는 게임 내 스페셜 정책 카드인 ‘백지 정책 카드’를 뽑았다. 백지 정책 카드는 게임 참여자가 자유롭게 부동산 정책을 도입하도록 한다. 백지수표와 유사하다. A씨는 고심 끝에 ‘슈퍼 종부세’를 매겨 C씨를 파산시켰다. C씨는 “더러워서 안 한다”라는 말과 함께 게임을 그만 뒀다. A씨는 상대를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게임을 이겼으나, 얻은 것은 없었다. 종합부동산세로 상대를 무너뜨린 탓에 최후의 승자는 은행(정부)이었다.
무주택자가 꿈꾸는 부동산 정책
게임 속 히든 카드인 백지 정책 카드. [최진렬 기자]
C 씨는 “부동산 정책은 실타래처럼 꼬여 있다. 다만 부동산 기사를 취재하며 만났던 업계 당사자 및 전문가들의 의견을 최대한 들어보고 싶다. 대부분의 현 정부 정책에 전문가 의견이 반영되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전문가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한 다음 부동산 정책 카드를 채우고 싶다”고 말했다.
필자(A씨)도 같은 생각이 들었다. 백지 정책 카드를 백지로 남겨두고 싶을 뿐이다. 정부의 부동산 정책 발표가 20번이 넘어가면서 세는 것도 멈췄다. N번째 정책이 나올 때마다 부동산 가격은 상승했다. 이제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모노폴리 K-부동산 게임 속 백지 정책 카드가 현실에서 주어진다면 어떤 정책을 펼치고 싶은지 댓글란에 다양한 의견을 달아주세요.
최진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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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주간동아 최진렬 기자입니다. 산업계 이슈를 취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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