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해군 차세대 호위함인 26형(Type 26). [BAE Systems 제공]
이 양해각서는 영국의 BAE 시스템즈가 호주에 영국해군 차세대 호위함인 26형(Type 26)의 기술과 장비를 공급하고, 호주잠수함공사가 주계약자가 되어 26형 호위함의 파생형인 호주해군용 헌터급 구축함 9척을 건조해 정부에 납품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영국의 2배 가까운 가격
8800톤급 구축함 9척을 납품하는 이 계약의 규모는 350억 호주달러, 한화 28조 1320억 원 규모다. 우리나라의 첨단 전자‧조선 기술이 집약되는 차세대 구축함 KDDX가 6척 도입에 약 7조 원의 예산이 투입될 예정인 것과 비교하면 9척에 28조 원, 1척당 3조 1200억 원이 넘는 가격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금액이다.헌터급의 원형이 된 영국의 26형 호위함은 영국이 노후화된 23형 호위함을 대체하기 위해 개발한 차세대 호위함으로 영국 조선산업 역사상 최대 규모의 판매 실적을 낸 군함이다. 영국은 이 전투함 8척을 80억 파운드를 들여 도입할 예정으로 1척당 가격은 1조 4670억 원 선이다. 그렇지만 호주해군은 영국의 2배 가까운 가격을 주고 헌터급을 구입하는 셈이다.
물론 호주 해군용 헌터급은 영국 해군용 26형 호위함보다 고(高)사양으로 설계되기는 했다. 레이더는 호주가 자체 개발한 SEAFAR II 위상배열레이더가 탑재될 예정이며, 전투체계는 미국의 이지스 시스템이 들어갈 예정이다. 무장 역시 26형보다 강력한 SM-2, ESSM 등의 미사일이 탑재된다. 그러나 이러한 점을 고려하더라도 헌터급은 유사한 성능의 동급 외국 선박의 2배 이상의 가격을 자랑한다.
물가 비싸기로 유명한 일본의 아키즈키급(7000톤급)은 1척에 844억엔(9000억 원), 이지스 방공함인 스페인의 차세대 구축함 F110급(6000톤급)은 1척에 1조 8억 6천만 유로(1조 1400억 원) 선이다. 미사일 방어 능력을 가진 일본의 차세대 구축함 마야급(1만1000톤급)이 1척에 1640억 엔(1조 7660억 원), 우리나라의 세종대왕급 배치 2가 1척에 1조 3000억 원을 예상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헌터급은 비싸도 너무 비싸다.
사실 이 사업은 시작부터 비리 논란에 시달렸다. 호주 해군은 외국의 신형 군함을 베이스로 호주 고유의 개량형 모델을 만들어 도입하려 했고, 차세대 구축함 사업에는 앞서 소개한 스페인의 F110 이지스 구축함, 프랑스의 FREMM 개량형 등도 함께 입찰했다. 이 모델들은 영국의 26형 호위함보다 가격은 절반이었지만, 성능은 압도적으로 뛰어났기 때문에 사업 초기에는 그 누구도 26형 호위함이 선정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호주는 지난 2018년 7월, 성능은 가장 낮으면서 가격은 가장 비쌌던 26형 호위함을 선정했고, 1척당 도입 가격을 영국해군의 2배 이상으로 책정하는 상식 밖의 결정을 내렸다. 그렇다면 호주는 도대체 왜 이런 결정을 내렸을까? 모든 것은 2014년의 상황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강성노조가 지배하는 ASC
호주잠수함공사(ASC : Australian Submarine Corporation). [ASC 홈페이지 제공]
강성노조가 지배하는 ASC는 외국산 함정을 기술도입해 건조하는 과정에서 가격을 2~5배 이상, 건조 기간을 2배 이상 뻥튀기는 것으로 악명 높은 조선소다. ‘바다 속의 록페스티벌 공연장’으로 불릴 만큼 성능이 엉망이었던 콜린스급(Collins class) 잠수함의 경우 계약서에 명시된 금액보다 2배 많은 예산이 지불됐고, 납기는 10년 이상 지연돼 호주 해군의 원성을 샀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호주 해군 최초의 이지스 구축함인 호바트급(Hobart class)은 더 끔찍했다. 이 구축함은 스페인의 F100급 호위함의 설계를 가져와 1척에 6000억 원 정도의 예산을 투입해 건조할 예정이었으나, ASC는 이 군함을 1척당 2조 5000억 원, 총 7조 5000억 원에 3척을 납품했다. 일감을 늘리기 위해 여러 사업장에서 나눠서 모듈을 만들다보니 최종 조립 단계에서 볼트와 나사 규격이 맞지 않아 전부 해체하고 다시 만드는 일까지 발생했다.
경항모가 될 뻔했던 강습상륙함 캔버라급(Canberra class)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상륙함은 설계 변경 없이 스페인의 후안 카를로스 1세급(Juan Carlos I class) 설계를 그대로 적용해 만들었지만, 인도 후 호주 해군이 지적한 결함만 1만4000건에 달했고, 건조 비용 역시 1척에 5600억 원이던 원형의 3배인 1조 7000억 원 수준까지 치솟았다.
호주국가감사국(Australian National Audit Office)은 비용 상승과 납기 지연, 신뢰성 문제의 원인을 강성노조라고 수차례 지적했다. ANAO에 따르면, 호주조선소는 수십 년째 외국산 함정의 기술을 들여와 군함을 건조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기술 축적과 연구개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일감을 늘려 자리를 유지하고 한 푼의 수당이라도 더 받는데 혈안이 돼 신형 전투함을 자체 개발하거나 수출하는 것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는, 비효율의 극치를 달리는 집단이었다.
ANAO의 보고서를 보고 격노한 데이비드 존스턴(David Johnston) 전 국방장관은 2014년, 대정부 질의에서 작심하고 강성노조에 대한 분노를 쏟아냈다. 그는 호주해군 잠수함대 건설 계획 수립 과정에서 당초 계획된 예산의 몇 배의 기간과 예산을 요구하는 강성노조와 좌파 정당들의 만행을 성토하며 “도대체 그들이 우리 납세자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무엇이냐? 나는 그들이 잠수함이 아니라 카누를 만든다고 해도 못 믿겠다”며 목소리를 높였고, 차기 잠수함 사업을 일본제 소류급을 직도입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가 얼마 후 노조와 좌파 정당들의 압력을 받아 국방장관에서 쫓겨났다.
“일자리를 중시하지 않는 정부”
존스턴 장관이 쫓겨난 후 “호주 노동자와 일자리를 중시하지 않는 정부”라는 공격에 시달리던 토니 애벗 총리는 이듬해 재신임 투표까지 했고, 결국 그 해 맬컴 텀블 총리에게 총리직을 내주고 권좌에서 밀려났다. 이 여파 때문에 텀블 내각은 호주의 방위력 개선보다 국내 일자리 개선에 초점을 둔 해군력 증강 계획을 발표하며 노조의 환심을 사야 했다.텀블 내각이 세운 해군력 증강 계획은 그야말로 황당 그 자체다. 4500톤급 재래식 잠수함 12척을 사는데 40조 원, 1척당 3조 3300억 원을 쓸 예정이며, 앞서 소개한 8800톤급 범용 구축함 9척을 사는데 28조 원, 1척에 3조 1200억 원을 쓸 예정이다. 기관포 몇 정으로 무장한 1700톤급 연안 초계함 14척을 사는데 2조 9000억 원, 1척당 2070억 원을 쓸 예정이다.
재래식 잠수함 1척에 3조 3300억 원이면 우리나라의 도산 안창호급 3척 가격이자 미국의 최신예 버지니아급 공격용 원자력 잠수함(1척당 3조 1000억원)을 사고도 남을 금액이며, 범용 구축함 1척에 3조 1000억 원이면 우리나라의 세종대왕급 이지스 구축함 3척을 살 돈이다. 1700톤급 연안 초계함 1척에 거의 2000억 원이면 최근 인도네시아가 구입한 같은 체급의 최신예 시그마 9113 초계함의 2.5배 가격이다.
문제는 1980년대부터 ASC가 쌓아올린 ‘전통’에 따라 기존의 예산 계획은 마치 뻥튀기처럼 몇 배 이상으로 불어날 여지가 충분히 있다는 것이다. 존스턴 전 장관이 울분을 토하며 지적했던 것처럼 ASC는 단 한 번도 납기를 맞춘 적이 없고, 최초 계약된 금액에 맞춰 사업을 완료했던 적이 없었다. 어차피 호주 국방부야 ‘을(乙)’의 입장이기 때문에 납기를 맞춰주며 자신들의 일감과 수당을 포기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호주 정부는 70조 원에 달하는 이 천문학적 규모의 예산을 앞으로 20년간 호주 국내 조선소들에게 골고루 나눠줄 예정이다. 이 예산 집행의 가장 큰 목표는 중국 견제, 인도태평양에서의 호주 영향력 강화 같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일자리 창출’과 ‘철밥통 유지’다. 국방비 집행이 ‘국가안보’가 아니라 ‘특정기업의 이익’에 있는 나라, 남의 나라 이야기 같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