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 교통사고로 종결 처리됐던 사건이 15년이 지난 후에야 성폭행 사망 사건으로 밝혀졌다. 영화 속 비극처럼 기구하기 짝이 없는 이 사건의 피해자는 1998년 대구 달서구 월암동 구마고속도로에서 23t 덤프트럭에 치여 숨진 정은희 양(당시 18세·계명대 간호학과 1학년). 정양을 구마고속도로까지 끌고 가 성폭행한 뒤 버리고 달아난 범인은 뜻밖에도 스리랑카인 노동자 K(46) 씨와 그의 동료들인 것으로 밝혀졌다.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던 유족들의 한 맺힌 절규는 15년이라는 길고긴 시간이 지난 지금에야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다. 사건 당시 유족의 끊임없는 탄원과 재수사 요청, 고소 및 고발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증거를 가져와보라”고 되묻던 담당 수사관은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됐다. 정양을 성폭행한 스리랑카인 가운데 2명은 이미 불법체류혐의로 강제 출국됐고, 남은 공범은 얼마 전 또 다른 성폭행 사건 용의자로 수사받은 K씨가 전부다.
아직도 딸을 떠나보내지 못해
“그때만 해도 세상 인식이 지금 같지 않아서, 성폭행당해 그렇게 됐다는 얘기를 어디다 할 수도 없었어요. 그걸 부끄럽게 여기고 숨겨야 되는 줄로만 알던 시절이잖아요. 그래서 저희도 주변 사람들한테는 교통사고로 그렇게 됐다고 하고 속만 끓이느라….”
정양의 아버지 정현조(67·사진) 씨를 만나려고 그의 집 대문을 두드린 것은 유족이 성폭행범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이틀 뒤인 9월 6일이었다. 그동안 청와대부터 법무부, 검찰, 경찰, 언론에까지 진정과 탄원, 고소, 고발, 제보 등 안 해본 게 없던 유족에게는 관련 소식이 보도되고 나서야 갑작스레 쏟아진 세상의 관심이 의아하기만 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씨는 가는 곳마다 외면당하고 무시당하던 ‘악성 민원인’에 불과했기 때문. 늦은 시각, 며칠째 했던 말을 하고 또 하느라 지칠 법도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딸아이의 죽음에 대해 처음 입을 여는 사람처럼 아렸다.
기자의 명함을 받아든 정씨는 노트를 꺼내 굵은 펜으로 또박또박 이름과 연락처를 베껴 적었다. 눈이 어두워져서 작은 글씨는 잘 보이지 않는다며 펼쳐 든 노트에는 그동안 만난 사람의 이름과 직함, 연락처가 빼곡했다. 그에게는 딸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고 진실을 알릴 수 있는 실낱같은 희망줄이었다.
정양이 세상을 떠나고 긴 시간이 지났지만 집 안에서 그의 흔적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용하던 방에는 주인 잃은 침대며 옷장, 책상이 세월의 기운을 이기지 못해 노랗게 색이 바랜 채 오도카니 서 있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정씨가 딸의 억울한 죽음을 알리기 위해 인터넷을 배우려고 책상 위에 들여놓은 컴퓨터와 쌓아올린 법전, 고소·고발장, 탄원서 더미뿐.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오랜 싸움의 흔적이었다.
정양이 숨진 1998년 10월 17일 새벽, 구마고속도로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숨진 정양은 간호사를 꿈꾸던 풋풋한 대학 새내기였다. 사고가 있던 날은 마침 학교 축제기간이었다. 정양은 조만간 어학연수를 함께 떠나기로 한 친구들과 캠퍼스 내 주막촌에서 술을 마셨다고 한다. 함께 있던 친구들이 모두 귀가하고, 학교 동기인 박모 군과 둘만 남은 정양은 술에 취한 박군을 바래다주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취한 박군이 정신을 차린 것은 밤 11시 30분경 성서병원 앞에서였다. 거리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그는 정양이 보이지 않았지만, 자신이 술기운에 잠든 사이 정양 혼자 집으로 돌아간 것으로 생각하고 자기도 귀가했다고 한다. 그것이 그가 기억하는 전부였다.
성폭행 사건을 단순 교통사고로
그로부터 6시간 후인 새벽 5시 무렵, 정양은 학교에서 7.7km 떨어진 구마고속도로에서 처참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23t 덤프트럭에 치여 현장에서 즉사한 것. 그 늦은 시간에 정양은 왜 집과 정반대 방향인 고속도로에서, 그것도 넘기조차 쉽지 않은 중앙분리대까지 혼자 걸어간 것일까. 시신은 왜 사고 현장에서도 30m 떨어진 풀숲에서 속옷이 모두 벗겨져 겉옷만 입은 채로 발견됐을까. 트럭에 치여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훼손된 시신에서 교통사고에서는 볼 수 없는 상흔이 나타난 이유는 무엇일까.
수많은 의문이 남았지만, 경찰은 이 사건을 단순 교통사고로 마무리했다. 신속한 일처리였다. 유족의 항의와 민원은 철저하게 무시됐고, 사건 발생 두 달 만에 트럭 운전자를 무혐의 처분하는 것으로 사건은 종결 처리됐다. 속옷이 사라진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아버지에게 경찰은 “발견 당시에는 팬티를 입고 있었다. 시신을 수습하려고 우리가 칼로 찢어버렸다”고 거짓말까지 했다고 정씨는 회고한다. 입고 있던 청바지가 그대로 있는데 속옷만 칼로 찢어버렸다는,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설명이었다.
정양의 팬티는 유족이 사건 현장을 직접 뒤진 끝에 사건 현장에서 한참 떨어진 가드레일 밑에서 찾아냈다. 속옷을 들고 다시 경찰을 찾았지만 경찰 반응은 냉랭했다. “이 속옷이 정양의 것이라는 증거가 있느냐” “동네 아줌마가 버린 팬티를 주워왔느냐”는 냉소가 날아들었다.
그나마 팬티에 남은 혈흔과 DNA를 조사할 수 있었던 건 2000년 4월 정양의 이야기를 한 TV 시사프로그램이 방송한 뒤였다. 유족의 끈질긴 요구에도 “너무 오래된 팬티라 DNA 검사가 안 된다”며 묵살하던 경찰은 그제야 증거물을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에 보냈다. 그러나 경찰은 속옷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남자의 DNA와 딸의 혈흔이 발견된 사실을 유족에게 알리지도 않았다.
“정말 교통사고였으면 깔끔하게 교통사고로 처리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거짓말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런데 자꾸 거짓말만 하면서 사건을 빨리 덮어버리려고 하더라고요.”
이상한 것은 경찰만이 아니었다. 당시 정양과 마지막까지 같이 있었다던 박군이나, 정양이 갑자기 중앙분리대 쪽으로 뛰어들었다고 주장하는 트럭 운전자의 진술도 오락가락하면서 어느 누구에게서도 당시 상황을 속 시원히 들을수가 없었다. 정양이 교문 앞에서 어떤 사람의 차를 타고 갔다는 근거 없는 소문도 학교 주변에 떠돌았다. 심지어 주점에서 정양을 봤다는 학생이라며 경찰이 정씨와 만나게 해준 여성은 알고 보니 진짜가 아니었다.
“어쩐지 낌새가 이상했어요. 누군지 알아볼 수도 없게 커다란 스카프로 얼굴을 온통 가리고 나왔더라고요. 이것저것 물어봐도 대답이 신통치 않고…. 나중에 학교로 찾아가 그 이름의 학생을 수소문했더니, 저는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이 나오는 거예요. 그 학생도 나와 만난 적이 없다 하고요. 경찰이 전혀 엉뚱한 사람을 증인이라며 데려 나온 거죠.”
사건은 그렇듯 순식간에 잊혀져갔고, 유족의 애끊는 마음을 알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법률적 지식도, 경찰이 가져와보라는 ‘증거’를 찾을 방도도 없던 정씨로서는 갈 길이 막막했다. ‘단순 교통사고’로 결론 난 국과수에 의뢰하고 결과를 알아내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2000년 9월 정씨는 담당 경찰관과 관계자들을 직무유기로 고소했지만, ‘혐의 없음’이라며 기각됐다.
피해자의 알권리법 제정 활동
정씨가 그동안 제기한 진정과 고소, 고발, 탄원 등은 총 100여 차례. 그러나 받아들여진 적은 한 차례도 없었다. 생업이었던 채소장사를 포기하고 이 일에 매달리는 동안, 아내의 작은 반찬가게만이 유일한 생계수단이었다. 마지막으로 희망을 걸었던 건 2010년 제정된 ‘DNA법’이었다. 강력범죄자의 DNA를 채취해 보관하도록 하는 새 법률의 힘을 빌리면 딸의 속옷에서 발견된 DNA와 일치하는 사람을 찾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가 고소장을 제출하고 4개월여가 지난 9월 4일 검찰은 정양의 속옷에서 채취한 DNA가 2011년 여고생에게 성매매를 권유하다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입건된 스리랑카인 K씨의 DNA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를 정씨에게 통보했다.
검찰은 부검 재감정과 교통사고 시뮬레이션, 법최면검사 등 다양한 수사기법을 동원해 K씨가 범인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사건을 담당한 이금로 대구지검 1차장검사는 “영구미제로 묻힐 뻔한 사건의 진실을 3개월에 걸친 현장답사와 과학적 수사기법 활용, 유관기관 협조 등을 통해 규명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정양을 집단 성폭행한 것으로 드러난 K씨는 현재 특수강도강간 혐의로 구속 기소된 상태. 당시 법률에 따르면 피의자들의 공소시효는 오는 10월 16일 만료되지만, DNA법으로 시효가 10년 더 늘어났다.
검찰은 15년 동안 유족이 겪은 아픔을 덜어주려고 범죄피해자지원센터의 지원을 받아 위로금을 지급하고 출국한 공범들에 대해서도 형사사법공조 절차 등을 통해 계속 수사할 방침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정씨는 위로금을 거절했다. 가진 것은 없지만, 4남매가 커가는 재미에 이마에 내려앉은 주름살도 잊고 살던 기억 때문이다.
“보상금 같은 건 필요 없어요. 은희가 떠나고 우리 가족은 웃음을 잃었습니다. 모든 게 달라졌죠. 사실 우리는 이게 끝이라고 생각지 않아요. 애써주신 분들 덕에 이제라도 성폭행범은 잡았지만, 진실이 모두 밝혀진 건 아니니까요.”
그에게 딸의 죽음은 여전히 미제 사건이다. 성폭행이라는 명확한 증거가 있었음에도 끝까지 사실을 은폐하고 무마하려던 경찰, 모든 게 의문스럽기만 하던 관련자들의 진술. 과연 그들이 숨기려 했던 것은 무엇일까. 최근 정씨는 뜻을 함께하겠다고 나선 인권변호사, 시민단체들과 ‘유족의 알 권리를 위한 법’ 제정 활동에 힘을 쏟고 있다. 더는 자신 같은 억울한 피해자가 나오지 않게 하는 것만이 이미 저 세상으로 간 딸을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라 믿기 때문이다.
끝으로 그에게 고인이 된 딸 은희 양에게 하고픈 말을 물었다.
“내가 약속했지, 그놈을 꼭 잡겠다고…. 어쨌든 범인이 잡혔다고 하니 아빠가 잡아준 것으로 생각해줄 수 있지 않겠니? 나를 너무 나무라지는 말아다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인 것 같으니…. 부디 흉악범 없는 세상에서 편안히 잘 지내라.”
그의 마지막 말이 눈시울을 더욱 붉게 물들였다.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던 유족들의 한 맺힌 절규는 15년이라는 길고긴 시간이 지난 지금에야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다. 사건 당시 유족의 끊임없는 탄원과 재수사 요청, 고소 및 고발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증거를 가져와보라”고 되묻던 담당 수사관은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됐다. 정양을 성폭행한 스리랑카인 가운데 2명은 이미 불법체류혐의로 강제 출국됐고, 남은 공범은 얼마 전 또 다른 성폭행 사건 용의자로 수사받은 K씨가 전부다.
아직도 딸을 떠나보내지 못해
“그때만 해도 세상 인식이 지금 같지 않아서, 성폭행당해 그렇게 됐다는 얘기를 어디다 할 수도 없었어요. 그걸 부끄럽게 여기고 숨겨야 되는 줄로만 알던 시절이잖아요. 그래서 저희도 주변 사람들한테는 교통사고로 그렇게 됐다고 하고 속만 끓이느라….”
정양의 아버지 정현조(67·사진) 씨를 만나려고 그의 집 대문을 두드린 것은 유족이 성폭행범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이틀 뒤인 9월 6일이었다. 그동안 청와대부터 법무부, 검찰, 경찰, 언론에까지 진정과 탄원, 고소, 고발, 제보 등 안 해본 게 없던 유족에게는 관련 소식이 보도되고 나서야 갑작스레 쏟아진 세상의 관심이 의아하기만 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씨는 가는 곳마다 외면당하고 무시당하던 ‘악성 민원인’에 불과했기 때문. 늦은 시각, 며칠째 했던 말을 하고 또 하느라 지칠 법도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딸아이의 죽음에 대해 처음 입을 여는 사람처럼 아렸다.
기자의 명함을 받아든 정씨는 노트를 꺼내 굵은 펜으로 또박또박 이름과 연락처를 베껴 적었다. 눈이 어두워져서 작은 글씨는 잘 보이지 않는다며 펼쳐 든 노트에는 그동안 만난 사람의 이름과 직함, 연락처가 빼곡했다. 그에게는 딸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고 진실을 알릴 수 있는 실낱같은 희망줄이었다.
정양이 세상을 떠나고 긴 시간이 지났지만 집 안에서 그의 흔적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용하던 방에는 주인 잃은 침대며 옷장, 책상이 세월의 기운을 이기지 못해 노랗게 색이 바랜 채 오도카니 서 있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정씨가 딸의 억울한 죽음을 알리기 위해 인터넷을 배우려고 책상 위에 들여놓은 컴퓨터와 쌓아올린 법전, 고소·고발장, 탄원서 더미뿐.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오랜 싸움의 흔적이었다.
정양이 숨진 1998년 10월 17일 새벽, 구마고속도로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숨진 정양은 간호사를 꿈꾸던 풋풋한 대학 새내기였다. 사고가 있던 날은 마침 학교 축제기간이었다. 정양은 조만간 어학연수를 함께 떠나기로 한 친구들과 캠퍼스 내 주막촌에서 술을 마셨다고 한다. 함께 있던 친구들이 모두 귀가하고, 학교 동기인 박모 군과 둘만 남은 정양은 술에 취한 박군을 바래다주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취한 박군이 정신을 차린 것은 밤 11시 30분경 성서병원 앞에서였다. 거리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그는 정양이 보이지 않았지만, 자신이 술기운에 잠든 사이 정양 혼자 집으로 돌아간 것으로 생각하고 자기도 귀가했다고 한다. 그것이 그가 기억하는 전부였다.
성폭행 사건을 단순 교통사고로
정현조 씨가 딸의 억울한 죽음을 알리기 위해 작성한 탄원서를 살펴보고 있다.
수많은 의문이 남았지만, 경찰은 이 사건을 단순 교통사고로 마무리했다. 신속한 일처리였다. 유족의 항의와 민원은 철저하게 무시됐고, 사건 발생 두 달 만에 트럭 운전자를 무혐의 처분하는 것으로 사건은 종결 처리됐다. 속옷이 사라진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아버지에게 경찰은 “발견 당시에는 팬티를 입고 있었다. 시신을 수습하려고 우리가 칼로 찢어버렸다”고 거짓말까지 했다고 정씨는 회고한다. 입고 있던 청바지가 그대로 있는데 속옷만 칼로 찢어버렸다는,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설명이었다.
정양의 팬티는 유족이 사건 현장을 직접 뒤진 끝에 사건 현장에서 한참 떨어진 가드레일 밑에서 찾아냈다. 속옷을 들고 다시 경찰을 찾았지만 경찰 반응은 냉랭했다. “이 속옷이 정양의 것이라는 증거가 있느냐” “동네 아줌마가 버린 팬티를 주워왔느냐”는 냉소가 날아들었다.
그나마 팬티에 남은 혈흔과 DNA를 조사할 수 있었던 건 2000년 4월 정양의 이야기를 한 TV 시사프로그램이 방송한 뒤였다. 유족의 끈질긴 요구에도 “너무 오래된 팬티라 DNA 검사가 안 된다”며 묵살하던 경찰은 그제야 증거물을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에 보냈다. 그러나 경찰은 속옷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남자의 DNA와 딸의 혈흔이 발견된 사실을 유족에게 알리지도 않았다.
“정말 교통사고였으면 깔끔하게 교통사고로 처리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거짓말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런데 자꾸 거짓말만 하면서 사건을 빨리 덮어버리려고 하더라고요.”
이상한 것은 경찰만이 아니었다. 당시 정양과 마지막까지 같이 있었다던 박군이나, 정양이 갑자기 중앙분리대 쪽으로 뛰어들었다고 주장하는 트럭 운전자의 진술도 오락가락하면서 어느 누구에게서도 당시 상황을 속 시원히 들을수가 없었다. 정양이 교문 앞에서 어떤 사람의 차를 타고 갔다는 근거 없는 소문도 학교 주변에 떠돌았다. 심지어 주점에서 정양을 봤다는 학생이라며 경찰이 정씨와 만나게 해준 여성은 알고 보니 진짜가 아니었다.
“어쩐지 낌새가 이상했어요. 누군지 알아볼 수도 없게 커다란 스카프로 얼굴을 온통 가리고 나왔더라고요. 이것저것 물어봐도 대답이 신통치 않고…. 나중에 학교로 찾아가 그 이름의 학생을 수소문했더니, 저는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이 나오는 거예요. 그 학생도 나와 만난 적이 없다 하고요. 경찰이 전혀 엉뚱한 사람을 증인이라며 데려 나온 거죠.”
사건은 그렇듯 순식간에 잊혀져갔고, 유족의 애끊는 마음을 알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법률적 지식도, 경찰이 가져와보라는 ‘증거’를 찾을 방도도 없던 정씨로서는 갈 길이 막막했다. ‘단순 교통사고’로 결론 난 국과수에 의뢰하고 결과를 알아내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2000년 9월 정씨는 담당 경찰관과 관계자들을 직무유기로 고소했지만, ‘혐의 없음’이라며 기각됐다.
15년 세월 동안 정현조 씨가 진실을 찾기 위해 만든 탄원서와 녹취록, 관련 공문.
정씨가 그동안 제기한 진정과 고소, 고발, 탄원 등은 총 100여 차례. 그러나 받아들여진 적은 한 차례도 없었다. 생업이었던 채소장사를 포기하고 이 일에 매달리는 동안, 아내의 작은 반찬가게만이 유일한 생계수단이었다. 마지막으로 희망을 걸었던 건 2010년 제정된 ‘DNA법’이었다. 강력범죄자의 DNA를 채취해 보관하도록 하는 새 법률의 힘을 빌리면 딸의 속옷에서 발견된 DNA와 일치하는 사람을 찾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가 고소장을 제출하고 4개월여가 지난 9월 4일 검찰은 정양의 속옷에서 채취한 DNA가 2011년 여고생에게 성매매를 권유하다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입건된 스리랑카인 K씨의 DNA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를 정씨에게 통보했다.
검찰은 부검 재감정과 교통사고 시뮬레이션, 법최면검사 등 다양한 수사기법을 동원해 K씨가 범인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사건을 담당한 이금로 대구지검 1차장검사는 “영구미제로 묻힐 뻔한 사건의 진실을 3개월에 걸친 현장답사와 과학적 수사기법 활용, 유관기관 협조 등을 통해 규명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정양을 집단 성폭행한 것으로 드러난 K씨는 현재 특수강도강간 혐의로 구속 기소된 상태. 당시 법률에 따르면 피의자들의 공소시효는 오는 10월 16일 만료되지만, DNA법으로 시효가 10년 더 늘어났다.
검찰은 15년 동안 유족이 겪은 아픔을 덜어주려고 범죄피해자지원센터의 지원을 받아 위로금을 지급하고 출국한 공범들에 대해서도 형사사법공조 절차 등을 통해 계속 수사할 방침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정씨는 위로금을 거절했다. 가진 것은 없지만, 4남매가 커가는 재미에 이마에 내려앉은 주름살도 잊고 살던 기억 때문이다.
“보상금 같은 건 필요 없어요. 은희가 떠나고 우리 가족은 웃음을 잃었습니다. 모든 게 달라졌죠. 사실 우리는 이게 끝이라고 생각지 않아요. 애써주신 분들 덕에 이제라도 성폭행범은 잡았지만, 진실이 모두 밝혀진 건 아니니까요.”
그에게 딸의 죽음은 여전히 미제 사건이다. 성폭행이라는 명확한 증거가 있었음에도 끝까지 사실을 은폐하고 무마하려던 경찰, 모든 게 의문스럽기만 하던 관련자들의 진술. 과연 그들이 숨기려 했던 것은 무엇일까. 최근 정씨는 뜻을 함께하겠다고 나선 인권변호사, 시민단체들과 ‘유족의 알 권리를 위한 법’ 제정 활동에 힘을 쏟고 있다. 더는 자신 같은 억울한 피해자가 나오지 않게 하는 것만이 이미 저 세상으로 간 딸을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라 믿기 때문이다.
끝으로 그에게 고인이 된 딸 은희 양에게 하고픈 말을 물었다.
“내가 약속했지, 그놈을 꼭 잡겠다고…. 어쨌든 범인이 잡혔다고 하니 아빠가 잡아준 것으로 생각해줄 수 있지 않겠니? 나를 너무 나무라지는 말아다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인 것 같으니…. 부디 흉악범 없는 세상에서 편안히 잘 지내라.”
그의 마지막 말이 눈시울을 더욱 붉게 물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