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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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추적 2년 5개월 “성폭행범 꼼짝 마!”

경남 양산署 정종도 경위, 8년간 23차례 성추행한 40대 집념의 검거

  •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김호경 인턴기자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4학년

    입력2011-01-24 10: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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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자 추적 2년 5개월 “성폭행범 꼼짝 마!”
    “노래 한번 불러줄래? 아이스크림 사줄게.”

    2008년 8월 10일 경남 양산시 소주동. 빨간 오토바이를 탄 40대 남자가 초등학교 여학생 3명에게 접근했다. 아이스크림에 혹한 아이들은 노래를 불렀고 남자는 약속대로 아이스크림을 사줬다. 순간 아이들은 남자를 ‘착한 아저씨’로 믿었다. 한 아이가 집으로 돌아간 뒤 아이들 2명만 남았다. 인적은 드물었다. 남자는 갑자기 아이들의 몸을 더듬었다. 몸을 만지며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제안했다. 순진한 아이들은 오토바이에 남자 앞뒤로 올라탔다. 오토바이가 출발한 순간, 남자는 본격적으로 앞에 앉은 아이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제야 놀란 아이들은 오토바이에서 뛰어내렸고 남자는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범인 단서는 오토바이뿐

    2010년 12월 22일 양산경찰서는 2년 5개월의 추적 끝에 아동·청소년 상습 성폭행범 현모(47) 씨를 검거했다. 범인 현씨가 이 사건을 포함해 2003년 1월부터 2010년 9월까지 7년여 동안 울산, 양산시 등지에서 저지른 강간, 강제추행은 총 23건으로 피해자는 28명에 달했다. 피해자는 모두 초중고생 미성년자였다. 범인을 붙잡은 양산서 정종도(49) 강력1팀장(경위)은 “범인은 미성년자에게만 성적 충동을 느끼는 소아성애자”라고 말했다.

    범인은 2003년 1월 울산시 울주군에서 첫 범행을 저질렀다. 버스를 기다리던 18세 여고생에게 “집까지 태워주겠다”며 접근해 성폭행했다. 범인은 늘 오토바이를 이용했다. “집까지 태워주겠다” “담배를 피우는지 검사하자” “휴지를 버렸으니 혼나야 한다”며 피해자들에게 접근해 오토바이에 태우고 인근 야산, 폐가, 대나무밭으로 끌고 가 잔인한 범죄를 저질렀다. 범인은 피해자의 신고를 막기 위해 휴대전화로 피해자의 얼굴과 성기를 찍고 “신고하면 인터넷에 유포하겠다”며 협박하기도 했다.



    울산, 양산 등지에서 범죄가 잇따라 발생했지만 경찰은 손쓸 도리가 없었다. 유일한 단서는 범행 장소 근처 CC(폐쇄회로)TV에 찍힌 빨간 오토바이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화면이 흐릿해 간신히 오토바이 기종을 알아낼 수 있을 뿐이었다. 사건을 담당했던 경찰서들은 증거를 찾지 못해 내사 중지했다.

    양산서도 관할지역에서 사건이 발생하자 수사에 착수했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비슷한 사건이 18건이나 있었지만 범인이 뚜렷한 흔적을 남기지 않아 수사가 힘들었다. 울산 한 경찰서의 형사가 범행 수법이 비슷한 사건들을 유심히 보고 관련 자료를 정리해두었지만 이마저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2008년부터 양산서 강력1팀장과 실종사건팀장을 맡은 정 팀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2006년 5월 양산에서 벌어진 박동은, 이은영 양 실종 사건도 정 팀장의 관심을 붙잡았다. 정 팀장은 “2008년 한 방송에서 두 아이의 실종 사건을 다뤘다. 방송을 보는데 수법이 2008년 8월 사건과 비슷해 동일범이라고 생각했다. 이때 이 범인만큼은 내 손으로 잡으리라 다짐했다”고 말했다.

    정 팀장은 당시까지 밝혀진 피해자들의 진술을 토대로 범인의 특징을 파악해갔다. 40, 50대 건설노동자 인상착의, 통통한 편에 삼성 애니콜 휴대전화를 쓰고 ‘버지니아 슬림’ 담배를 많이 피운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오토바이 면허증 소지 전과자를 중심으로 수사했으나 용의자는 좁혀지지 않았다. 친인척 명의로 휴대전화를 가입했을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수사 범위를 확대했으나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범인을 붙잡고 난 뒤 드러난 결과에 따르면 범인은 오토바이 면허가 없었고 타인 명의를 도용해 휴대전화 가입을 했다.

    새로운 단서가 없는 상황에서 피해자 진술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성범죄 수사에서는 피해자 진술이 결정적인 단서다. 하지만 정신적 충격을 받은 피해자들은 경찰 만나기를 꺼렸다. 정 팀장이 어렵게 수소문해 찾아가도 경찰이란 이유로 문전박대했다. 정 팀장은 “더 이상 피해자가 생기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포기할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오전에는 다른 사건을 처리했고 주로 오후 시간이나 비번인 날 이 사건에 매달렸다. 그는 범인이 잡힐 때까지 여가를 꼬박 탐문 수사에 썼다.

    정 팀장은 고심한 끝에 주부인 아내와 함께 수사에 나섰다. 여성 피해자가 당시 사건과 관련해 남자인 정 팀장에게는 입을 다물었지만 정 팀장의 아내의 물음에는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과일 바구니를 들고 피해자 가정을 찾았고 아내를 후배 경찰로 소개했다. 삼고초려 끝에 피해자 5명이 입을 열었다. 대학생이 된 피해자는 수사에 적극 협조했다. 정 팀장은 용의자를 찾을 때마다 휴대전화 컬러메일로 용의자의 얼굴 사진을 피해자에게 보냈고, 피해자는 이를 확인해주었다.

    양산서는 피해자로부터 범인이 2009년식 최신형 흰색 D사 오토바이를 타고 다닌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이에 양산서는 전국의 흰색 동일 기종 오토바이 53대를 일일이 찾아가 확인했다. 정 팀장은 집배원들이 동네 구석구석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해 울산, 양산 지역 우체국을 방문해 300여 명의 집배원에게 범인의 인상착의와 오토바이를 설명했다. 우체국 화장실 벽면과 승강기 등에 직접 용의자 인상착의 전단지를 붙였다. 그는 범인을 잡아야 한다는 의욕이 넘쳐 울산 동구 지역을 수사할 때는 안전모를 쓰고 흰색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만 보면 무작정 따라갔다가 속도 위반딱지도 여러 번 뗐다.

    그림자 추적 2년 5개월 “성폭행범 꼼짝 마!”

    흐릿한 CCTV, 버지니아 슬림 담배 등이 단서의 전부였지만, 정종도 팀장은 끈질긴 수사로 2년 5개월 만에 범인을 잡았다.

    정 경위 “성범죄 조서 규정 바꿔야”

    수사에 착수한 뒤 시간이 흐를수록 주변에서는 회의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부에서는 “개인의 공을 세우기 위한 수사”라며 삐딱하게 보기도 했다. 그러던 와중 다시 수사의 숨통이 트였다. 양산서는 2010년 9월 울산시 울주서 관내에 설치된 CCTV에 찍힌 범인과 새로운 오토바이 사진을 입수했다. 이전에 비해 화질이 선명한 사진이었다. 이 때 정 팀장은 피해자의 진술과 달리 오토바이 색깔이 흰색이 아닐 수도 있겠다고 의심을 했다. 직접 흰색과 은색 오토바이를 구해 CCTV로 촬영하고 비교, 분석한 뒤 오토바이 색깔이 은색임을 알아냈다.

    2010년 12월 15일 정 팀장은 드디어 범인의 오토바이를 판매한 울산의 한 판매상을 찾았다. 정 팀장은 “범인의 나이, 키, 체형을 물을 때마다 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둠 속에서 불빛이 하나씩 켜지는 느낌이었다. 수사 과정 중 가장 짜릿했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양산서 전 인력이 수사에 동원됐다. 5일 만에 울산시 남구 무거동 주택가에서 범인의 오토바이를 발견했다. 그리고 이틀을 더 숨죽였다. 확실한 증거를 잡으려고 범인 집 주변의 버지니아 슬림 담배꽁초를 찾아 DNA 검사를 맡겼고, 주변 이웃에게 오토바이를 탄 사람의 인상착의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12월 22일 범인임을 확신한 강력1팀 형사들은 퇴근하는 범인이 오토바이를 주차하고 내리는 순간 덮쳤다. 첫 범행 발생으로부터 7년 11개월, 추적 2년 5개월 만에 올린 쾌거였다.

    범인을 검거한 뒤 신고하지 않은 추가 범행 3건을 자백받았다. 하지만 정 팀장의 예상과 달리 2006년 아동 실종사건은 범인이 한 짓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범인을 잡은 원동력은 정 팀장의 끈질긴 수사 덕분이지만 그는 공을 다른 동료들에게 돌렸다.

    “동료들의 지원이 없었으면 법인을 잡기 불가능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있다. 성범죄 사건에는 어투, 냄새, 버릇 등 범인과 관련한 사소한 진술 하나도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 그런 점에서 피해자 보호를 위해 여자 경찰관이 단 한 번만 조서를 작성토록 한 현행 규정은 시일이 지난 사건의 수사를 어렵게 한다. 이번 사건의 경우도 추가로 진술을 받지 못해 조서에 의존해서 수사를 하다 보니 범인을 잡는 데 어려움이 너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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