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의 말과 생각, 감정과 행동은 뇌과학과 떼려야 뗄 수 없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은밀하게 우리를 움직이는 뇌. 강석기 칼럼니스트가 최신 연구와 일상 사례를 바탕으로 뇌가 만들어내는 마음의 비밀을 풀어준다.

스트레스를 겪으면 뇌에서 기억을 담당하는 부위인 해마 속 일부 영역의 활성이 억제돼 기억 추론 능력이 떨어진다는 연구 결과가 공개됐다. GETTYIMAGES
누구나 자기 자식은 특별하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뇌과학적으로 보면 하나를 배워 두셋을 깨우치는 아이는 지극히 평범하다. 그저 보통 사람처럼 ‘기억 추론’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배운 내용만 안다면 우리는 모든 경우에 대해 배워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겐 배운 지식, 즉 기억을 통합해 추론하는 능력이 있어 그럴 필요가 없다.
예를 들어 며칠 전 새로 이사 온 중년 부부인 남편 A와 부인 B를 만나 인사를 나눴다고 하자. 어제는 집 근처에서 만난 부인 B가 자신의 딸이라며 옆에 있던 젊은 여성 C를 소개했다. 오늘 동네 산책로에서 A가 C와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장면을 목격했다. 보통이라면 ‘부녀 사이가 좋네’라고 생각할 것이다. 둘이 부녀 사이라는 걸 배우지 않아도 A와 B를 만난 경험, B와 C를 만난 경험을 통해 A와 C의 관계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기억 추론 능력이 없다면, 즉 A가 B의 남편이고 C가 B의 딸이라는 기억을 서로 연결하지 못하면 팔짱을 낀 A와 C의 모습을 보고 부적절한 관계를 의심할 수 있다.
스트레스는 기억 담당하는 해마 활성 억제
갑작스러운 스트레스 상황에서는 이런 기억 추론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평소라면 A와 C가 부녀 사이라는 걸 잘 떠올렸을 사람이라도 산책로에서 공격적인 떠돌이 개와 마주쳐 깜짝 놀란 직후라면 A와 C의 관계를 제대로 떠올리지 못할 수 있는 것이다.스트레스 상황에서 기억 추론 능력이 억제되는 것은 생존을 위해 진화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야생에서 스트레스란 안전과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뇌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최선을 다하느라 연관된 과거 기억을 합쳐 넓은 맥락을 추론할 여유가 없다. 연결된 지식 구조를 형성하기보다 개별 사건을 명확히 파악하는 데 에너지를 집중한다.
최근 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스’에는 스트레스가 기억 추론 능력을 어떻게 억제하는지를 규명한 연구 결과가 실렸다. 뇌에서 기억을 담당하는 부위인 해마가 기억을 통합해 추론하는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며, 스트레스가 해마 일부 영역의 활성을 억제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연구자들은 피험자들에게 장면 사진과 동물 사진 24쌍을 보여줬다. 이튿날 앞서 보여줬던 동물 사진과 함께 이번엔 도형 사진 24쌍을 보여줬다. 잠시 뒤 도형 사진 하나를 보여준 다음 장면 사진 3장을 제시하고 도형 사진과 관련된 장면 사진이 어느 것인지 고르게 했다. 예를 들면 첫날엔 불타는 건물 사진과 고양이 사진을 짝지어 보여주고, 다음 날엔 고양이 사진과 정이십면체 사진을 보여준다. 그리고 정이십면체 사진을 보여주면서 불타는 건물 사진, 푸른 바다 사진, 선인장이 있는 사막 사진 중 하나를 고르게 하는 것이다. 불타는 건물 사진을 골라야 정답이다.
이 실험을 하기 직전 연구자들은 피험자를 두 그룹으로 나눠 한 그룹만 스트레스를 겪게 했다. 5분 동안 예상치 못한 주제를 주고 즉흥 연설을 하게 하거나 숫자 2043부터 암산으로 17씩 빼는 계산을 하게 했다. 이러한 스트레스를 받은 그룹은 그렇지 않은 그룹에 비해 기억 추론 테스트 결과가 나빴다. 즉 정이십면체가 고양이를 통해 불타는 건물과 연결된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못한 것이다.
연구자들은 실험 과정에서 기능성자기공명영상(fMRI)으로 피험자의 뇌 활동을 조사했다. 갑작스레 스트레스를 겪은 피험자는 도형을 봤을 때 해마에서 동물과 장면을 기억하는 영역의 활성이 커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연관된 기억이 통합되지 않아 추론에 실패했다.
정서적 기억 형성 막는 PV+ 뉴런
스트레스는 기억 추론 능력을 억제하기도 하지만 스트레스를 겪었을 때의 기억을 과잉 일반화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위협받거나 혐오스러운 장면을 목격하면 그 기억이 너무 강해 이후 행동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대표적 예가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로 재해나 사고, 전쟁 등 극한의 스트레스를 경험한 뒤 이를 떠올리게 하는 상황을 접했을 때 심한 불안과 공포를 느끼게 된다.‘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이 만들어지게 된 기억의 과잉 일반화 역시 기억 과정을 왜곡한 결과다.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으면 공포나 혐오 같은 정서적 기억에 관여하는 부위인 뇌 편도체에서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코스테론 수치가 급증하며 PV+ 뉴런을 억제한다. PV+ 뉴런은 정서적 기억 형성을 막는 뉴런이다. 정서적 기억 형성을 막는 뉴런을 억제하니 부정적 사건이 강한 기억으로 남아 두고두고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스트레스는 다방면에 걸쳐 기억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자녀가 공부 스트레스로 힘들어한다면 이번 연구를 떠올리며 한숨 돌리게 해주는 건 어떨까. 마음 편히 공부해야 기억 추론력이 높아져 하나를 배워도 열을 깨우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강석기 칼럼니스트는… 서울대 화학과 및 동대학원에서 공부했다. LG생활건강연구소 연구원, 동아사이언스 기자를 거쳐 2012년부터 과학칼럼니스트이자 프리랜서 작가(대표 저서 ‘식물은 어떻게 작물이 되었나’)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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