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 21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이명박 대통령(가운데)과 김황식 총리, 임태희 대통령실장(오른쪽)이 나란히 참석했다.
대통령 민정수석비서관실이 대통령 수석비서관(이하 수석) 및 비서관들의 휴대전화 통화내역을 조사하는 사실이 ‘주간동아’ 취재 결과 처음 확인됐다. 1월 9일 임태희 대통령실장이 주재한 수석·비서관회의 자리에서 수석과 비서관들은 휴대전화 통화내역 조회 동의서를 썼으며, 이를 바탕으로 민정수석실이 통화내역을 확인하는 것이다. 수석과 비서관들을 대상으로 한 통화내역 일제 조사는 이례적인 일이다. 이를 두고 ‘대통령실 내 파워게임’ ‘언로 단속’ 등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복수의 관계자들에 따르면 ‘중앙일보’가 대통령 신년 특별연설을 앞두고 회의 내용을 기사화하자 이명박 대통령이 격노해 “묵과하지 않겠다”고 했고, 이런 분위기를 감지한 임 실장이 휴대전화 통화내역 조회 동의서를 쓰도록 했다는 것이다.
중앙일보에 따르면 1월 1, 2일 청와대에서 이 대통령이 주재한 신년 특별연설 원고 독회에 임 실장과 백용호 정책실장, 김두우 기획관리실장, 일부 수석 등 핵심 참모와 아직 임명장을 받지 않은 이동관, 박형준 특보도 참여했다(두 특보는 1월 3일 임명장을 받았다). 이 자리에서 일부 참모가 연설문에 ‘정치권과의 소통을 강화하겠다’는 표현을 넣자고 하자 이 대통령은 “왜 정치권 불만을 수용해 나를 ‘소통 안 하는 대통령’으로 만들려고 하느냐”고 질책했다. 한 참모가 “집권 4년 차인 올해는 대선 예비후보들의 목청이 높아지면서 정책 수행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분석하자 “동의할 수 없다. 일 열심히 않고 딴생각 하는 사람들이 권력누수(레임덕)를 말한다”며 참았던 불만을 토로했다. 이 대통령은 또 “두 특보 사무실을 청와대 위민관(비서동)에 마련할 수 있는지 알아보라”고 했다.
MB, 신년연설 내용 유출에 격노대통령실 관계자는 “신년 특별연설 독회 자리에 누가 들어오고, 어떤 내용이 오갔는지 보도되니 대통령이 황당하지 않았겠나. 많아봤자 10여 명만 아는 사실이다”며 “두 특보에 대한 대통령의 신뢰가 보도되면서, 두 특보를 견제하기 위한 세력이 흘렸다는 추측과 역으로 특보 중 누가 흘렸다는 추측이 난무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결국 통화내역 조회를 통해 ‘기밀 누출자’를 색출하고 분위기를 일신하겠다는 뜻이지만, 이를 둘러싼 불만도 터져 나오고 있다. ‘임 실장의 줄 세우기’라는 분석부터 “앞으론 기자를 만나는 행정관들까지 통화내역을 조사할 것”이라는 냉소까지 반응은 다양하다.
김희정 청와대 대변인은 이에 대해 “1월 9일 대통령실장 주재 회의 중간에 수석들 사이에서 ‘정확하지 않은 내용이 언론에 나가면 안 된다’는 얘기가 오갔고, 다른 수석도 이에 동의하면서 그런 조사(휴대전화 통화내역 조사)가 있었다”며 “신년 특별연설 관련 기사뿐 아니라 지난해 연말 장관 성적표 등 몇몇 기사가 문제가 됐고, ‘우리(수석) 중 누군가가 잘못한(흘린) 거 아니냐’는 문제제기가 있었다. 내부 자정 차원에서 진행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는 “대통령이 보도 내용에 대로하거나 조사를 지시한 것은 아니다”고 해명했다. 당시 회의 내용에 대해선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이에 대해 장석명 대통령공직기강비서관은 “현재 조회 중이며, 당시 조회 동의서를 쓴 수석과 비서관이 많아 통화내역을 다 확인하려면 시간이 걸린다”며 “동의서에 각자 조회 동의 기간을 썼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조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조회 목적과 동의서를 쓴 공직자 수에 대해선 “공식 발표할 내용도 아니고 그동안 몇 차례 동의를 받아 조회를 한 적도 있다. 구체적으로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그래도 ‘임태희 파워’
정동기 낙마 문책론 전방위 공격 … MB 든든한 신임 받지만 독주체제 흔들릴 가능성
| “임태희 대통령실장 체제의 3기 참모진에는 이동관 전 홍보수석, 박형준 전 정무수석이 빠졌다. ‘거물급’은 없고 ‘난쟁이’만 있는 상황에서 임 실장의 파워에 브레이크를 걸 사람이 없었다.”
정동기 감사원장 내정자의 낙마로 임태희(55) 대통령실장 책임론이 일던 1월 12일, 대통령실 관계자 A씨는 사태를 예견했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정 내정자가 이날 자진사퇴함으로써 예기치 않게 불거진 당청(黨靑) 분란은 한 고비 넘겼지만, 사실상 인사수석 역할을 하며 인사를 총괄한 임 실장에게는 아직 고비가 남아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물론 이번 사태로 이명박 대통령이 가장 큰 정치적 타격을 받았지만, 임 실장이 입은 상처도 만만찮다. 지난해 7월 대통령실장 부임 이후 김태호 총리 후보자 등 3명의 국무위원 후보가 인사청문회 벽을 넘지 못했고, 이번에는 청문회도 거치기 전에 여당의 공개 반대로 정 내정자가 자진사퇴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이를 두고 야당뿐 아니라 당청 일각에서도 임 실장 책임론을 제기하고 있다. 인사를 검증하는 대통령실장의 ‘자리’ 때문이겠지만, 단순히 그것 때문에 날아드는 비난치고는 그 세기가 심상찮다.
수도권의 한나라당 초선 의원은 “사전 질문서 항목이 200개나 되고 모의 인사청문회까지 도입한 마당에 또 이런 일이 생긴 것은 대통령실장의 안이한 정무적 판단 때문”이라고 했다. 이경재 한나라당 의원은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참모들이 입맛에 맞게끔 그분(이명박 대통령)이 좋아한다고 그러면 무조건 추천하는 게 문제”라고 쏘아붙였다.
행정고시(24회) 출신으로 3선(16~18대, 경기 성남분당을) 의원을 지내며 당 내외에서 친화력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임 실장인 터라 대통령실 관계자들은 더욱 당혹스럽다.
그렇다면 임 실장을 향한 전방위적 공격을 설명할 키워드는 뭘까. 당청 관계자들의 분석을 종합해보면 ‘임태희 1인 체제’ 형성 과정과 인사 검증 시스템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대통령실 관계자 B씨는 이렇게 설명한다.
임 실장에 권력 집중 불만 폭발?
“임 실장에게 권력이 집중되면서 쌓였던 불만이 정동기 후보 낙마로 동시다발적으로 분출됐다고 본다. 수석이 VIP(이명박 대통령)와 현안 얘기를 하다가도 사전에 임 실장과 얘기하지 않은 부분을 꺼내면 임 실장은 ‘대통령이 바쁘신데 나중에 얘기합시다’며 제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VIP 대면 자리에는 자신과 뜻이 통하는 일부 수석만 참석시키면서 서서히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나를 통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길들이기’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았다. 정 내정자 개인적으로는 큰 문제가 없더라도, 4월 재보선과 내년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7개월에 7억 원을 번 감사원장 내정은 국민 정서와 맞지 않았다.”
대통령 보고 직전 실장이 수석 혹은 비서관들과 사전에 만나 의견을 조율하는 일은 항상 있어왔다. 하지만 B씨는 “좋게 말하면 ‘사전 조율 강화’지만 나쁘게 말하면 언로 협소화였다”며 “실장 의견에 반하는 보고는 VIP에 전달되지 않는 문화가 생긴 것 같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인사수석 역할까지 대통령실장이 맡다 보니 임 실장의 분별력이 흐려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청와대는 2009년 천성관 검찰총장 후보자가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낙마한 뒤 ‘인사 시스템 개혁’ 차원에서 그해 9월 인사기획관 자리를 신설했지만 그동안 한 명도 임명되지 않았다. 지난해 7월 대통령실은 “임 실장이 당분간 인사기획관 역할도 수행하기로 했다”고 발표했고, 결국 지난해 12월 31일 기획관 자리를 폐지했다.
‘1인 체제’에서 정부 고위공무원과 공기업 임원 등의 인사를 총괄하는 인사위원회 위원장까지 맡으면서 임 실장 인맥으로 통하는 인사 7명이 장·차관급으로 임명된 것도 공교롭다.
8·8개각과 12·31개각을 통해 임명된 임종룡 기획재정부 1차관, 최원영 보건복지부 차관, 임채민 국무총리실장, 육동한 국무총리실 국무차장, 김석민 국무총리실 사무차장은 행정고시 24회 동기다. 또 김창경 교육과학기술부 2차관은 임 실장의 경동고 후배이고, 김석동 금융위원장 역시 과거 재정경제원에 함께 근무한 적이 있는 서울대 경영학과 선배다.
물론 임 실장이 이들을 모두 직접 챙겼다고 보는 정치권 일각의 시각은 과장된 것이다. 이들 모두 그만한 역량과 경험을 쌓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B씨는 “‘부임 초기부터 경제부처 좋은 자리는 실장이 직접 챙긴다’는 얘기가 돌았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치권에서는 이를 ‘대망론’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많다. 여의도연구소장과 한나라당 정책위의장, 고용노동부 장관 등을 지냈지만 임 실장의 대중적 인지도는 여전히 낮은 상황. 지난해 7월 국무총리와 대통령실장 후보에 함께 거론된 만큼 대통령실장을 거쳐 차기 총리 혹은 서울시장·경기도지살를 염두에 두고 자기 사람 챙기기를 하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다.
임 실장을 잘 아는 한나라당 중진 의원의 말이다.
“임 실장은 윗사람에게 아주 잘하는 스타일이다. 이번 인사가 대통령의 뜻이었다면 ‘NO’라고 말하는 사람도 아니다. 대통령 후보와 당선인 비서실장을 지내면서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워졌고 이상득 의원의 신뢰도 받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서서히 인지도를 높이고 자신의 인맥도 강화해나가면 충분히 자기 정치를 위한 행보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인사는 그걸 위한 포석 아니겠나.”
(왼쪽) 정동기 감사원장 내정자의 낙마로 문책론에 휩싸인 임태희 실장. (오른쪽) 1월 12일 한나라당 당사에서 열린 최고중진 연석회의에서 안상수 대표(오른쪽)와 김무성 원내대표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 김 원내대표는 전날 정동기 감사원장 내정자에 대한 당 지도부의 사퇴 요구 방식이 부적절했다며 안 대표를 비판했다. 청와대 권력지형 변화 중
그의 말처럼, 지난해 7월 이후 임 실장 독주체제가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두터운 이 대통령의 신임이 있는 상황에서 이 대통령의 ‘머리’로 통한 박형준 전 정무수석이나 ‘입’ 역할을 한 이동관 전 홍보수석 등 견제세력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최근 12·31개각으로 이동관, 박형준 전 수석이 언론특보, 사회특보로 귀환하면서 임 실장 독주체제와 청와대 권력지형도 바뀌고 있다는 게 청와대 안팎의 시각. 그동안 인사 논의에서 배제된 정진석 정무수석과 홍상표 홍보수석이 임 실장과 김두우 기획관리실장에 맞서 가끔 서로를 견제하기도 했는데, 두 특보의 귀환으로 이들 4인방은 부쩍 가까워졌다는 얘기가 돌고 있다. 동시에 두 ‘거물 특보’를 견제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1월 9일 대통령실장 주재 수석비서관회의에서 휴 대전화 통화내역 조회 동의서를 쓰는 상황이 생긴 것도 이런 변화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임 실장의 ‘집안 단속용’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임 실장과 ‘찰떡 호흡’을 맞춘 김두우 기획관리실장이 지난해 12월 31일 인사에서 비서관급에서 수석급이나 다름없는 기획관급으로 조용히 승격된 것도 이런 흐름과 무관치 않다. 서울대 외교학과 출신에 중앙일보 정치부장을 지낸 김 실장은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와 동아일보 정치부장을 지낸 이동관 특보와는 여러모로 비교되는 인물.
1월 12일 오후 이 대통령이 임 실장 방을 찾아 “열심히 일하라”며 격려했다는 보도가 있은 후 임 실장을 비롯한 몇몇 수석의 문책론은 다소 수그러든 상황이다. 여권에서도 “의사는 충분히 표현했다”며 문책론 제기에는 조심스러운 기류가 느껴진다.
임 실장으로서도 정동기 낙마를 통해 날아든 문책론에 대해 억울할 수도 있다. 의정 활동을 하면서는 온화한 이미지에 맞게 정책 대안을 제시하는 모범적인 의원 생활을 했고, 노동부 장관 시절 두 딸을 시집보내면서 두 번 다 청첩장을 돌리지 않고 축의금도 사양하는 등 공직자로서의 몸가짐은 많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대통령 국정 운영을 책임지고 보좌해야 할 임 실장으로서는 대통령실의 한 행정관 말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이명박 정부의 성공을 바라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짜증만 남는다. 서울 G20 정상회의 성공 개최 등 많은 일을 해도 인사로 ‘초 치면’ 정말 힘 빠진다. 초기 ‘고소영 내각’부터 지금까지 인사 때면 항상 피곤하다. 대통령이 올해가 가장 일하기 좋은 시기라고 했는데 일만 열심히 하면 뭐 하나.”
배수강 기자bsk@donga.com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