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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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탄두 철수 계획은 없었다”

1979년까지 모든 지상군 철수 등 8개항 검토…실제로는 3000명만 빠져 3만7000명 남아

  • 입력2005-08-22 11: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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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핵탄두 철수 계획은 없었다”
    남북 정상회담 이후, 한미간의 현안은 다시 주한미군이다. 주한미군에 대한 한국과 미국의 공식적인 입장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통일 이후에도 미군은 주둔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워싱턴 일각에서는 주한미군을 포함한 아시아 주둔 미군의 위상과 규모, 성격을 재조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1977년 카터 행정부는 주한미군 철수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세운 바 있다. 1977년 1월에 시작되어 2년6개월 동안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카터의 주한미군 철군 계획은 실제로 1개 전투대대 674명만을 철수하는 것으로 마무리지어졌다.

    이 1개 대대의 전투 병력을 포함해 카터 행정부 때 한반도에서 빠져나간 주한미군 병력은 3000명이다. 대신 12대 이상의 F-4 전투기와 전투기 요원을 포함해 총 900명이 한국에 재배치되었고, 그때 이후 주한미군의 규모는 3만7000명으로 남게 된다. 남한에 배치되어 있던 700기의 핵탄두는 250기로 줄었고, 군산 공군 기지에 집중적으로 재배치되었다.

    카터 행정부가 입안한 주한미군 철수 계획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려주는 문건은 1977년 1월26일에 작성된 ‘대통령 검토 각서/NSC 13’이다. 이른바 PRM(Presidential Review Memo-randum)이라 불리는 이 2급(Secret) 비밀 문건(1998년 12월21일 비밀 해제)은 카터 대통령 취임 엿새째가 되던 날 백악관의 국가안보회의(NSC)가 작성한 것이다.

    이 문건에는 거두절미하고 ‘한국’이라는 단 한 단어의 제목이 붙어 있다. 카터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 때 이미 주한미군 철수를 공약했다. 주한미군 철수는 한미 두 나라뿐 아니라 전세계 초미의 관심사였다. 임기가 시작된 지 일주일도 안 되어 주한미군 철수 정책을 검토한 문건인 만큼 ‘한국’이라는 제목 하나만으로도 이 비밀 문서의 비중을 알 수 있다.



    문서 끄트머리에 카터 대통령의 안보담당 보좌관이던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의 서명이 들어가 있는 두 장짜리 이 문서는 부통령, 국무부 장관, 국방부 장관을 포함해 재무장관과 주 유엔 미국 대표, 관리예산처장, 합참의장, CIA 국장, 무기통제 및 군비 축소 국장 등이 받아보게 되어 있다. 주한미군 철수에 직접 관련된 부처의 장들이다.

    ‘대통령이 국무부가 주재하는 정책검토위원회(PRC·Policy Review Committee)에 대 한반도 정책에 대한 광범위한 검토를 수행할 것을 지시했음. 검토 작업은 3월7일까지 완료되어야 하며, 다음 사항을 검토해야 함.’

    일반적인 검토 사항은 한반도에서의 미국의 국익과 목적 등 세 가지였다. 이 가운데 미군 병력 철수와 직접 관계되는 것은 3항이다. ‘다음 사항을 실시할 시 발생 가능한 상황을 검토할 것’이라는 3항의 지시문 밑에는 (a)한반도에서의 재래식 무기 무장 미군 감축 (b)주한미군의 한국 내 남부 재배치 (c)한국에 대한 향후 미국의 군사 지원 수준 등 8개 항목의 검토 사항이 들어 있다.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당시 한국에 배치되어 있던 핵탄두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이 ‘재래식 무기로 무장한 미군’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는 점과, 비무장지대 부근에 배치한 미군을 남쪽으로 끌어내려 재배치하는 방안이 거론되었다는 점이다.

    이 대통령 검토 각서에는 철군 규모 및 시기 등 구체적인 내용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 PRM-13을 검토하기 위해 모인 정책검토위원회(PRC)는 별도의 의제(Agenda)를 작성한다. 1급 비밀(Top Secret)로 분류되어 있는 정책검토위원회의 의제(1998년 12월21일 비밀 해제)에는 구체적인 병력 규모 및 시기 등 철군 조건을 다섯 가지로 상정해놓고 있다.

    ‘아래의 지상군 철군 조건 중 대통령에게 건의할 조건을 결정함.

    1. 1979년 말까지 모든 지상군 전투 병력 및 전투 지원 부대 철수

    2. 5년간에 걸친 단계적 전(total) 병력 철수

    a. 1978년에 1개 여단을 철수하고, 1982년까지 기타 2개 여단 철수

    b. 1978년에 1개 여단을 철수하고, 1982년에 잔류 2개 여단 철수

    3. 철수 계획을 조기에 발표한 후 1982년에 실제로 철수

    4. 1980년까지 2개 여단을 단계적으로 철수하며, 추후 철수는 긴장 완화에 따라 조절

    5. 이미 철수 계획에 잡혀 있는 3200명을 포함해 조기에 7000명을 철수하며, 추후 철수는 긴장 완화에 따라 조절’

    이 PRC 문서는 또한 철군의 시기 및 방법은 한국과 상의해서 결정한다고 명기해놓고 있다.

    PRC 문서에서 제시된 미군 철수의 규모와 방법, 시기는 1977년 3월10일자의 국무부 2급 비밀문서에서 5개의 조건으로 더욱 구체화된다. 국무부의 리처드 홀브룩 동아태 담당 차관보와 앤서니 레이크가 공동으로 작성해 밴스 국무장관 앞으로 제출한 국무부의 이 행동 각서 문서의 제목은 ‘한국 PRM 답변’으로 되어 있다. 한국(주한미군 철수)을 주제로 한 대통령 검토 각서에 대한 답변이다.

    ‘지상군 감축에 대한 5가지 조건을 다음과 같이 검토했음.

    -집중적인 조기 철수:1979년 말까지 모든 지상군 전투 병력 및 전투 지원 부대 철수

    -단계적인 전(total) 병력 철수:5년간에 걸쳐 미 지상군 철수

    -집중적인 말기(late) 철수:발표는 조기에 하되 미 지상군은 5년으로 잡혀 있는 기간의 말기에 실시

    -2개 보병 여단을 단계적으로(staged) 철수하며, 추후 철수는 긴장 완화 및 기타 요인 감안

    -병력 7000명을 조기 철수하며, 추후 철수는 긴장 완화에 따라 조절

    석 장짜리 이 비밀문서는 다섯 가지 철수 조건 뒤에 다음과 같은 의견을 첨부해놓았다.

    미군 남쪽으로 재배치 방안 거론

    ‘예상대로 철수에 따른 위험부담 문제에 대해 의견 일치를 보지 못했음. 합동참모부(JCS)는 가장 보수적인 조건을 건의할 것임. 그러나 대부분은 철수가 신중하게 이루어지고, 기본적인 미 공군 및 해군 부대와 육군 지원 능력이 한국에 그대로 잔류하며, 적절한 보상책이 이루어지고, 북한이 오해할 만한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는다면 위험 부담은 능히 수용할 만함.’

    남북정상회담 이후 불어닥친 한반도 및 주변 정세 변화는 어떤 형태로든 주한미군의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1977년 미 행정부 내에서 극비리에 작성되었던 주한미군 철수 계획이 지금 그대로 적용될 가능성은 작다. 하지만 PRM 13 등의 문서에서 나타난 철군의 방법과 시기, 토론 과정과 경로 등 철수 계획의 이면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알려진 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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