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는데…. 귀소본능, 수구초심이죠 뭐.”
늦깎이 대학원생 심상철(71) 씨와 대학생 아내 강성옥(61) 씨는 멋쩍어했다. 심씨 모교인 성균관대에 3년 걸쳐 120만 캐나다달러와 1300만원을 기부한 것과 한국에서 만학도가 된 이유를 묻는 자리에서다.
심씨 부부는 2006년 1월 사후연금보험 200만 캐나다 달러 가운데 100만 캐나다달러를 장학금으로 낸 데 이어, 지난해 9월에는 20만 캐나다달러를 추가로 기부했다. 12월8일 성균관대 통합사회복지센터 발대식에서는 센터 건립기금으로 1300만원을 냈으며, 학교 측은 심씨를 사회복지센터 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위촉했다.
성균관대 약대 56학번인 심씨는 대학 졸업 후 약국과 플라스틱 공장을 운영하다 1974년 캐나다 토론토로 급히 건너갔다. 당시 캐나다로 먼저 이민한 여동생이 부모를 초청했는데 아버지가 그곳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 것. 이민은 그렇게 이뤄졌다. “제가 4남1녀 가운데 장남인데 동생들과 터울이 많아요. 동생과 자식을 공부시키려니 캐나다가 좋겠더라고요. 그 무렵 한국은 중학교에서부터 입시 전쟁이었거든요.”
꽤 잘나가던 사업체는 이후 친구가 운영하다 문을 닫았다. 심씨는 그곳에서 슈퍼마켓과 빨래방을 운영하며 동생과 자녀를 공부시켰다. 강씨의 표현으로는 ‘하루 4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는’ 생활이었다. 그래도 인근 고교에 매년 장학금을 내놨고, 집 근처 양로원에서의 자원봉사도 2년간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양로원 봉사를 하면서 왠지 허전하더라고요. 가슴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싶어 학술적으로 더 배우고 싶어졌어요.”
결국 2007년 일시 귀국해 성균관대 사회복지대학원에 입학했다. 부창부수(夫唱婦隨). 아내 강씨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캐나다 현지 한인신문에 칼럼을 연재할 정도로 글 실력을 인정받은 강씨는 한국방송통신대 국문학과에 입학했다. 1967년 서울 이화여고 졸업 후 40년 만에 다시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캐나다에 사는 자녀들도 부모의 ‘도전’을 격려했다. 200만 캐나다달러의 보험금 가운데 100만 캐나다달러를 기부할 수 있었던 것도 자녀들이 적극 찬성했기 때문이다. 나머지를 5명의 자녀에게 20만 캐나다달러씩 나눠줬지만 큰아들은 이마저도 “대학에 기부하시라”며 사양했다. 2007년의 추가 기부금 20만 캐나다달러는 큰아들 몫이었다.
현재 성균관대 외국인숙소(International House)에서 생활하는 심씨 부부는 “생활비는 연금을 아껴 쓰면 충분하다. 다시 신혼부부가 된 것만으로도 좋다”며 웃었다.
공부를 마치면 심씨는 복지정책 연구를 계속하고, 강씨는 남편이 다니는 대학원에 진학할 예정이다.
늦깎이 대학원생 심상철(71) 씨와 대학생 아내 강성옥(61) 씨는 멋쩍어했다. 심씨 모교인 성균관대에 3년 걸쳐 120만 캐나다달러와 1300만원을 기부한 것과 한국에서 만학도가 된 이유를 묻는 자리에서다.
심씨 부부는 2006년 1월 사후연금보험 200만 캐나다 달러 가운데 100만 캐나다달러를 장학금으로 낸 데 이어, 지난해 9월에는 20만 캐나다달러를 추가로 기부했다. 12월8일 성균관대 통합사회복지센터 발대식에서는 센터 건립기금으로 1300만원을 냈으며, 학교 측은 심씨를 사회복지센터 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위촉했다.
성균관대 약대 56학번인 심씨는 대학 졸업 후 약국과 플라스틱 공장을 운영하다 1974년 캐나다 토론토로 급히 건너갔다. 당시 캐나다로 먼저 이민한 여동생이 부모를 초청했는데 아버지가 그곳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 것. 이민은 그렇게 이뤄졌다. “제가 4남1녀 가운데 장남인데 동생들과 터울이 많아요. 동생과 자식을 공부시키려니 캐나다가 좋겠더라고요. 그 무렵 한국은 중학교에서부터 입시 전쟁이었거든요.”
꽤 잘나가던 사업체는 이후 친구가 운영하다 문을 닫았다. 심씨는 그곳에서 슈퍼마켓과 빨래방을 운영하며 동생과 자녀를 공부시켰다. 강씨의 표현으로는 ‘하루 4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는’ 생활이었다. 그래도 인근 고교에 매년 장학금을 내놨고, 집 근처 양로원에서의 자원봉사도 2년간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양로원 봉사를 하면서 왠지 허전하더라고요. 가슴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싶어 학술적으로 더 배우고 싶어졌어요.”
결국 2007년 일시 귀국해 성균관대 사회복지대학원에 입학했다. 부창부수(夫唱婦隨). 아내 강씨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캐나다 현지 한인신문에 칼럼을 연재할 정도로 글 실력을 인정받은 강씨는 한국방송통신대 국문학과에 입학했다. 1967년 서울 이화여고 졸업 후 40년 만에 다시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캐나다에 사는 자녀들도 부모의 ‘도전’을 격려했다. 200만 캐나다달러의 보험금 가운데 100만 캐나다달러를 기부할 수 있었던 것도 자녀들이 적극 찬성했기 때문이다. 나머지를 5명의 자녀에게 20만 캐나다달러씩 나눠줬지만 큰아들은 이마저도 “대학에 기부하시라”며 사양했다. 2007년의 추가 기부금 20만 캐나다달러는 큰아들 몫이었다.
현재 성균관대 외국인숙소(International House)에서 생활하는 심씨 부부는 “생활비는 연금을 아껴 쓰면 충분하다. 다시 신혼부부가 된 것만으로도 좋다”며 웃었다.
공부를 마치면 심씨는 복지정책 연구를 계속하고, 강씨는 남편이 다니는 대학원에 진학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