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94

..

꿀맛 나는 세상 좇는 ‘토종벌 박사’

경북 성주 박세경씨… 심산 유곡 찾아 토종꿀 농사짓기 20년

  • < 신을진 기자 > happyend@donga.com

    입력2005-01-12 13:34: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꿀맛 나는 세상 좇는 ‘토종벌 박사’
    장마가 시작되고 하루에도 몇 번씩 비가 뿌리더니, 그 날은 신기하게도 하늘이 활짝 개었다. 도로는 금세 찜통처럼 달아올랐다. 열기 속을 다섯 시간 동안 달려 경북 성주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푸르고 순한 얼굴의 가야산 자락이었다.

    길은 닦여 있지만 굽이굽이 돌아가는 지형이 제법 험하다. 해발 700m의 백운동 골짜기에 자리한 박세경씨(43)의 벌농장에 도착하니 불어오는 산바람에 땀은 어느 샌가 식어버린 뒤였다. ‘붕붕’ 소리를 내며 날아다니는 벌들과 짚으로 엮은 삼각형 지붕을 머리에 인 벌통 행렬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왔다. 진한 흙 냄새에 섞여 꽃향기인지, 꿀향기인지 모를 달콤한 내음도 코를 자극했다.

    박씨는 점심을 대접하겠다며 자신의 거처로 안내했다. 집이라 하기엔 너무 초라한, 임시 가건물 같은 컨테이너 박스에서 부인 김이화씨(40)가 미숫가루를 타서 내왔다. 설탕 대신 꿀이 들어간 미숫가루를 마시고, 꿀에 버무린 닭고기 요리를 먹으며 박씨 부부가 들려주는 ‘토종꿀 이야기’를 들었다.

    “지리산 청학동, 강원도 봉산, 오대산 골짜기까지 산간 벽지 곳곳 안 다녀본 데가 없어요.”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는 어린 두 아들을 둔 이들 부부가 10여 년간 인적 드문 깊은 산속을 헤매고 다닌 데는 이유가 있다. 다니던 대학도 중퇴하고 일찌감치 ‘꿀농사’에 뛰어든 박씨는 토종벌을 키우고 거기서 양질의 토종꿀을 생산하는 일에 청춘을 다 바쳤다. 벌써 20년 가까이 벌과 함께 살아온 셈이다. “토종꿀은 흔히 ‘사람이 아니라 하늘이 낸다’고 하지요. 그만큼 주위 여건이 중요합니다. 주변환경이 꿀의 품질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산세가 깊고 자연환경이 좋은 곳을 찾아다니다 보니 심산유곡에서만 살게 되었지요.”

    1년에도 여러 번 꿀을 뜨는 양봉과 달리 토종꿀은 한장소에서 1년에 딱 한 번만 꿀을 뜨기 때문에 귀한 것으로 여긴다. 생산자 입장에선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생산량을 장담할 수 없고, 비가 오면 벌들이 그동안 저장한 꿀을 먹어치우기 때문에 비가 많이 오는 해는 농사를 망치기 일쑤다. 갈수록 늘어나는 양봉의 득세 속에서 힘들인 만큼 가치를 인정 받고 이를 보존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박씨는 옆에서 누가 뭐라 해도 미련하리만큼 우직하게 한길만을 걸어왔다.



    “토종꿀의 우수함은 결코 양봉에 댈 수 없습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철 따라 피는 백화천초의 진수를 따 모은 꿀을 벌 스스로의 힘으로 1년 내내 숙성한 것이 토종꿀입니다. 예부터 어머니들이 시집간 딸이 자식을 낳으면 다른 건 몰라도 토종꿀 한 단지는 꼭 가져간다 했지요. 그만큼 귀하고 우수한 식품이 바로 꿀입니다.”

    누구 하나 알아주는 이 없어도 박씨는 묵묵히 산을 옮겨다니며 벌을 키우고 좋은 꿀을 생산하기 위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여러 번 실패도 하고, 수확한 꿀을 제대로 팔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때도 많았다. 한해 한해 지나는 동안 박씨는 나름의 기술과 노하우를 축적하면서 ‘벌박사’가 되었지만, 이런 그의 고집에 죽어나는 건 부인 김씨였다.

    “정말 고생 바가지였어요.” 손사래부터 치는 김씨. “결혼생활 15년 동안 울기도 참 많이 울었어요.” 그의 입에서 절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온다.

    “강원도 살 땐 방문을 열면 신발에 뱀이 또아리를 틀고 있었어요. 전기도 안 들어오는 곳이라 불을 때서 밥을 짓고 설거지는 계곡까지 한참을 내려가서 했어요. 너무 힘들어 유산까지 했는데, 그때 비하면 지금은 고생도 아니예요.”

    꿀맛 나는 세상 좇는 ‘토종벌 박사’
    하동에서는 비닐하우스를 짓고 살았다. 골짜기까지 찾아온 친정아버지와 오빠는 이들이 사는 꼴을 보곤 너무 기가 막혀 그대로 돌아가 버렸다고 한다. 군에서 제대하고 찾아온 시동생이 한밤중에 방문을 열었을 땐 인민군인 줄 알고 기겁했을 정도로 이들은 인적 없는 적막강산 속에서 외로운 세월을 보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유치원 같은 델 보낼 수 있나, 도저히 못 살겠다 싶어 다른 일을 해보자고 읍내에 조그만 가게를 열었는데 이 사람은 관심도 없는 거예요. 그저 산 속에서 벌만 지키고 있으니 보다 못해 저도 다시 들어갔죠. 전 지금도 꼬박꼬박 월급 받는 직장인 남편을 둔 여자들이 제일 부러워요.” 김씨가 바가지를 긁어도 돌아오는 건 “쪼매만 더 참아봐라. 좋은 일이 있겠지” 하는 무심한 대답뿐이었다. 그렇게 함께 세월을 보내다 보니 산골생활에도 이력이 나 어쩌다 시내 한번 내려가면 탁한 공기에 목이 다 아프고 현기증이 난다는 김씨. “우리 가야산이 제일 좋고 나중에 이곳에 흙집이라도 지어 살고 싶다”고 그들은 말한다.

    먼 길을 돌아돌아 다시 고향 성주로 돌아온 박씨는 이제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가야산 지킴이’이자 ‘토종벌 지킴이’로 여생을 보낼 생각이다. 그의 꿈은 가야산 일대를 세계적인 토종꿀 생산단지로 만드는 것. 이를 위해 지난해 주민 15명과 가야산 벌작목반을 구성해 500통의 토종벌을 들여와 ‘가야산 토종꿀’의 토대를 닦았다. 기존에 양봉을 하던 사람을 일일이 설득하고 자신의 벌을 기꺼이 나눠주면서 이곳을 토종벌 군락으로 바꿔놓은 그는 주민과 함께 밀원을 가꿔 나가고 품앗이를 하며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하는 ‘고향의 봄’을 재현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가야산은 우리 나라 어느 곳보다 토종벌을 키울 여건이 우수합니다. 해발이 높고 꽃피는 기간도 길어 밀원지가 풍부하다 보니 그야말로 다양한 꿀을 얻을 수 있지요. 성주는 참외와 수박이 유명하지만 백운동 일대는 고랭지라 농사도 잘 안 되어 오랫동안 빈농 마을이었는데 앞으로는 벌농사로 고소득을 올리는 부자동네가 될 수 있을 겁니다.”

    박씨는 또한 이곳을 도시인이 찾아와 ‘고향’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이를 위해 주말농장도 운영하고 있다. 도시인에게 벌통을 분양해 토종벌을 직접 사육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회원은 주말이나 휴가 때 이곳으로 내려와 자신의 벌통을 관리하고 가을엔 직접 꿀을 딴다. 찾아온 손님들에게 미숫가루와 산나물밥을 대접하고 잊을 수 없는 ‘꿀맛’을 제공하는 것이 이들에겐 큰 즐거움이다.

    “수입꿀도 막 들어오는데, 우린 질로 승부해야죠. 욕심내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어요. 그저 양심적으로 벌을 키우고 꿀을 따서 그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만 드리는 거죠. 순전히 자연이 만드는 자연식품이니, 자연이 주는 만큼만 받을 겁니다. 이곳을 더 이상 개발하지 않고 아름다운 자연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있는 힘을 다할 생각입니다.”

    가을에 있을 단 한 번의 수확을 위해 1년을 마음 졸여야 하는 벌농사. 비가 많이 오는 여름이면 박씨는 벌통 옆에서 24시간 비상대기를 한다. 벌통이 물에 잠기거나 넘어지지 않도록 돌보고, 벌의 천적인 두꺼비와 개미가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잡는 것도 그의 몫이다. 20년을 벌과 함께 지내다 보니 이젠 벌이 날아가는 모습만 봐도 어떤 상태인지 한눈에 알 수 있다고 한다.

    벌을 겁내는 사람에게 “한방에 5만 원짜리 벌침이다”고 농을 하는 그는 일할 때도 그저 모자 하나만 쓴 채로 벌통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예전엔 옷 속으로 벌이 들어가 온몸을 100방쯤 쏘이고, 왼쪽 오른쪽 번갈아가며 애꾸눈이 되곤 했지만 이젠 온몸에 굳은살이 박혀 쏘여도 아픈 줄 모른다. 누가 그 앞에서 벌 한 마리라도 죽이면 그자리에서 난리가 난다.

    가야산 토종꿀을 세계적인 ‘명품’으로 만들겠다는 이들의 꿈이 아직은 좀 멀어보이지만, 깊은 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욕심 없는 삶이 꿀벌의 그것과 어딘지 묘하게 닮아 있었다.



    사람과 삶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