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76)에게는 온갖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이자 1979년부터 90년까지 11년간 총리를 역임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 최장수 총리, 미국 레이건 대통령의 이데올로기 동지로 소련에 대항하는 힘의 정책을 역설해 냉전을 승리로 이끈 ‘냉전 투사’, 영국병을 수술해 경제개혁과 사회개혁을 함께 이룬 개혁가 등등.
대처 전 총리가 실시한 개혁정책은 아직도 영국 사회 곳곳에 남아 있으며 상당수가 별다른 변화 없이 시행되고 있다. 대처가 총리직에서 물러난 지 11년이 지났지만 영국은 여전히 대처의 그늘에서 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대처 전 총리가 가벼운 경련을 일으켜 더 이상 공개 활동을 못하게 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자 영국 언론은 대처의 개혁정책을 다각도로 분석하고 그녀가 실시한 개혁의 공과를 분석하는 데 상당한 지면을 할애했다.
가벼운 경련으로 공개 활동 못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윈스턴 처칠 경이 아닌 노동당의 클레멘트 애틀리가 총선에서 승리해 총리에 취임했다. 애틀리 총리는 석탄과 철도, 전기 등 주요 기간산업을 국유화했고 무료 의료보험과 대학교육 도입 등 복지국가의 기틀이 되는 정책을 도입했다. 애틀리의 정책은 국민의 대폭적인 공감을 얻었기 때문에 이후 보수당이 집권해도 거의 그대로 유지됐다. 어떤 후임자도 정치적 위험을 무릅쓰고 이를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1979년 5월 총리에 취임한 마거릿 대처는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기업의 생사는 정부가 아니라 시장이 결정해야 한다는 논리로 항공과 철강, 가스 등 국영기업을 매각, 민영화하고 합법적인 쟁의행위를 최소화했다. 또 각종 복지 비용을 축소하고 세율을 내리는 한편, 간접세인 부가가치세를 인상했다. 반면 법인세를 내리고 창업을 지원하는 등 기업에 많은 인센티브를 제공했다.
이런 과감한 경제개혁으로 영국 경제는 불황의 늪에서 벗어났다. 79년 17%이던 인플레이션율이 85년 9%, 87년 7.5%로 낮아졌다. 80년 마이너스 4%를 기록했던 국내총생산도 해마다 증가해 88년에는 5%의 성장을 보였다. 대처가 세 번이나 총리에 연임된 것도 이 같은 눈부신 경제성장 덕분이었다.
대처의 정책은 97년 집권한 토니 블레어의 노동당 정부에서도 상당 부분 유지되고 있다. 94년 7월 노동당 당수에 취임한 토니 블레어는 전임 스미스 당수가 추진해 온 ‘노동당의 현대화’ (New Labour)를 본격적으로 실천에 옮겼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95년 주요 산업의 국유화를 규정하고 있던 노동당 정관 4조를 폐기한 것이다. 이후 97년 총선에서 압승해 정권을 잡은 블레어는 대처의 경제정책을 상당 부분 유지하고 있다.
노동당은 노동조합이 모태가 된 정당이다. 노동조합이 정당 예산의 절반을 부담하며 전당대회에서 전체 투표권의 3분의 1을 노조가 행사한다. 이처럼 노동당은 노조의 힘이 막강하지만 블레어는 집권 후 대처가 단계적으로 도입했던 고용법을 손질하지 않았다. 또 보수당의 존 메이저 총리가 마치지 못한 철도 민영화를 이루어냈고, 나아가 항공 관제까지 민영화했다.
소득세를 내리고 부가가치세를 인상한 대처의 세제정책도 블레어 정부에서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세율은 약간 조정했지만 간접세인 부가가치세의 비중이 높은 점 등 정책 기조는 대처 정부와 동일하다. 한 일간지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최고의 보수당 총리는 토니 블레어”라고 언급할 만큼 대처의 정책과 블레어의 정책은 대동소이하다.
노동당이 대처의 경제정책을 계승한 결과로 노동자 정당이 아닌 국민 정당으로 탈바꿈해 정권 교체에 성공하자 보수당은 곤란한 입장에 빠졌다. 보수당이 노동당에 비해 내세울 수 있는 정책상의 선명성이 거의 없어진 것이다.
지난해 6월 총선 당시 선거의 핵심 쟁점은 의료보험과 교육 등 공공 서비스 부문에 대한 개선이었다. 그런데 당시 윌리엄 헤이그가 이끌던 보수당은 엉뚱하게도 영국의 유로화 가입을 반대한다는 주장을 들고 나왔다. 결과는 현안을 외면한 보수당의 참패로 끝났고 헤이그 당수는 패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공공 서비스 향상이 선거의 중요 쟁점임을 알면서도 굳이 유로화 문제를 이끌어낸 것은 보수당의 고육지책이었다. 보수당은 공공 서비스 부문에서 노동당과의 입장 차이가 별반 없어 유로화 가입에 긍정적인 토니 블레어를 흔들려는 무리수를 던졌던 것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노동당이 얼마나 보수당과 비슷한 정책을 취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보수당의 문제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대처가 총리와 당수직에서 물러난 지 11년이 지났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보수당 내에서 영향력을 발휘한다. 보수당에 대처 신봉자들이 다수 포진해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9월 당수로 취임한 이언 던컨 스미스도 ‘대처심’(대처의 마음)이 크게 작용해 당수가 되었다는 후문이다.
대처는 최근 출간한 저서 ‘치국책’ (Statecraft)에서 영국이 유럽연합에서 탈퇴하고 북미자유무역지대 (NAFTA)에 가입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까지는 파운드화를 포기하지 못한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 대처는 유로화에 대해 상당한 반감을 갖고 있다. 이 책에서 대처의 주장은 한발 더 나아간다. 대처는 유럽연합의 실패를 예견하면서 파시즘이나 마르크스주의 등 세계가 직면했던 대부분의 문제가 유럽 대륙에서 비롯되었다는 극단적인 진단까지 내린다.
대처의 저서는 보수당의 당 쇄신 이미지에 악재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2001년 총선 패배 후 보수당은 유로화 문제는 의제로 삼지 않으려 애써왔는데, 대처가 민감한 부분을 건드린 것이다. 하지만 보수당 당직자 가운데 누구도 대처를 공개적으로 비판하지 못했다.
신념의 정치인인 대처는 전후 사회의 공감대를 어느 정도 바꾸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민영화 기업의 일부가 인수 합병을 통해 오히려 독점기업이 된 사실, 빈익빈 부익부를 조장하는 세제개혁, 원칙만 따진 무분별한 민영화가 가져온 폐해는 대처 개혁의 한계로 남아 있다. 개혁의 성과와 함께 부작용의 그늘도 만만치 않은 셈이다.
대처 전 총리가 실시한 개혁정책은 아직도 영국 사회 곳곳에 남아 있으며 상당수가 별다른 변화 없이 시행되고 있다. 대처가 총리직에서 물러난 지 11년이 지났지만 영국은 여전히 대처의 그늘에서 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대처 전 총리가 가벼운 경련을 일으켜 더 이상 공개 활동을 못하게 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자 영국 언론은 대처의 개혁정책을 다각도로 분석하고 그녀가 실시한 개혁의 공과를 분석하는 데 상당한 지면을 할애했다.
가벼운 경련으로 공개 활동 못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윈스턴 처칠 경이 아닌 노동당의 클레멘트 애틀리가 총선에서 승리해 총리에 취임했다. 애틀리 총리는 석탄과 철도, 전기 등 주요 기간산업을 국유화했고 무료 의료보험과 대학교육 도입 등 복지국가의 기틀이 되는 정책을 도입했다. 애틀리의 정책은 국민의 대폭적인 공감을 얻었기 때문에 이후 보수당이 집권해도 거의 그대로 유지됐다. 어떤 후임자도 정치적 위험을 무릅쓰고 이를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1979년 5월 총리에 취임한 마거릿 대처는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기업의 생사는 정부가 아니라 시장이 결정해야 한다는 논리로 항공과 철강, 가스 등 국영기업을 매각, 민영화하고 합법적인 쟁의행위를 최소화했다. 또 각종 복지 비용을 축소하고 세율을 내리는 한편, 간접세인 부가가치세를 인상했다. 반면 법인세를 내리고 창업을 지원하는 등 기업에 많은 인센티브를 제공했다.
이런 과감한 경제개혁으로 영국 경제는 불황의 늪에서 벗어났다. 79년 17%이던 인플레이션율이 85년 9%, 87년 7.5%로 낮아졌다. 80년 마이너스 4%를 기록했던 국내총생산도 해마다 증가해 88년에는 5%의 성장을 보였다. 대처가 세 번이나 총리에 연임된 것도 이 같은 눈부신 경제성장 덕분이었다.
대처의 정책은 97년 집권한 토니 블레어의 노동당 정부에서도 상당 부분 유지되고 있다. 94년 7월 노동당 당수에 취임한 토니 블레어는 전임 스미스 당수가 추진해 온 ‘노동당의 현대화’ (New Labour)를 본격적으로 실천에 옮겼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95년 주요 산업의 국유화를 규정하고 있던 노동당 정관 4조를 폐기한 것이다. 이후 97년 총선에서 압승해 정권을 잡은 블레어는 대처의 경제정책을 상당 부분 유지하고 있다.
노동당은 노동조합이 모태가 된 정당이다. 노동조합이 정당 예산의 절반을 부담하며 전당대회에서 전체 투표권의 3분의 1을 노조가 행사한다. 이처럼 노동당은 노조의 힘이 막강하지만 블레어는 집권 후 대처가 단계적으로 도입했던 고용법을 손질하지 않았다. 또 보수당의 존 메이저 총리가 마치지 못한 철도 민영화를 이루어냈고, 나아가 항공 관제까지 민영화했다.
소득세를 내리고 부가가치세를 인상한 대처의 세제정책도 블레어 정부에서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세율은 약간 조정했지만 간접세인 부가가치세의 비중이 높은 점 등 정책 기조는 대처 정부와 동일하다. 한 일간지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최고의 보수당 총리는 토니 블레어”라고 언급할 만큼 대처의 정책과 블레어의 정책은 대동소이하다.
노동당이 대처의 경제정책을 계승한 결과로 노동자 정당이 아닌 국민 정당으로 탈바꿈해 정권 교체에 성공하자 보수당은 곤란한 입장에 빠졌다. 보수당이 노동당에 비해 내세울 수 있는 정책상의 선명성이 거의 없어진 것이다.
지난해 6월 총선 당시 선거의 핵심 쟁점은 의료보험과 교육 등 공공 서비스 부문에 대한 개선이었다. 그런데 당시 윌리엄 헤이그가 이끌던 보수당은 엉뚱하게도 영국의 유로화 가입을 반대한다는 주장을 들고 나왔다. 결과는 현안을 외면한 보수당의 참패로 끝났고 헤이그 당수는 패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공공 서비스 향상이 선거의 중요 쟁점임을 알면서도 굳이 유로화 문제를 이끌어낸 것은 보수당의 고육지책이었다. 보수당은 공공 서비스 부문에서 노동당과의 입장 차이가 별반 없어 유로화 가입에 긍정적인 토니 블레어를 흔들려는 무리수를 던졌던 것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노동당이 얼마나 보수당과 비슷한 정책을 취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보수당의 문제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대처가 총리와 당수직에서 물러난 지 11년이 지났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보수당 내에서 영향력을 발휘한다. 보수당에 대처 신봉자들이 다수 포진해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9월 당수로 취임한 이언 던컨 스미스도 ‘대처심’(대처의 마음)이 크게 작용해 당수가 되었다는 후문이다.
대처는 최근 출간한 저서 ‘치국책’ (Statecraft)에서 영국이 유럽연합에서 탈퇴하고 북미자유무역지대 (NAFTA)에 가입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까지는 파운드화를 포기하지 못한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 대처는 유로화에 대해 상당한 반감을 갖고 있다. 이 책에서 대처의 주장은 한발 더 나아간다. 대처는 유럽연합의 실패를 예견하면서 파시즘이나 마르크스주의 등 세계가 직면했던 대부분의 문제가 유럽 대륙에서 비롯되었다는 극단적인 진단까지 내린다.
대처의 저서는 보수당의 당 쇄신 이미지에 악재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2001년 총선 패배 후 보수당은 유로화 문제는 의제로 삼지 않으려 애써왔는데, 대처가 민감한 부분을 건드린 것이다. 하지만 보수당 당직자 가운데 누구도 대처를 공개적으로 비판하지 못했다.
신념의 정치인인 대처는 전후 사회의 공감대를 어느 정도 바꾸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민영화 기업의 일부가 인수 합병을 통해 오히려 독점기업이 된 사실, 빈익빈 부익부를 조장하는 세제개혁, 원칙만 따진 무분별한 민영화가 가져온 폐해는 대처 개혁의 한계로 남아 있다. 개혁의 성과와 함께 부작용의 그늘도 만만치 않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