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론 생명공학에 관한 윤리성 논란은 독일만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독일은 다른 나라보다 비교적 엄격하게 ‘생명’을 법으로 보호한다(‘표’ 참조)는 점에서, 그리고 교회가 아직 사회적 영향력을 지니고 사회 각 집단마다 토론의 문화가 정착해 있다는 점에서 논란의 정도는 어느 국가보다 크다. 독일의 현행 배아보호법은 인간 생명을 수정한 순간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규정해 배아를 복제생산하는 배아복제는 물론 배아에서 줄기세포를 분리한 뒤 폐기하는 배아줄기세포 연구, 수정란을 자궁에 이식하기 전 유전자를 검사해 이상을 발견하면 폐기하는 이식 전 유전자검사 모두를 금지하고 있다. 때문에 신경조직과 척추를 형성하지 않은 14일 이내의 배반포기배아에서 줄기세포를 떼내어 치료 목적으로 배양ㆍ복제하도록 허용한 영국의 법 개정은 두 가지 측면에서 독일의 격렬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그 하나는 이 단계의 배아도 명백히 존엄성을 보호받아야 할 생명체라는 윤리적 반발이다. 다른 하나는 유럽 생명공학의 주도권을 영국에 내줄 수 있다는 우려다.
독일정부 관계자들은 줄기세포연구를 통한 난치병 치료의 가능성을 인정하지만, 먼저 배아복제가 아닌 성인 줄기세포 등 다른 대안을 충분히 검토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특히 지난해 말 안드레아 피셔 당시 보건장관(녹색당)은 “인간 생명체를 연구재료로 오용해서는 안 된다”고 못박았다. 야당인 기민당(CDU)의 후베르트 휘페 의원은 어떤 사람을 돕기 위해 배아를 죽이는 인간배아복제는 ‘일종의 식인주의’라며 극단적으로 비판했고, 기사당(CSU)도 인간배아복제가 “(나중에) 죽이기 위해 인간생명체를 배양하는 것”인 만큼 독일에서 배아복제를 금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게하르트 슈뢰더 총리(사민당)의 생각은 달랐다. 성인 줄기세포에 대한 연구가 우선적으로 이뤄져야 하지만, 동시에 유전공학과 의학의 급속한 발전에 비춰볼 때 배아보호법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한 것.
독일이 21세기 첨단 핵심기술인 생명공학분야에서 기회를 잃지 않고, 주도권을 가지려면 “이데올로기적 눈가리개와 근본적인 금지원칙”을 버리고 “인간 유전체 연구 등 유전공학 발전과 그 사회ㆍ윤리적 영향에 대한 범사회적 논의를 활성화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슈뢰더 총리의 배아보호법 재검토 시사는 생명공학에 대한 독일의 규제가 지나치게 엄격하고 근본주의적이어서 장기적으로 학문ㆍ산업적 경쟁력 상실이 우려된다는 일부 과학계 및 업계의 입장에 힘을 실어준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곧 당 내외의 거센 반발에 부딪쳐 더 이상 진전을 보지 못한 채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최소한 배아보호법 개정과 인간배아복제 문제는 더 이상 거론할 여지가 없는 듯 보였다.
하지만 지난 5월3일 새 불씨가 생겼다. 독일 최대 학술진흥재단인 독일연구협회가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권고안을 발표한 것. 협회는 환자나 과학자의 관점에서 볼 때 줄기세포 연구의 발전추세는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상황이라 지적하고, 우선 배아줄기세포를 수입해 활용한 후에 배아보호법 개정을 추진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과학계의 이런 공개적인 문제 제기와 연구목적의 배아줄기세포 수입이라는 현실적 사안을 두고 정치권은 대책 마련에 부심했다. 인간배아복제는 허용하지 않더라도 배아줄기세포를 수입해 연구하는 것까지 막아야 하는가 하는 것이 그 핵심.
독일연구협회가 연구계획 승인을 보류하라는 여론에 밀려 2개월(나중엔 다시 올해 말까지) 결정을 연기한 가운데 야당인 자민당(FDP)은 배아복제 및 배아줄기세포 연구, 이식 전 유전자검사를 모두 허용하는 당론을 확정했다. 반면 녹색당은 지난 5월17일 인간배아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당의 입장을 정리한 ‘책임의 정치’를 발표하고 관련 연구를 금지한다는 방침을 분명히 했다.
무엇보다 이 공방에 요한네스 라우 연방 대통령이 뛰어든 것은 돌출상황이었다. 라우 대통령은 같은 달 18일 대통령 연례 특별연설인 이른바 ‘베를린 연설’을 통해 이례적으로 인간배아실험에 깊은 우려를 표명하고, 배아연구는 생명과 인간 존엄성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금지해야 한다는 반대 입장을 천명했다. “경제든 연구든 그 어떤 것도 생명의 존엄성보다 앞설 수는 없다”는 것.

정치평론가들은 현재의 생명윤리 논란을 “독일 정치사상 가장 치열하고 결론내기 어려운 논쟁”이라 평한다. 그러나 이 논쟁을 언제까지나 끌 수만은 없다는 의견이 최근 힘을 얻고 있다. 물론 이 역시 쉬운 문제는 아니다. 유전 질병을 막기 위한 소극적 수단인 이식 전 유전자검사가 언젠가는 원하는 유전자만을 가진 배아를 ‘솎아내는’ 도구로 전락할 것이란 우려 때문. 배아가 선택권자의 기호에 따라 생산되고 버려지는 ‘소비품’이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실제 기민당의 이식 전 유전자검사 허용 입장이 전해지자 자매당인 기사당은 즉각 반발했다.
특히 최근 ‘독일은 아닐 것’이란 통념을 깨고 몇몇 연구팀이 이미 비공식적으로 배아줄기세포를 수입 또는 주문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정치권에 대한 압력이 가중되고 있다. 과학정책을 총괄하는 에델가르트 불만 교육연구부 장관(사민당)이 ‘신속하고 긍정적인 검토’를 촉구하고 나선 가운데 사민당은 긴급 연정회의를 소집, 녹색당의 절대불가 입장을 완화시키는 한편 기민당`-`기사당의 ‘배아줄기세포 수입 모라토리엄’ 제안을 거부했다.
이에 따라 독일의 생명윤리논쟁이 급류를 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언제 어떻게 마무리할지 예측하기는 힘들다. 분명한 것은 태어날 잠재적 생명과 환자들의 현존하는 생명, 과학발전과 경제성장 사이의 ‘건강한 긴장관계’가 이 논쟁 속에 충분히 스며들 것이란 점이다. 생명윤리자문위원회의 생명윤리법 시안을 두고 논란이 한창인 한국이 과연 독일의 사례에서 어떤 ‘엑스트랙트’를 뽑아 ‘생명의 정치’를 구현할지 자못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