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담 시티’로 변한 샌프란시스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왼쪽)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11월 15일 미국 백악관 현관 앞에서 악수하고 있다. [백악관 제공]
악명 높은 마약성 진통제 펜타닐은 샌프란시스코를 ‘좀비 도시’로 만든 기폭제다. 샌프란시스코 수석 검시관에 따르면 1~9월 우발적 약물 과다 복용에 의한 샌프란시스코 내 사망자 수는 620명이고, 이 중 506명이 펜타닐로 목숨을 잃었다.
미국 전역에서 펜타닐로 인한 사망자 수가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에서 10만9680명이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다. 2015년(5만2404명) 이후 6년 만에 2배 이상으로 늘어난 수치다. 2020년 기준 미국 교통사고(4만2000명)와 총기사고(4만4000명) 사망자 수를 합친 것보다 많다. 이 중 7만5217명이 펜타닐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다. 현재 미국에서 18~45세의 사망 원인 1위가 펜타닐 과다 복용이다. 펜타닐이 국가 존망을 좌우할 수 있는 문제가 된 셈이다.
11월 15일 열린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정상회담 주요 의제 역시 펜타닐이었다. 펜타닐은 대표적인 ‘오피오이드’ 제품이다. 오피오이드는 ‘오피엄’(opium·아편)과 ‘오이드’(oid: ‘~와 비슷한’이라는 뜻)의 합성어로 아편과 비슷한 효과를 내는 합성 진통제를 말한다. 펜타닐은 헤로인보다 50배, 모르핀보다 100배 중독성이 강해 말기 암 환자나 내성이 생긴 만성 통증 환자에게만 극소량 투약된다. 미국에서는 최근 10년 새 펜타닐 유통량이 꾸준히 늘었고, 코로나19 팬데믹을 기점으로 폭증세를 보였다.
펜타닐은 필로폰이나 헤로인 등 기존 마약과 달리 주사제와 정제뿐 아니라, 패치제로도 사용 가능하다. 처방만 있으면 약국에서 합법적으로 구할 수 있다. 의료보험이 없어 막대한 치료비를 감당하기 어려운 미국 저소득층은 병원에 가는 대신 진통제로 버티곤 해 펜타닐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진통제를 구할 경우 합법 약물로 위장한 펜타닐을 손쉽게 살 수도 있다.
문제는 펜타닐을 소량만 복용해도 사망에 이를 수 있다는 점이다. 펜타닐의 치사량은 2㎎에 불과하다. 뾰족한 연필심 끝에 살짝 묻힌 정도의 양만으로도 사람이 죽을 수 있다. 미국 마약단속국(DEA)은 펜타닐을 ‘미국이 직면한 가장 치명적인 마약’으로 규정하고 불법 유통을 대대적으로 단속하고 있다.
펜타닐, 멕시코·중국서 유입
미국 마약단속국(DEA) 본부 벽에 전시된 펜타닐 희생자들 사진. [DEA 제공]
멕시코에서 대량 생산된 펜타닐은 비밀리에 국경을 넘어 미국 시장에 유통된다. 중국 화학업체들이 전구체나 펜타닐을 국제택배 등을 이용해 미국에 직접 보내기도 한다. 미국 정부는 그동안 멕시코 정부와 중국 정부에 펜타닐의 불법 생산과 유통 등을 단속해줄 것을 강력히 요청해왔다. 특히 미국 정부는 중국 정부에 화학업체 단속 등 협력을 요청했지만 중국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번 정상회담에서 시 주석에게 펜타닐 원료를 제조하는 중국 화학업체들을 직접 단속해줄 것을 요청했고, 시 주석도 동의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 문제에 대한 시 주석의 약속에 감사한다”며 “많은 생명을 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전략소통조정관은 “시 주석은 바이든 대통령에게 펜타닐 때문에 미국인이 사망하는 것을 더는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고, 이 문제에서 진전을 이루겠다는 개인적인 약속을 했다”고 밝혔다. 그는 “중국은 수년간 이러한 화학물질의 생산과 수출을 단속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단속에 나설 것”이라고도 말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시 주석의 펜타닐 원료 단속 약속을 이번 양국 정상회담의 최대 성과라며 상당한 만족감을 보였다.
바이든 재선 걸림돌 된 펜타닐
지난해 8월 18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거리에서 한 노숙인이 펜타닐에 취해 잠들어 있다. [뉴시스]
DEA LA지부가 지난해 7월 펜타닐 알약 100만 개를 압수했다. [DEA 제공]
중국이 미국을 곤경에 빠뜨린 펜타닐 문제에서 양보를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 노림수는 미국의 인권 탄압 문제 제기를 무마하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미국 정부는 중국 정부의 펜타닐 원료 단속 약속에 대한 대가로 중국 공안부 과학수사연구소를 수출 통제 명단에서 제외했다. 중국 과학수사연구소는 소수민족인 위구르족 인권 탄압과 관련됐다는 이유로 2020년 5월 미국 수출 통제 명단에 올랐다. 매슈 밀러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중국 과학수사연구에 대한 수출 통제가 많은 미국인의 생명을 구하는 데 장애가 된다고 판단했다”고 강조했다. 미국 정부는 중국의 인권 탄압 문제를 앞으로도 계속 제기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결과적으로 미국 정부가 펜타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 인권 문제를 묵인하는 카드를 쓴 것이다.
중국 입장에서는 미국이 추가 경제제재 조치를 내리는 것을 막는 성과를 냈다고 볼 수 있다. 중국으로선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미국 정부가 자국 기업들에 어떤 식으로든 중국 투자를 막거나 방해하는 등 제재 조치에 나설 경우 상당한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시 주석이 바이든 대통령에게 미국의 대중(對中) 금융투자 재개와 반도체 등 첨단기술 통제의 일시적 중단 등을 요청한 것도 중국 경제의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물론 바이든 대통령이 시 주석 요청에 동의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 주석이 당분간 추가적인 제재 조치가 없을 것이라는 암묵적 언질을 바이든 대통령으로부터 받아냈다면 경제난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경기침체 탈출이 급선무인 중국으로선 미국의 추가 제재 우려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경제 회복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은 셈이다.
“불법 마약 관련 협조 제대로 안 해”
중국 전신인 청나라는 19세기 영국과의 아편전쟁에 패배하면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이후 중국은 영국뿐 아니라 서구 열강에 각종 이권을 빼앗기는 등 수모를 당해야 했다. 시 주석 역시 “아편전쟁 이후 서구 열강에 의해 침탈당했던 치욕의 역사를 절대 잊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해왔다.미국은 이번 중국과 정상회담 합의가 이행된다면 펜타닐 문제 해결의 전환점이 될 수 있으리라 보고 있다. 하지만 중국이 약속을 이행할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릴리 맥엘위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 중국 연구 석좌교수는 “중국은 역사적으로 약속을 잘 지키지 않았다”며 “특히 불법 마약 거래 단속과 관련해 협조를 제대로 하지 않는 것으로 악명 높다”고 지적했다. 중국은 21세기판 아편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카드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