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디펜스가 속한 글로벌 방위산업 협력체 ‘팀 선더’(Team Thunder)가 공개한 K9A2 자주포의 영국 하역 모습. [팀 선더 트위터 캡처]
독일 중고품이 유럽 ‘표준 전차’
남이 써본 무기를 선호하는 경향은 집단안보의 중요성이 강조될 때 더욱 두드러진다. 과거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가 무기체계 규격을 표준화하고 전투기와 전차, 군함을 공동으로 개발·제작한 것도 그 때문이다. 여러 나라가 사용하는 무기체계는 그만큼 성능과 신뢰성, 후속군수지원이 우수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무기를 쓰면 유사시 적과 싸워 승리할 가능성이 높고, 여차하면 동맹이나 우방국으로부터 동종 무기를 공급받을 수도 있다. 과거에는 주로 미국제 무기가 이런 흐름을 주도했다.냉전체제가 무너진 후 군비 투자에 소홀했던 상당수 유럽 국가는 노후화된 무기체계를 여전히 주력 장비로 운용하고 있다. 흔히 선진국이라는 서유럽 국가들마저 주력 장갑차가 베트남전쟁 때 활약한 미국 M113이고, 주력 자주포는 냉전 시절 미군 포병의 상징인 M109 초기 모델이다. 주력 전차는 미국 M47, M48 계열을 운용하다 독일이 중고품으로 방출한 레오파르트 1·2 시리즈가 표준 모델로 자리 잡았다. 현재 유럽 주요국의 기갑 장비들은 그나마 쌩쌩한 것이 1980년대 후반 생산됐을 정도로 노후화됐다. 그간 별다른 안보 위협이 없던 유럽 각국은 탈냉전 후 정규군 규모를 크게 축소했다. 무기체계 개발이나 도입에도 큰 관심을 갖지 않았기에 노후 장비들은 지금도 여러 나라에서 당당한 1선 장비 지위를 누리고 있다. 그런데 최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유럽 각국은 재군비를 선언하고 긴급 예산을 편성해 신형 무기 도입 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냉전 종식 후 무너진 유럽 방위산업은 갑자기 찾아온 각국의 무기 소요를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냉전체제가 끝난 후 유럽은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에 반발해 다극화를 주창했다. 개별 국가로선 미국과 경쟁이 불가능했기에 유럽연합(EU) 차원의 독자 안보체제를 구축하고 나섰다. 특히 독일과 프랑스가 유럽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데 강하게 반발했다. 두 나라는 미국 장성이 당연직으로 총사령관을 맡는 나토와 별개로 유럽군 창설, 유럽 공동 무기체계 개발을 주장했다. 하지만 탈냉전 후 유럽 국가들은 공동 무기체계 개발에서 성능, 신뢰성, 후속군수지원 같은 본질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 대신 어느 나라가 더 많은 지분과 일감을 확보할 것인지 이전투구를 벌였다.
밥그릇 싸움 된 유럽 무기 공동개발
유럽의 무기 공동개발 프로젝트는 시작부터 각국 정부와 기업의 치열한 밥그릇 싸움으로 번지기 일쑤였다. 그러다 프로젝트가 무산되고 새로운 프로젝트가 추진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우여곡절 끝에 개발·제작된 무기에 각국 정치인과 기업, 노동조합의 이권이 얽히게 됐다. 헬기 1대를 만들 때도 유사 부품을 여러 나라의 각기 다른 업체가 나눠서 제작하다 보니 업체별 마진, 운송 등 불필요한 비용이 발생했다. 나라마다 도량법이 달라 최종 조립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도 있었다. 결국 무기체계의 가격과 유지비는 미국, 러시아 등 경쟁국 모델보다 훨씬 비싸졌다. 납기가 자주 지연되고 후속군수지원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유럽산 무기 가동률은 동급 미국 무기보다 훨씬 떨어졌다.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동유럽 국가가 다급히 찾는 무기체계는 전투기와 전차, 포병 무기다. 서유럽 방산 기업들도 이런 무기체계 라인업을 갖추고 있지만 동유럽 국가의 관심은 끌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서유럽 방산업체의 무기 가격은 지나치게 비싼 데다, 계약 후 납품까지 4~5년 이상 기다려야 한다. 무기체계를 개발·제작한 국가에서조차 낮은 가동률과 높은 유지비로 비판받는 무기를 구매하기엔 부담이 너무 크다. 이미 동유럽 각국에선 서유럽 선진국으로부터 도입한 무기체계에 대한 불만이 쏟아지고 있다. 특히 기계공업 분야에서 ‘장인(匠人)의 나라’로 정평이 났던 독일제 무기는 최근 시장에서 가장 불신받는 문제아로 전락했다.
독일은 자국산 PzH-2000 자주포 18문을 우크라이나에 기증했는데, 이 중 절반 이상이 사실상 가동 불능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마르쿠스 파버(Marcus Faber) 독일 연방 의원은 우크라이나가 받은 PzH-2000 자주포 상당수가 포신과 약실, 장전장치, 사격통제장비 문제로 운용 불가 판정을 받았다고 폭로했다. 특히 독일군이 운용하다 우크라이나에 넘긴 자주포는 평시 유지관리 부실로 포신과 약실 내구도에 심각한 문제가 있고, 장거리 사격을 위해 고위력 장약을 사용하면 포신이 폭발할 수 있다고 한다. 동유럽 국가들이 유상 구입한 독일 무기의 납기 지연도 심각하다. 가령 리투아니아는 2017년 독일과 복서(Boxer) 장갑차 도입 계약을 체결했지만 지금까지 납품 받은 것은 40여 대에 불과하다. 그마저도 불량이 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독일군조차 자국 방산업계의 늑장 납품을 피해갈 순 없다. 독일군은 레오파르트2A7 전차 개조 작업을 발주했는데, 초도 물량 인수까지 44개월이 걸릴 예정이다. 최근 폴란드가 유럽에서 영향력이 막강한 독일과 프랑스를 제치고 한국산 장비를 대량으로 구매한 데도 이런 배경이 작용한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서 차륜형 자주포 한계 노출
영국과 스웨덴이 공동개발한 아처 자주포. [사진 제공 · BAE 시스템스]
프랑스의 세자르 자주포. [GETTYIMAGES]
BAE 시스템스의 아처는 차륜형 자주포이긴 하지만, 포탑 모듈을 완전 자동화해 방열 및 연사속도가 경쟁 모델 가운데 가장 빠르다. 다탄동시사격(MRSI) 모드에선 포탄 6발을 각기 다른 각도로 연사해 같은 지점에 동시 탄착시킬 수 있는 괴물 같은 화력도 갖췄다. 다만 단점도 뚜렷하다. 아처는 포탑이 작아 장전장치에 탑재 가능한 포탄이 21발에 불과하다. 한국의 K9&K10 조합처럼 별도의 자동화 탄약 재장전 체계도 없다. 21발을 다 쏘면 사람이 인력으로 포탄을 1발씩 재장전해야 하는 것이다. 자주포의 지속적인 화력투사 능력이 매우 떨어진다는 뜻이다.
독일의 RCH155 자주포. [사진 제공 · KMW]
K9A2, 우수한 성능에 ‘규모 경제’ 강점도
이처럼 주요 주자들이 지리멸렬한 상황에서 영국에 최강 자주포가 상륙했다. 바로 K9의 최신 개량형인 K9A2다. 이번 MFP 획득 사업에 참가한 사실상 유일한 궤도식 자주포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수출 실적을 거둔 데다, 실전 검증까지 마친 모델이다. K9A2는 분당 최대발사속도 9~10발, 지속발사속도 4~6발 등 가공할 연사력을 갖췄다. 사거리도 54㎞에 달한다. 지속사격 능력도 동급 최강이다. 내부 포탄 적재량이 48발로 경쟁 모델 가운데 가장 많고, K-10 탄약운반장갑차와 연계해 분당 12발의 포탄을 완전 자동으로 공급받을 수 있다. 한화디펜스는 9월 22~23일(현지 시간) 열리는 현지 방위산업 포럼에 별도 부스를 마련해 K9A2를 선보일 예정이다.K9A2의 또 다른 강점은 ‘규모 경제’다. 이미 한국군이 대규모 도입을 준비하고 있고, 폴란드도 대량 구매를 결정했기에 가격과 유지비 면에서 높은 경쟁력을 갖췄다. 영국 측도 이런 강점을 알기에 K9A2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K9A2가 MFP 획득 사업 수주에 성공하면 한국산 자주포는 나토의 동쪽 끝 폴란드와 서쪽 끝 영국 시장을 모두 평정하는 셈이다. 다른 유럽 국가들에 추가 수출도 노려볼 수 있다. 이미 세계 1위 시장점유율인 K9이 폴란드에 이어 영국까지 교두보 삼아 M109 뒤를 잇는 ‘표준 자주포’로 도약하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