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분쟁은 C급 태풍, 지금은 ‘허리케인 동반한 쓰나미’ 파괴력
공짜 안보와 자유무역체제의 종말…거래 안전 ‘수호자’ 미국은 잊어라
금융 불안과 부동산 버블 부작용은 물론, 승자독식 분업체제 대비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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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기적’이라는 드라마를 연출했던 대한민국이 경제와 안보 두 측면에서 중대 고비를 맞고 있다. 복합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무역질서의 근간이 돼온 자유무역질서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는 데서 근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더욱이 미·중 통상 마찰의 이면에는 중거리핵전력조약(INF) 파기 등 군사적 갈등까지 잠복해 있다. 미국과 중국이 패권을 놓고 전쟁을 벌이면서 그 사이에 낀 대한민국은 강대국들로부터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자유무역 수혜자에서 强國들의 인질이 될 위험
먼저 미·중 양국의 분쟁 경로는 그때와 유사할 가능성이 크다. 미국 주도로 자유무역권역에 들어온 중국에게 환율 압박을 가하는 방식은 플라자합의 당시와 비교할 때 상대만 바꾼 듯하다. 하지만 경제환경과 분쟁구도가 달라졌다. 1980년대에는 중국 등 공산권을 상대하던 미국이 무역동맹이던 일본(당시 G2)과 독일(당시 G3)을 자유무역의 틀 안에 가둬놓고 벌인 경제전쟁이었다. 반면 요즘은 미국이 자유무역의 틀을 부수면서 중국을 제압하려는 정치·경제 복합 전쟁의 단면을 드러내고 있다(표 참조).
자유무역의 틀 밖에서 벌어지는 ‘전(錢)의 전쟁’이기에 만일 미국 의도대로 위안화 평가절상이 되지 않을 경우 무역분쟁의 끝이 우발적 무력 충돌로 치달을 개연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국 같은 중소국이 위험한 이유도 보호벽이 없는 황야에서 미·중 사이에 끼어 전의 전쟁이나 무력 대결의 인질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일본처럼 수출규제를 무기로 삼아 동맹국의 급소를 찌르는 장면을 앞으로 흔히 볼 수 있으리라는 것이 경제·안보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1985년 미국 뉴욕 플라자호텔에서 열린 플라자합의(G5 재무장관회의) 당시 모습. [위키피디아]
일본은 그 대신 당시 경쟁 우위를 점하던 자동차와 반도체산업을 살리고자 백방으로 뛰었다. 미국이 일본 자동차 수입을 연간 160만 대로 제한하자 일본 정부는 혼다자동차 등이 미국 안에서 생산기지를 건설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1994년 3월 일본 자동차시장 제한이 풀릴 때까지 도요타자동차는 이른바 도요타 방식을 생산 과정에 도입, 생산비 절감과 성능 향상을 이뤄 글로벌 자동차 메이커로 우뚝 섰다. 하지만 미국은 일본산 반도체만큼은 양보하지 않았다. 1986년 미·일 반도체협정을 통해 일본시장에서 외국산 반도체가 20% 이상을 차지하도록 시장 개방 압력을 끊임없이 행사했다. 미·일 무역분쟁 결과로 일제 반도체가 주춤하는 사이 삼성전자가 약진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번 미·중 무역분쟁은 비교우위를 통한 교역 확대와 상호 이익을 추구하던 1980년대와는 달리 누가 오래 버티고 살아남을 것인지를 시험하는 ‘생존게임’이 될 공산이 크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자유무역 시각에서 보면 ‘루즈(lose)-루즈(lose) 게임’이다. 올해 한국의 수출과 수입 모두 마이너스로 돌아선 것도 이미 이 같은 환경에 노출됐기 때문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윈윈 게임에서 전리품 없는 승자독식 게임으로
2017년 11월 9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을 걷고 있다. [AP=뉴시스]
이번 미·중 환율전쟁과 한일 갈등의 결과는 어떨까. 지금까지 한국은 수출로 경제를 일으키는 과정에서 자유무역질서의 덕을 톡톡히 봤다.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인 GATT와 서비스, 지식재산권 분야로 확대된 세계무역기구(WTO) 체제 아래서 우리는 비교적 안전한 거래를 통해 경제력을 키워왔다. 자유무역협정(FTA)은 우리 경제에 날개를 달아줬다. 한미 FTA와 한EU FTA 체결 이후 한국은 무역 규모를 크게 늘리며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이제는 근본적인 시험대에 올라섰다.
무엇보다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기존 세계 무역질서를 크게 흔들고 있다. 그는 자유무역체제를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을 더는 감당하지 않으려 한다. 지금까지 미국은 동맹국으로 향하는 유조선이 거쳐 가는 페르시아만의 안전 문제에 깊숙이 관여했지만 이제는 ‘수익자 부담원칙’을 앞세워 한국과 일본 등 전통 동맹국들에게 역할 분담을 요구하고 있다. 김두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미국이 더는 자유무역 수호자 역할을 하지 않겠다고 태도를 바꾸면서 약소국들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됐다”고 말했다.
승자독식의 생존게임 시대에는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기 마련. 국제 분업체계 파괴에 따른 생산기지 이전 비용, 부품·소재의 우회로 확보를 위한 비용 등은 모두 약자가 부담할 수밖에 없다. 판이 바뀐 세상에서 승자는 생산비용 상승에 따른 교역 조건 악화와 교역량 축소, 제품가격 상승에 따른 소비 위축과 생산 감소, 유동 자금 이동에 따른 금융시장 불안정과 부동산 버블 등 약자가 짊어질 부작용에 무관심해질 것이다. 오히려 자국의 이해와 안보 유지 등을 위해 동맹군을 사정없이 때리며 파괴와 굴복을 강요할 개연성이 농후해졌다.
이런 이유로 이번 미·중 무역전쟁과 한일 갈등은 1980년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파괴력을 선보일 수 있다. 통상 전문가로 주제네바 국제기구 대표부 대사를 지낸 최석영 법무법인 광장 고문은 “1980년대 분쟁을 국지적 피해만 남긴 태풍 프란시스코에 비유한다면 지금은 A급 허리케인을 동반한 규모 9 이상의 지진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지정학 전략가이자 안보 전문가인 피터 자이한은 책 ‘21세기 미국의 패권과 지정학’에서 ‘미국이 안전을 보장하는 역할을 더 이상 하지 않기로 결심하면 유럽, 동아시아, 남아시아에 경제위기와 에너지 위기가 촉발되고 금융위기와 안보위기가 닥치게 된다’고 전망했다.
패러다임의 변화, 교역 조건 무시하고 동맹 때리기
문재인 대통령이 8월 2일 청와대 여민관에서 열린 긴급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이날 문 대통령은 “일본의 백색국가 배제 결정은 대단히 무모한 행위”라며 깊은 유감을 표했다. [뉴시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미·중, 그리고 한일 무역분쟁은 세계 무역질서가 바뀌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며 “외교안보 이슈와 경제통상 이슈가 서로 연계돼 세계 무역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형성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지난 2000년의 통상 역사를 돌아보면 강대국이 안보 문제로 통상을 압박하는 것은 전형적인 패턴”이라면서 “탈냉전 이후 30년 동안 안보와 통상이 분리돼 적성국과 동맹국 구분 없이 교역한 것이 오히려 유례없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적성국 간 자유무역이라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자국 중심의 보호무역으로 회귀하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