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5일 주식투자 커뮤니티에서 한 개인투자자가 홍콩 소재 글로벌 투자은행(IB) 2곳이 불법 공매도를 벌인 사실을 전하며 한탄했다. 금융감독원(금감원)은 10월 12일 이 두 글로벌 IB가 주식을 소유하지 않은 상태로 공매도를 한 뒤 사후에 차입하는 ‘무차입 공매도’를 한 사실을 적발했다고 밝혔다. 글로벌 IB가 관행적으로 불법 공매도를 해오다 당국에 단속된 첫 사례다. 개인투자자 사이에서는 “불법 공매도 의혹이 확인됐다”며 울분을 토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금융당국이 적발하는 무차입 공매도 건수가 증가하는 가운데 개인투자자의 불만도 커지고 있다. [동아DB]
늘어나는 무차입 공매도
금감원에 따르면 홍콩 소재 A사는 2021년 9월부터 지난해 5월까지 카카오 등 101개 종목에 대해 400억 원 상당의 무차입 공매도 주문을 했다. A사는 사내에서 이뤄진 주식 대여를 부정확하게 밝히는 방식으로 무차입 공매도를 했다. 가령 사내 a부서가 가진 주식 100주 중 50주를 b부서에 대여해준 후 공매도 잔고를 150주로 늘려 입력하는 방식이다(이미지 참조). 홍콩 소재 B사 역시 2021년 8월부터 그해 12월까지 호텔신라 등 9개 종목에 대해 160억 원 상당의 무차입 공매도 주문을 냈다. B사는 해외 기관투자자들로부터 매도스와프 주문을 받은 후 사전에 차입이 확정된 주식 수량이 아닌, 향후 차입이 가능한 물량을 기준으로 공매도 주문을 했다.A사의 무차입 공매도 수법.[금융감독원]
B사의 무차입 공매도 수법.[금융감독원]
무차입 공매도 적발 건수는 계속 늘고 있다. 금감원에 따르면 무차입 공매도 적발자는 매해 증가했다. 2020년 4명에 불과했으나, 올해는 9월 기준 30명이 적발됐다. 이에 과태료와 과징금 규모도 7억3000만 원에서 104억9000만 원으로 급증했다. 매년 불법 공매도가 증가하면서 개인투자자 사이에서는 “외국인 투자자들이 알려진 것보다 더 많이 무차입 공매도를 벌이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커지고 있다.
이들 글로벌 IB가 불법 공매도를 한 시기는 국내 증시가 급락했던 때와 겹친다. A사가 공매도를 한 시기(2021년 9월~2022년 5월) 코스피는 3199.27에서 2577.12로 19.45% 급락했다. 코스닥 역시 1038.33에서 893.36으로 13.96% 하락했다. 특히 주요 공매도 무대 중 하나였던 카카오는 해당 시기 주가가 15만5000원에서 8만5000원으로 48.39% 폭락했다. 카카오는 한때 국민주로 불렸을 만큼 수많은 개인투자자가 보유하던 주식이다. 개인투자자들이 이번 불법 공매도 사태에 부글부글 끓는 이유다.
다만 글로벌 IB의 무차입 공매도만으로는 증시 하락을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불법 공매도 규모가 크지 않고, 장기간에 걸쳐 다수 종목에 분산해 공매도를 한 점에서 볼 때 증시 하락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으리라 본다”고 말했다. 금감원 역시 복합적 요인이 작용해 주가가 하락했다는 입장이다. 이복현 금감원장은 10월 17일 국회 정무위원회 금감원 국정감사에서 카카오 주가 하락과 불법 공매도의 연관성을 묻는 질의에 “기업공개(IPO) 이후 시장 상황이 많이 변했다”면서 “인과관계를 입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외국서 끌어와서라도 형사처벌”
무차입 공매도가 이뤄진 때는 미국이 기준금리를 0~0.25%에서 본격적으로 인상하기 시작하던 시기다. 또한 러시아가 2022년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증시 전체가 흔들리는 시기이기도 했다.금감원은 강경 대응 방침을 밝혔다. 이복현 금감원장은 10월 17일 국감에서 “공매도가 다수 국민이 문제 삼는 시기에 발생했다는 측면에서 쉽게 넘기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외국에 있는 사람들을 끌어와서라도 형사처벌할 수 있도록 수사당국과 긴밀히 협의하겠다”고 말했다. 금감원은 일부 IB가 장 개시 전 보유 수량보다 많은 양을 매도하는 등 장기간 자본시장법을 위반한 정황이 발견돼 조사하고 있다.
금감원은 지난해 6월 이후 51개 금융회사의 무차입 공매도 사건을 집중 조사해 93억7000만 원 과징금과 21억5000만 원 과태료를 부과했다. 금감원 측은 이번 사태와 관련해 “무차입 공매도를 한 IB들로 하여금 과거 사례보다 더 큰 금전적 책임을 지게 하겠다”는 입장이다. 지금까지는 2021년 오스트리아 금융회사 ESK자산운용이 251억 원 상당의 에코프로에이치엔 주식을 공매도 했다가 38억7400만 원 과징금을 낸 것이 최대 규모다.
금감원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글로벌 IB로부터 주문을 수탁받는 국내 증권사에 대해서도 검사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계열회사와 관계, 수수료 수입 등 이해관계 문제로 글로벌 IB의 불법 공매도를 묵인했을 개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공매도 거래대금은 올해 들어 ‘역대 최고’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10월 17일까지 공매도 거래 대금은 148조9547억 원으로 집계됐다. 연말까지 두 달 이상 남은 가운데 지난해 기록(143조6913억 원)을 5조 원 이상 넘기고 있다.
현재 공매도 대차잔고는 2차전지 관련 기업들에 집중돼 있다. 10월 16일 기준 공매도 대차잔고가 1조 원을 넘어선 기업은 에코프로(1조5033억 원), LG에너지솔루션(1조4422억 원), 에코프로비엠(1조925억 원) 등 3곳으로 모두 2차전지 관련 기업이다(표1·2 참조). ‘코스피·코스닥 공매도 대차잔고 상위 5개 기업’으로 범위를 확장해도 비슷한 경향이 관측된다. 코스피와 코스닥 시장에서 공매도 대차잔고가 가장 많은 10개 기업 가운데 삼성전자와 셀트리온, HLB 등 3곳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2차전지 관련 기업이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골드만삭스, 메릴린치, 모건스탠리, JP모건 등 주요 글로벌 IB가 이들 회사의 공매도 잔고 대량 보유사다. 상장주식 수의 0.5% 이상 공매도 잔고를 보유하면 공시 대상이 된다.
‘공매도 제도 개선’ 국민청원 등장
공매도 규모가 나날이 커져 개인투자자의 불만이 확산하는 상황에서 글로벌 IB의 불법 무차입 공매도 사례가 확인되자 제도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힘을 받고 있다. 이미 10월 4일 한 개인투자자가 국회 국민청원에 공매도 제도 개선을 주요 내용으로 한 국민청원을 제출했는데, 8일 만에 5만 명 이상이 동의했다. 청원에는 현행 무기한 차입 공매도 방식을 상환 기간을 두는 식으로 개선해달라고 건의하는 내용 등이 담겼다. 이외에도 개인투자자는 공매도 기록 역시 현행 수기(手記) 방식에서 전산화 방식으로 개편할 것을 요구했다.금융당국은 제도 개선이 쉽지 않다는 입장이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10월 11일 국회 정무위원회 금융위 국정감사에서 “실시간 전산시스템을 구축하려면 대차거래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정확히 파악해야 하는데, 거래 목적이 여러 가지고 전화나 e메일 등 이용하는 플랫폼도 달라 실시간으로 파악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이어서 “파악하더라도 기술적으로 강제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사후 처벌 강화가 현실적 해법”이라고 말했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사전에 불법 공매도를 걸러내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해외 국가들 역시 현실적 문제로 이 같은 시스템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강화된 처벌 기준에 따라 불법 공매도를 엄격하게 처벌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진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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