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엔/달러 환율이 144엔대까지 오르며 엔화 약세가 이어지고 있다. [뉴시스]
최근 달러에 대한 엔화 환율이 급등하고 있다. 7월 3일 기준 144엔까지 상승해 엔/달러 환율이 150엔을 넘어설 수 있다는 관측까지 나온다. 추가적인 환율 상승을 점치는 목소리가 높아진 가장 직접적 원인은 미국과 일본의 기준금리차가 5%p 이상 벌어진 데 있다(그래프 참조).
이 부분을 설명하기 위해 미국 뉴욕과 일본 도쿄에 지사를 둔 글로벌 은행 A의 사례를 살펴보자. A은행은 두 시장에서 자유롭게 돈을 빌리고 또 빌려주고 있는데, 어느 날 일본에서 돈을 빌리면 연 이자율이 0.05%이고 미국 머니마켓펀드(MMF) 운용 수익률이 5.25%라면?
A은행은 도쿄에서 엔으로 돈을 빌린 다음 달러로 환전해 뉴욕 MMF에 넣어두는 것만으로도 연 5.20% 이자소득을 올릴 수 있다. 더 나아가 A은행뿐 아니라 B은행과 C연기금마저 이 거래에 뛰어든다면 외환시장에서 지속적으로 엔 매도-달러 매수 거래가 이어질 테고, 이는 곧 달러에 대한 엔화 환율 상승으로 귀결된다. 따라서 최근 엔/달러 환율이 140엔을 넘어 150엔을 위협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세계적인 인플레이션 속에서 일본 중앙은행만 금리인상을 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 의문을 풀려면 시계를 1990년으로 돌려볼 필요가 있다. 당시 일본 경제는 세계 주식 시가총액의 50%를 넘어서는 거대한 자본시장을 지녔을 만큼 강력했다. 그러나 주식 및 자산 가격에 쌓인 거품을 꺼뜨리기 위한 일본 중앙은행의 공격적인 금리인상과 1990년 발생한 걸프전 충격이 맞물리면서 자산가격의 연쇄 폭락이 시작됐다. 1990년 주가가 폭락한 데 이어 1992년부터는 부동산마저 무너져 약 1500조 엔(약 1경3400조 원)에 이르는 자산 손실이 발생했다. 당시 일본 국내총생산(GDP)이 400조 엔이었으니 약 3~4년치에 해당하는 자산이 허공으로 날아가버린 셈이다.
자산가격 폭락 후 30년간 좀비 신세
이처럼 거대한 자산가격이 폭락할 때 경제에는 크게 3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첫 번째는 금융기관 파산이다. 돈을 빌려 투자하던 고객들이 큰 손실을 입고 이자도 제때 내지 못하면 은행들도 걷잡을 수 없는 손실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은행이 파산할 것이라는 루머가 돌기 시작하면 뱅크런 발생 위험이 높아지고, 은행들은 어떻게든 현금을 쥐고 있으면서 뱅크런 희생양이 되는 꼴을 피하려 들 것이다. 그런데 은행들이 현금을 쥐고 있다는 것은 곧 대출을 회수한다는 뜻이니 경제 전반에 돈 가뭄이 발생하는 것은 당연하다.돈 가뭄 못지않게 위험한 것이 소비 위축이다. 예를 들어 10억 원 되는 집을 자기 돈 3억 원, 은행 대출 7억 원으로 매입한 가계를 생각해보자. 집을 매입한 후 경기가 갑자기 나빠져 집값이 7억 원까지 빠지면 어떻게 될까. 그는 자기자본 3억 원을 모두 잃어버린 상태에서 은행의 의사결정 여하에 따라 바로 집 밖으로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 따라서 이 가계의 선택은 필사적인 저축 말고는 없다. 소비를 줄이고 줄여 대출 원리금과 이자를 상환함으로써 은행의 추심을 피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법이다. 하지만 빚을 갚기 위한 가계의 저축은 곧 경제 전반 불황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크다.
그 결과는 디플레이션(물가하락) 부각이다. 경제에 풀린 돈이 줄어들고, 소비가 부진해 기업 매출액이 감소할 때 ‘과잉설비’ 가능성이 커진다. 자동차 100만 대를 생산하는 것이 적정 수준인 공장이 한 해 80만 대만 판다면? 처음에는 재고를 늘리는 방향으로 대응하지만 재고가 걷잡을 수 없이 증가하면 공장 경영자는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를 공산이 크다. 하나는 근로자를 대량 해고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격을 인하하는 것이다. 그런데 근로자 대량 해고는 쉽지 않은 일이니 결국 제품 가격 인하를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 어떤 기업이 먼저 가격을 인하하면 경쟁사의 연쇄 반응을 촉발해 경제 전체 물가상승률이 마이너스 레벨까지 추락할 수 있다.
무제한에 가까운 통화 공급, ‘바이 재팬’ 분위기 이끌어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면 경제는 끝없는 악순환에 빠져든다. 정부가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돈을 풀어도 과잉설비를 짊어진 기업들은 고용을 늘리지 않고, 중앙은행이 금리를 제로 수준으로 내려도 대출받아 집을 사거나 투자하려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 물가가 지속적으로 떨어지는 상황이라면 좀 더 기다렸다가 집이나 차를 사는 편이 더 이익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일본은 1990년대 초반부터 어떤 정책을 펼쳐도 경제가 살아나지 않는 좀비 신세가 되고 말았다.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등장한 것이 바로 아베노믹스(2012~2020)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는 일본 경제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 제일 먼저 사람들의 심리를 바꿔야 한다고 판단했다. 즉 정부와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때까지’ 돈을 풀겠다고 선포하고 이를 끝까지 추진한다면 결국 소비와 투자가 살아나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아베노믹스가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다. 무제한에 가까운 통화 공급 확대 정책이 시행된 이후 엔/달러 환율이 80엔에서 100엔 수준까지 급상승했지만, 사람들의 소비와 투자는 살아나지 않았다. 환율 상승으로 해외로부터 수입되는 제품의 가격이 올랐음에도 사람들은 “물가가 오를 리 없다”며 디플레이션 시대의 생활 패턴을 유지한 셈이다.
그런데 2021년을 지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무엇보다 미국의 금리인상이 시작되면서 엔화 약세가 더욱 심화됐고, 이를 계기로 저평가된 일본 자산을 매입하려는 글로벌 투자자금이 몰려들었다. 그뿐 아니라 엔화 가치 하락 속에서 일본 기업 실적이 역사상 최고 수준에 도달한 것도 ‘바이 재팬’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지금 일본 주식이나 부동산을 사도 괜찮을까. 필자는 당장은 몰라도 중장기 전망은 밝다고 본다. 미국 금리인상이 올해 하반기를 고비로 중단될 가능성이 큰 데다, 아베노믹스 효과가 일본 경제에 조금씩 확산되는 징후가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글로벌 분산투자 차원에서 엔화 자산 투자는 충분히 매력 있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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