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양국 오케스트라 단원을 이끌고 훌륭한 연주를 빚어낸 지휘자 정명훈. 사진 제공 · 서울시립교향악단
이날 공연은 무대를 보는 것만으로 이미 장관이었다. 서울시향과 도쿄 필 단원들을 고르게 배치한 연합 오케스트라 약 110명, 서울시합창단, 서울모테트합창단, 안양시립합창단으로 구성된 연합 합창단 약 130명, 그리고 독창자 4명(소프라노 홍주영, 메조소프라노 야마시타 마키코, 테너 김석철, 바리톤 고모리 데루히코)까지 총 240여 명의 연주자가 대극장 무대를 꽉 채웠다.
이 매머드급 연주진을 이끈 지휘자는 역시 정명훈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정명훈은 서울시향을 2005년부터 맡아왔고, 도쿄 필과는 2001년부터 ‘특별예술고문’으로서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공연 프로그램은 베토벤 교향곡 제9번 ‘합창’. 지휘자는 프로그램북에 실린 인사말에서 작품에 담긴 화합, 우정, 사랑의 메시지를 되새겼다.
연주는 기대 이상이었다. 악단과 합창단의 규모를 키운 만큼 효율적인 연주가 쉽지 않았을 텐데, 서로를 익히 아는 지휘자와 오케스트라 단원들 사이에는 한 치의 간극도 보이지 않았고, 합창단도 매년 다루는 레퍼토리인 만큼 능숙한 가창으로 합세했으며, 독창자들의 노래도 준수했다. 특히 평상시 1.5배에 달하는 대규모 앙상블을 일사불란하게 통솔하면서 악곡을 치밀하고 강렬하게 재현해 실로 거대한 감흥을 빚어낸 ‘거장’ 정명훈의 솜씨가 눈부신 빛을 발했다.
다만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의 고질적 난점인 음향 문제는 이번에도 연주의 발목을 잡았는데, 시종 산만한 잔향이 만들어진 데다 강한 소리가 울린 직후에는 메아리까지 치는 바람에 연주의 흐름과 음들의 조직이 충분히 선명하게 부각되지 못했던 것.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이 클래식(어쿠스틱 음악까지 포함) 공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은 이미 오래된 중론인 만큼, 서울시민의 문화향유권 차원에서 시내 중심부에 새로운 콘서트홀 건립이 시급해 보인다.
한편 연주 후 마지막 커튼콜에서 정명훈은 객석을 향해 특유의 제스처를 보냈다. 즉 관객들의 기립을 유도하는 손짓을 한 것인데, 이는 그가 특별한 의미를 담은 공연을 마친 후에 종종 하는 행동이다. 혹자는 그런 행동을 두고 관객들에게 기립을 ‘강요’하는 오만한 행위라며 비난하기도 하지만, 오랫동안 그 모습을 지켜본 필자의 생각은 좀 다르다. 아마도 그것은 ‘이 공연은 우리(연주자와 관객) 모두의 축제이니 일어나서 동참해달라’는 일종의 제안이요, 권유가 아닐까.
하긴 한국말이 서툰 그가 기자회견에서 답변 대신 피아노 연주를 들려준 일을 두고서도 갖은 오해와 억측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때 그가 연주했던 곡이 슈만의 ‘트로이메라이’였던 걸로 기억한다. 정녕 우리는 그가 이 나라에서 계속 꿈을 꿀 수 있도록 배려해줄 수는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