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에게 선물한 일본 위스키 ‘하쿠슈 25년’. 산토리 홈페이지
하쿠슈 증류소의 철학 ‘자연과 함께’
유명 인사들이 공개 석상에서 주고받은 위스키인 만큼 주류시장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이런 질문이 따라왔다. “왜 수많은 고급 위스키 중 하쿠슈였을까.”일본 야마나시현에 위치한 하쿠슈 증류소는 산토리그룹의 두 번째 증류소다. 첫 번째인 야마자키 증류소가 교토 인근에 자리해 도시 접근성이 높다면, 하쿠슈 증류소는 야마나시현 남알프스산맥에 둘러싸인 숲속, 해발 약 700m의 자연 한가운데 위치한다.
야마자키 증류소는 오사카·교토권 물류를 고려해 설립됐다. 초대 공장장인 다케츠루 마사타카(일본 위스키의 아버지)는 야마자키 증류소 기후가 스코틀랜드와 너무 다르다는 이유로 설립에 반대했다. 결국 10년간 근무한 뒤 스코틀랜드 기후에 가까운 홋카이도 요이치로 떠났고, 그곳에서 닛카 위스키를 만드는 데 성공한다.
산토리도 스코틀랜드와 유사한 환경에서 위스키를 만들겠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다만 현실적으로 제2 증류소를 세울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야마자키 증류소 하나만 운영하다가, 1964년 도쿄올림픽을 기점으로 위스키 수요가 폭발하자 신규 증류소 설립 계획을 본격화했다. 그렇게 10여 년에 걸친 조사와 준비 끝에 1973년 산토리의 숙원이던 ‘자연 속 증류소’ 하쿠슈 증류소를 완공했다.
그만큼 하쿠슈 위스키의 역사는 상대적으로 짧은 편이다. 야마자키 증류소에는 55년 숙성 제품이 있지만 하쿠슈 증류소는 가장 긴 숙성 연도가 25년이다. 그리고 이런 짧은 역사를 담은 하쿠슈 25년은 증류소 정체성을 반영한 시그니처가 됐다.
하쿠슈 증류소의 철학은 산토리가 이 증류소를 설립한 배경과 동일하다. ‘자연과 함께’를 실천하는 일이다. 증류소 주변에는 ‘새의 길(bird sanctuary)’이 있는데, 인근 서식 동물이 단 한 종도 사라지지 않도록 매년 조사·보호에 힘쓰고 있다. 하쿠슈 위스키 보틀이 초록색인 것도 증류소가 위치한 숲을 상징한다.
자연 경관과 어우러진 하쿠슈 증류소는 방문하려는 사람도 많다. 증류소 견학은 홈페이지 예약을 통한 추첨으로 이뤄지는데, 매번 수십 대 1 경쟁률을 기록한다. 견학 자체가 복권에 당첨되는 행운에 가까운 상황이다. 증류소 규모가 워낙 커서 견학 때는 버스를 타야 한다. 견학 코스는 증류소 내부까지 깊이 탐방할 수 있게 짜여 있다. 원액 제조를 위한 발효조와 증류기, 거대한 오크통 숙성 공간 등을 모두 관람할 수 있고 마지막에는 하쿠슈 위스키를 이용한 칵테일 수업이 진행된다. 투어 후 옵션으로 하쿠슈 25년도 맛볼 수 있다. 한 잔 가격은 약 2만2000엔, 한국 돈으로 20만 원이 넘는다.

일본 야마나시현 하쿠슈 증류소의 증류기. 명욱 제공
스모키한 향과 부드러운 목 넘김 공존
하쿠슈 위스키는 산토리의 대표 제품인 히비키 위스키, 야마자키 증류소의 야마자키 위스키와는 맛이 사뭇 다르다. 히비키와 야마자키는 대체로 피트(peat·이탄: 위스키에 스모키한 향을 입힐 때 사용하는 토양 성분) 향을 약하게 사용해 부드럽고 편한 음용을 지향하는 반면, 하쿠슈는 더 강한 피트 몰트를 사용한다. 일본식 편안함보다 스카치식 질감에 가까운 방향을 택한 것이다. 그런데 이 지역 연수가 워낙 부드러워서 스모키한 향과 부드러운 목 넘김이 공존하는 독특한 스타일이 됐다.그렇다면 황 CEO는 왜 하쿠슈 25년을 선물했을까. 그의 의도를 단정할 수는 없다. 선물을 고른 과정도 직접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상징적으로 해석할 만한 지점은 있다. 하쿠슈 위스키가 의미하는 바는 숲과 자연, 그 속에서 생태계를 지키며 운영되는 증류소가 가진 높은 신뢰도와 진정성이다. 또 20년 넘는 긴 시간 동안 숙성을 거쳐야 완성되는 위스키는 단기 성과가 아니라, ‘오랫동안 긴 호흡으로 함께 가는 관계’라는 메시지를 준다. 결국 황 CEO가 술 한 병에 담아 보낸 것은 ‘깨끗한 관계는 과장하지 않아도 스스로 오래 지속된다는 믿음’이 아니었을까.
명욱 칼럼니스트는… 주류 인문학 및 트렌드 연구가. 숙명여대 미식문화 최고위과정 주임교수를 거쳐 세종사이버대 바리스타&소믈리에학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술품’과 ‘말술남녀’가 있다. 최근 술을 통해 역사와 트렌드를 바라보는 ‘술기로운 세계사’를 출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