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 샤갈, ‘붉은 꽃다발과 연인들’, 1975. [사진 제공 · 삼성]
그런데 영국 국립현대미술관 이름이 왜 테이트일까. 테이트 미술관은 제당 사업가이자 미술품 수집가였던 헨리 테이트가 국가에 기증한 근현대미술품 65점과 건립 비용을 토대로 1897년 세워졌다. 그래서 기증자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국립미술관임에도 테이트라는 이름을 계속 쓰고 있는 것이다. 빈센트 반고흐 작품을 270점 이상 소장한 네덜란드 크뢸러 뮐러 미술관도 소장품과 미술관 부지를 기증한 설립자 이름을 딴 국립미술관이고, 스페인 마드리드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도 세계적인 예술품 수집가였던 티센 보르네미사 남작의 수집품을 바탕으로 설립된 국립미술관이다. 이렇게 해외에는 국립미술관이지만 설립자나 기증자 이름을 딴 미술관이 꽤 많다.
최근 국내 문화계 핫이슈는 ‘이건희 컬렉션’이다.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소유의 고미술품과 유물 2만1600여 점, 국내외 유명 작가들의 근현대미술품 1400여 점이 국가에 기증됐기 때문이다. 이번 기증 미술품은 감정가만 3조 원대에 달한다. 국보급 유물은 물론이고, 국내외 거장의 작품을 총망라했다. 그야말로 돈이 있어도 살 수 없는 귀한 문화유산이다. 기증품 규모가 워낙 커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등이 모두 수용할 수 없는 상황이다. 문재인 대통령까지 나서 ‘이건희 컬렉션’을 전시할 공간을 마련하라고 지시한 만큼 별도의 전시관이 세워질 가능성이 커졌다. 여기에 각 지방자치단체들까지 나서 서로 유치 경쟁을 벌이는 형국이라 이건희 컬렉션 이슈는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과연 대한민국판 테이트 모던이 탄생할 수 있을까.
놀라운 이건희 컬렉션 리스트
문득 궁금해진다. 도대체 ‘이건희 컬렉션’의 실체는 무엇인가. 미술계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소문만 무성하게 떠돌던 이 회장의 소장품 리스트엔 과연 어떤 작가들의 작품이 있는 걸까.겸재 정선, ‘정선필 인왕제색도’, 국보 제216호. [사진 제공 · 삼성]
단원 김홍도, ‘김홍도필 추성부도’, 1805. [사진 제공 · 삼성]
박수근, ‘절구질하는 여인’, 1954. [사진 제공 · 삼성]
이중섭, ‘황소’, 1950년대. [사진 제공 · 삼성]
장욱진, ‘나룻배’, 1951. [사진 제공 · 삼성]
김환기, ‘여인들과 항아리’, 1950년대. [사진 제공 · 삼성]
클로드 모네, ‘수련이 있는 연못’, 1919~1920. [사진 제공 · 삼성]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책 읽는 여인’, 1890년대. [사진 제공 · 삼성]
폴 고갱, ‘무제(Untitled)’, 1875. [사진 제공 · 삼성]
카미유 피사로, ‘퐁투아즈 시장’, 1893. [사진 제공 · 삼성]
특히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이 크게 주목받고 있는데, 이는 수련 연못 그림이 모네의 대표작이자 가격도 천문학적일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모네는 43세 때 프랑스 지베르니에 정착해 연못과 정원을 직접 가꾸며 수련 연못 시리즈 수백 점을 제작했다. 말년에는 시력이 나빠져 추상화처럼 그렸는데 역설적이게도 20세기 추상미술의 전조를 보여주는,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작품이 됐다. 그래서 가격도 비싸다. 모네의 수련 그림 한 점은 2018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950억 원에 낙찰된 바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연간 소장품 구입비가 50억 원가량인 것을 감안할 경우 이번 기증이 아니었다면 절대 소장할 수 없는 그림이다.
빌럼 더코닝, ‘무제X IV’, 1975. [사진 제공 · 삼성]
살바도르 달리, ‘켄타우로스 가족’, 1940. [사진 제공 · 삼성]
1969년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은 이번 기증품을 포함해 총 1만200여 점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이 중 5400여 점이 기증품으로, 이번 1400여 점의 기증은 역대 최대 규모일 뿐 아니라, 앞으로 두 번 다시 일어나기 힘든 ‘사건’일 것이다.
개인 수장고에서 공공 미술관으로
해마다 1000만 명이 루브르 박물관을 찾는 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테이트 모던에 가는 건 파블로 피카소, 마크 로스코, 앤디 워홀, 게르하르트 리히터 등의 그림을 언제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국립현대미술관에 가면 무얼 볼 수 있을까. 그 흔한 피카소 작품도, 워홀의 대표작 하나도 없다. 어느 미술관이든 그곳을 상징하는, 그곳에 가야만 볼 수 있는 시니그처 작품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아무리 건축이 멋들어져도 그 안에 볼거리가 없으면 사람들은 가지 않는다. 국립미술관들은 늘 예산이 빠듯한 법. 따라서 기업이나 개인의 후원과 양질의 소장품 기증은 필수적이다. 또한 기증 행위와 선의는 존중받아야 한다. 돈이 있다고 미술품과 문화재를 수집하는 것도 아니고, 부자라고 다 자발적으로 기부하는 것도 아니다. 안목 높은 수집가로서 한 개인이 대를 이어 일군 ‘이건희 컬렉션’의 기증은 선례가 돼야 한다. 여러 이유로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나라 기증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건 분명하다. 잘 보존하고 잘 보여줄 수 있는, 제대로 된 미술관을 마련해 다른 수집가들에게도 자극제가 되면 더할 나위 없겠다.이번 기증품 중엔 수십 년 만에 처음 공개되는 작품도 많다. 공개된 적이 없어 연구도 되지 않아 정보가 없는 것도 많다. 개인 수장고를 벗어나 공공장소로 나와야 활발한 토론과 연구가 이뤄질 수 있다. 이건희 컬렉션 공개 전시가 열릴 올여름이 간절히 기다려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