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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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장영실도 임금을 버렸나이다

연극 ‘궁리’

  • 김유림 기자 rim@donga.com

    입력2012-05-21 10: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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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 장영실도 임금을 버렸나이다
    비바람이 몰아친다. 해진 흰색 저고리를 입은 사람들이 좀비처럼 꿈틀대다 이내 수레를 이룬다. 벼락이 치는 가운데 ‘인간 수레’가 힘겹게 언덕을 오른다. 그 위에 탄 왕마저 위태롭다. 콰콰콰쾅! 천둥소리와 함께 수레를 이루던 사람들이 무대 아래로 떨어진다. 절규와 비탄. 여기서 비극이 시작된다.

    조선시대 과학자 장영실. 천민 출신 천문학자로 측우기, 해시계, 천상열차분야지도 등을 만들어 주목받았지만 그가 만든 세종의 수레가 부서지면서 역사에서 사라졌다. 연극 ‘궁리’는 위대한 발명품을 남겼지만 소수자라는 이유로 사라져버린 장영실의 궤적을 추적한다.

    장영실은 주군에게 집착했다. “남근을 잘라서라도 임금 곁에 있겠다”고 떼를 쓰고, 임금 등에 난 종기의 고름을 입으로 빨아냈다. 세종에 대한 그의 집착에는 이유가 있었다. 장영실은 지방 천민 출신으로 원나라 이주민의 피가 섞인 이른바 ‘잡종’이다. 세종은 장영실의 배경과 관계없이 그의 전문성을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그에게 “조선을 중심으로 하늘 별자리를 다시 정립하라”는 임무를 맡겼다. 하늘의 기준이 북극성이듯, 장영실에게 주군은 인생의 축이다.

    하지만 영의정 황희 등 사대부의 의견은 달랐다. 명나라는 조선의 과학이 날로 발전하는 것을 경계했고, 사대부는 그런 명나라의 눈치를 봤다. 아니, 진짜 속내는 ‘근본 없는’ 장영실이 임금 곁에 있는 것이 못마땅했다.

    신, 장영실도 임금을 버렸나이다
    호시탐탐 장영실을 제거할 기회를 노리던 사대부의 압박에 못 이겨 임금은 천문학자 장영실에게 임금의 수레를 만들라고 명한다. 그리고 수레가 부서지자 단순히 자문만 해줬던 장영실을 기다렸다는 듯 제거한다. 무기력한 세종은 ‘자기 사람’ 장영실을 구하고자 열심히 ‘궁리’하지만 결국 사대부의 결정을 따른다. 태형을 맞고 관직에서 쫓겨난 장영실은 자신이 만든 측우기가 ‘명나라 하사품’으로 둔갑한 것을 보며 임금에 대한 마음을 접는다. 그리고 그는 ‘북문’으로 간다. 북극성과 세종을 버리고 ‘자신의 별’을 찾아 떠나는 것이다. 연출가 이윤택은 이 결론에 대해 “장영실이 예속된 신분을 버리고 주체적 자아를 찾아 떠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연극은 4월 24일부터 3주간 국립극단에서 초연했는데, 대부분 공연에서 보조석까지 매진됐다. 특히 20, 30대 젊은 층의 반응이 뜨거웠다. 역사를 소재로 한 연극으로는 이례적인 결과다.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은 ‘장영실’이 있는지를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장영실이 꿈꾸는 세계는 단순하다. 능력을 발휘해 과학을 발전시키고 주군에게 인정받는 것. 우리 사회의 젊은이들도 각자의 ‘소박한’ 성공을 위해 앞다퉈 달려간다. 하지만 결국 정치적 논리, 냉정한 사회구조 앞에 무릎 꿇는다. 그래서일까. 옥에 갇혀 신나게 측우기, 해시계를 재현하는 장영실의 모습은 지극히 동화적이고 그래서 비극적이다.

    5월 18일부터 20일까지 안산문화예술의전당 달맞이극장. 5월 24일부터 6월 3일까지 고양아람누리 새라새극장. 문의 1688-5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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