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장 큰 상징은 무대를 가르는 선이다. 마치 칠판에 분필로 찍 그어놓은 것 같은 흰색 선. 남자주인공 인우의 설명대로라면 이 선은 지구다. 이 지구 위 어딘가에 바늘을 꽂고, 나풀대던 씨앗 하나가 떨어져 그 바늘에 꽂힐 확률만큼 희박한 가능성을 뚫고 사람은 인연을 만든다는 것이다.
스무 살 여름, 태희가 그 많은 사람 중 하필 인우 우산 속으로 들어온 것은 인연이라고밖에 설명이 안 된다. 두 사람은 서툴지만 강렬한 사랑을 나눈다. 하지만 인우의 군 입대를 앞두고 태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리고 서른일곱 살 인우 앞에 남학생 현빈이 나타난다. 열일곱 살 현빈은 하는 말과 행동, 생각 모든 면에서 태희와 꼭 닮았다. 인우는 고뇌한다. “이 아이는 정말 태희일까? 이 아이가 태희라면 내가 사랑해도 될까?” 이런 엄청난 우연 앞에 도덕적 잣대나 자기 제어는 통하지 않는다. 결국 인우는 “사랑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밖에 없어 사랑하는 것”이라며 운명을 받아들인다.
흰색 선으로 무대 위아래가 명확히 갈리는 것처럼, 태희와 인우는 각기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불의의 사고로 죽었다가 남자 몸으로 다시 태어난 태희와 이미 가정을 꾸린 인우는 합일점을 찾을 수 없는 처지다. 하지만 이들은 운명을 거부하고 함께하려고 죽음도 불사한다. “어차피 우리 인연은 이번 생이 끝이 아닐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주인공들이 사랑을 인정하는 순간, 무대를 분리하고 엇갈리게 하던 선이 사라진다. 어느덧 두 사람은 하늘이 뻥 뚫린 산 위에 서 있다. 관객의 안타까웠던 마음도 뻥 뚫린다. 그러면서 이들의 사랑이 단순히 동성애나 판타지가 아닌, 거부할 수 없는 운명임을 관객도 받아들인다.

최근 영화나 드라마를 원작으로 한 창작 뮤지컬이 줄을 잇는데,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는 이들 중 ‘원작을 극복한 몇 안 되는 작품’이다. 9월 2일까지, 서울 블루스퀘어 삼성카드홀, 문의 02-744-4337.